D-19 레플리카, 다 버리다?
현재 아지트 내부는 완전 비상사태다. 레플리카님의 제 2비서 스키니아님이 나타나더니 뒤이어 레플리카님이 제 1비서 델로님을 데리고 나타났다. 무장일랑 전혀 하지 않은 평범한 복색에 길드원들을 보며 아주 환하게 웃었다. 그 의도를 알 수 없어 모두 초긴장 상태로 들어갈 수밖에.
“장례 터는 어디지?”
“네?”
“너희라면 분명 안타깝게 죽은 동료들의 장례를 치렀을 거 아냐.”
“아, 네. ……이쪽입니다.”
사파야님이 그들의 새 아지트를 레플리카님께 구석구석 소개시켜 드리는 중이다. 레플리카님과 사파야님이 나란히 걷고 그 뒤를 비서 분들이 나란히 따라가고 마지막으로 내가 맨뒤에서 종종종 쫓아가고 있다. 레플리카님은 세세하게 살피면서 이건 그 때랑 똑같네, 이건 새로운 거야 하고 갖가지 감탄사를 연발한다. 오랜만에 아들 집을 찾아온 아버지 같다. 아지트를 돌아다니는 내내 사파야님의 얼굴에서 초조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사파야가 불러서 온 거라면서요?”
“에? 에, 네.”
스키니아님이 갑자기 뒤돌아서서 격하게 놀랐다. 몇 차례 안면 튼 사이고, 서로 정보를 교환할 때 대개 비서끼리 직접 일을 처리하기 때문에 형식적인 대화를 몇 번 해봤지만 이렇게 뻘쭘한 상황에서 사적인 얘기를 할 만큼 친하지는 않다. 그녀의 말투가 사무적이라 다행이지 정말 친근하게 구는 투였으면 거부감까지 생겼을 지도 모른다.
“이거 바알님께서 전해주라 하셨습니다.”
그녀가 내민 것은 정사각형의 짙은 파란색 사파이어 피어싱이다. 세일마글레님이 휴가 가기 전에 내게 준 맨투맨 무전기. 훗. 통신기가 아니라 무전기가 먼저 떠오를 줄이야. 지금쯤이면 세일마글레님도 내가 사파야님과 같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거다.
“안 받으실 건가요?”
“아녀,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손바닥 위로 다시 돌아온 피어싱이 왠지 무겁다. 손바닥 한가운데에 피어싱을 올려놓은 채 주먹을 꼭 쥐자 내 맥박이 느껴진다. …내가 지금 이렇게 한 눈 팔고 있을 때가 아닌데!
[덥썩]
부지런히 뒤쫓아가려는데 델로님이 내 어깨를 붙잡는다.
“둘만 있게 해드립시다. 이렇게 여유 있게 얘기를 나누는 게 얼마만인지 모릅니다.”
레플리카님은 지금도 표면상으로만 튜리-엘더 길드를 완전 소멸 시키겠다 얘기하고 여전히 그들을 배려하고 있구나. 어쩌면 레플리카님은 아지트가 어디 있는지 알면서 다른 마왕들의 눈치 때문에 찾아오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바알님과 같이 수색을 시작해서도 일부러 못 찾은 척 시간을 끈 게 아닐까? 사파야님의 저택에서 작은 전투가 일어났을 때 레플리카님과 사파야님이 대치했다. 그 때 두 명은 과연 전력으로 서로를 상대할 수 있었을까? 내가 내린 결론은 ‘NO'다. 사파야님은 지금 벨제뷔트님에게 묶여있는 처지지만 차마 은인에게 상처 입힐 수 없었을 테고, 레플리카님은 자신이 지키지 못해 불행해진 자기 사람에게 제대로 된 공격은커녕 위협조차 제대로 못했을 거다.
“혹시 바알님도 여길 아시나요?”
“알고 계십니다. 지금 레플리카님이 여기 계신 걸 감추기 위해 다른 일을 벌이고 계십니다.”
내가 아는 그 바알님이 그런 선의를 베풀다니 놀랠 노자다. 혹시 세일마글레님에게 잔소리를 들었나? 설마 레플리카님이 바알님 면전에서 자존심을 또 꺾은 건 아니겠지.
“설마 공짜로 그러시는 건 아니겠죠?”
“찬필 군. 마왕이 움직이는데 대가가 없을 수 없습니다.”
없을 수 없다니, 우리 말 좀 쉽게 하죠. 그나저나 역시 두 마왕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오갔구나. 절대 그냥 해주는 법이 없다. 게다가 마왕끼리는 적대관계면 적대관계지 절대 친선관계가 될 수 없다. 어쩌다 한 번 베푸는 선의나 호의에는 반드시 대가가 있다. ‘실리주의 맹신자=마왕’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조금은 이 비정한 관계가 역겹다.
“다른 마왕 분들이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위험한 일인데, 레플리카님이 뭘 내 걸으셔서 바알님이 수락하셨죠?”
두 비서는 대답을 꺼린다.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아니, 레플리카님 쪽 관계자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아, 대답 안 하셔도 돼요. 바알님께 여쭤보면 알 수 있겠죠.”
“아닙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직까지 바알님의 비서 대리라는 호칭이 유효하나 보다. 피어싱도 전해주고, 혹시나 해서 미끼를 던져봤는데 바로 낚여준다. 누구 위세 믿고, 자신의 직위를 믿고 그걸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는 치사한 짓은 지극히 싫어하면서 내가 그걸 하다니, 선우 찬필, 너 타락했어.
“휴-. 그 자리에 찬필 군이라도 있었으면 레플리카님은 그렇게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됐을 겁니다.”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레플리카님께서 모든 영지를 바알님께 바치고 스스로 마왕의 이름을 버리려 하셨습니다. 바알님이 역정을 내려도 레플리카님은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박으며 비셨습니다.”
엄청난 걸 내걸었다. 모든 영지와 마왕의 직함. 평범한 마족으로 전락하면 그 다음은 뻔하다. 누군가의 손에 조용히 암살당할 것이다. 아마도 그 손은 마왕 벨제뷔트의 손이 되리라. 후에 튜리-엘더 길드가 그 소식을 들으면 마왕 벨제뷔트에게 반기를 들 것이고 결국은 마왕 벨제뷔트가 원하는 대로 깔끔한 결말이 환상동화의 마지막을 차지할 것이다. 그건 안 된다.
“바알님께서 받아들이셨나요?”
“사건이 잠잠해질 때까지 보류하겠다 하셨습니다.”
레플리카님이 모든 자존심도 버리고 갖고 있는 것 전부를 내걸고 사정하는데 그걸 덥썩 물자니 마왕 체면상 그건 아니다 싶어서 임기응변을 발휘한 티가 난다. 레플리카님에게서 빼앗을 트렌들리샤의 경우를 보면 이 정도 눈치 채는 건 식은 죽 먹기다. 바알님이 자기 사람에겐 턱없이 약하다 해도 자기 울타리 밖에 해당하는 모든 것은 철저하게 경계하고 배척한다, 누구나 그렇긴 하지만 특히나 바알님은 적으로 돌리면 위험한 타입니다.
“그래도 제가 중재할 여지가 있네요.”
몸은 약해도 머리는 강하니, 자, 내 두뇌여 간만에 하이퍼 울트라 슈퍼 초특급 메가 파워를 발휘할 때다. 마왕 벨제뷔트의 체스 판을 공략할 첫 단계를 시동할 때가 왔다. 아니, 이미 첫 단계를 계획했다. ‘준비 단계’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첫 단계를 천천히 진행하고 이제 진짜 제 1 단계를 시작하는 거다. 두뇌싸움 만큼은 밀리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바알님은 이미 다 받겠다고 결정하신 것 같습니다만.”
“속으로 결정하면 뭐해요. 계약서를 쓰지 않은 이상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요.”
“방법이 있으십니까?”
“최선책은 아니지만 꽤나 괜찮은 방법은 있어요.”
두 비서의 얼굴이 기대에 가득 차서는 내게 얼른 알려달라는 호소의 눈빛을 보냈다. 바알님도 레플리카님도 없는데 먼저 가르쳐주자니 좀 아깝다. 당사자들을 모으고 계약서까지 다 준비된 다음에 일을 진행시켜야하지 않겠는가.
“일단 무단 업무유기를 끝내야겠어요.”
그들을 사파야님이 걸어간 방향으로 두 다리를 움직였다. 내 뒤를 따라오는 비서들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가슴이 쿵쾅거릴 거다. 내가 생각해 낸 방책은 최소한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지금은 사파야님을 설득하는 것만 생각하자. 레플리카님도 같이 설득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장례 터로 가니 흰 천으로 덮인 단지를 매만지고 있는 레플리카님과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사파야님이 눈에 들어온다. 레플리카님은 지금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이, 허망함이 담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단지를 쓰다듬는 손은 부르르 떨려서 단지를 깨지는 않을까 아슬아슬해 보인다. 그들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자책감이 여간 크지 않을 거다.
“사파야님, 잠깐…….”
“무슨 일이시죠?”
레플리카님을 비서 분들에게 맡기고 사파야님을 데리고 구석으로 갔다.
“어제 저랑 한 약속 기억하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다들 조금 황당해 하긴 했지만 재밌을 것 같다고, 하자고 하더군요.”
“다행이네요.”
길드원들이 준비 단계에 불만 없이 동조해 준다니 고마울 따름이다. 조만간 있을 광대 연극이 비숍과 폰의 위치를 절묘하게 바꿀 거다. 나이트를 주시하던 비숍이 아무 상관없는 폰을 물어뜯어 죽이고 싶을 만큼 가증스럽게 여길 것이다. 고고하고 우아한 비숍이 한 순간에 천하게 망가지는 희극에 체스 플레이어는 어떻게 대응하시려나.
“포석을 깔려면 안전이 최우선 돼야죠. 전차를 대기시키고 앞에 방어선을 단단하게 두르고요.”
룩을 절묘하게 움직일 차례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 룩을 딱 한 칸만 움직여서 상대 룩이 내 진영으로 들어오도록 꾀는 거다.
내 입가에 미소가 보이자 사파야님이 바로 경청자세를 취한다. 어제 짠 계획이 퍽이나 마음에 든 모양이다. 이렇게나 다음 계획에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다. 잘하면 그를 설득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려면 제가 다시 바알님의 비서 대리가 돼야 하는데…… 혹시 불쾌하시려나요?”
“바, 마왕 바알께 말입니까?”
“아까 델로님과 스키니아님께 들었는데 레플리카님께서 바알님께 무릎을 꿇으셨대요. 제가 손보지 않으면 그 계획을 실행하기도 전에 다 끝나버릴 거에요.”
사파야님은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다. 레플리카님이 자신들 때문에 또다시 굴욕을 겪으셨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플 거다.
“찬필 군의 머리는 가히 비상합니다. 제가 멋대로 부르는 바람에 오셔서 영문도 모르고 별별 고생만 하시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모두가 해방될 방법만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찬필 군에게 앞으로 더 신세지겠습니다.”
튜리-엘더 길드 스스로가 해방되길 바라는 만큼 나도 그들이 해방되길 바란다. 터무니없는 환상동화를 망쳐버리고 싶고 체스 판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다. 마왕 벨제뷔트를 방해하고픈 신의 마음에 동조하고 싶다.
“그럼……. 어제는 광대 연극을 준비했으니까 오늘은 황제-교황 줄다리기를 준비할까요?”
“이번엔 줄다리기입니까? 그것도 유쾌할 것 같습니다.”
“글-쎄요. 당사자들이 즐거워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오늘 하루 안에 끝날 일이라 싱거울지도 모르겠어요.”
“당일치기가 가능합니까?”
“당일치기여야만 해요. 아주아주 급한 일이니까요.”
확실히 흥미를 갖고 있다. 내가 마왕 벨제뷔트의 체스를 망치겠다고 선언한 순간부터 인간이 아닌 내게로 흥미 거리가 바뀌었다. 선우 찬필이라는 인간이 과연 마계의 법칙을 깰 수 있을까 하는 도박에서 내 승리에 배팅했다. 이렇게 해도 죽고 저렇게 해도 죽는다면 인간의 방식대로 해보자는 냄새가 진하게 풍기지만, 뭐 어떤가. 내가 재밌으니까 됐다. 내 상대는 마왕이 아니라 미친 꼬마다. 이렇게 자기 암시를 걸었더니 진짜 눈에 뵈는 게 없어졌다. 발전했다, 이 녀석아.
“두 사람, 많이 친해졌나 보네. 하긴 둘 다 성격이 좋아서 금방 친해졌겠지.”
마음을 정리한 레플리카님이 다가왔다. 우리 둘의 얘기는 이 분도 비서들도 듣지 못했다.
“레플리카님, 혹시 바알님이 제 걱정 하셨어요?”
“하기는 하더라. 제대로 숨지도 도망치치도 못하는 녀석이 혹시나 뛰다가 넘어져서 코 깨지진 않았나- 하고.”
뭡니까. 걱정은 걱정입니다만 참 별나게 걱정하십니다. 내가 그렇게 무력한 인간으로 찍혀 있나? 왠지 돌아가기 싫다.
“그러면 코가 무사한 걸 보여드려야겠네요.”
“계속 여기 있는 거 아니었어? 이제 여기도 안전…….”
“애석하게도 사파야님의 말동무가 되기 전에 바알님의 비서 대리가 돼버려서요.”
레플리카님은 내가 내 안전을 위해 바알님께 돌아가는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뭐, 누구나 자기 우선적으로 그리고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니까 그리 여기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건 날 속물 취급하는 거랑 똑같다. 육신은 쓰잘데기 없어도 정신 하나는 제대로 된 인간이란 말이다.
“없어도 혼자 잘 하던걸.”
“지금 하고 있는 그 모양이 잘 하는 거라고요? 레플리카님, 농담이 지나치세요.”
분명히 세일마글레님의 영향이다. 바알님에 대해서 막말하딘, 내 입이 무섭다.
“너 간 크다…….”
당연한 반응이십니다.
“가서 무단 업무유기에 대한 시말서도 써야 하고, 엉망으로 처리된 건들을 다시 손봐야 하니까 지금 당장 가야겠어요.”
우연히 사파야님과 눈이 마주쳤다. 날 향해 웃고 있다. 잘 하라고 응원하는 거라 생각하겠다. 다시 생각해 보건데 마왕에게 대들려고 생각한 것 자체가 기적이다. 감시 선우 찬필이 겁도 없이 위험한 발상이나 하고, 마계의 지인들까지 이용하려 하고, 많-이 컸다. 심장은 계속 쿵쾅거리지만 머리는 즐기고 있다. 이 불협화음이 되레 재밌다. 갈 데 까지 가보는 것도 인생사 괜찮은 경험 아니겠어.
“다녀왔습니다.”
-바알의 성으로 돌아온 선우 찬필이 마왕 바알에게 내민 계약서
-계약서-
1. 마왕 바알은 마왕 레플리카의 영지를 모두 받고 마왕 레플리카는 마왕직에서 물러난다.
2. 마왕 바알은 레플리카를 대공작으로 임명하고 전 마왕 레플리카의 영지를 그에게 수여한다.
3. 마왕 바알은 튜리-엘더 길드를 마왕 바알 휘하 정식 기사단으로 임명한다.
4. 마왕 바알은 위의 기사단의 첫 임무로 대공작 레플리카와 그의 영지 수호를 내린다.
5. 대공작 레플리카는 마왕 바알의 부름에 즉시 응한다.
6. 제 3조의 기사단에게 마왕 바알과 대공작 레플리카가 별개 혹은 동시에 지시 및 명령 가능하다.
7. 이 관계에 대른 마왕이 간섭하는 것을 절대 배제한다.
8. 이 관계는 대공작 레플리카가 다시 마왕직에 오를 때까지 지속한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마왕보좌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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