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6 루시퍼, 실마리를 잡다?
한 숨 돌릴 만한 소식이 왔다. 전날 오후에 세일마글레님이 벨제뷔트의 성에서 나와 바알님의 영지 어딘가에 있단 소식이다. 세일마글레님이 먼저 ‘휴양지 갈아 치웠어-.’하고 자랑할 때 넌지시 내가 아는 진실을 터놨더니 ‘응, 그래?’하면서 성에서 나왔으니 걱정일랑 말라 한다. 그렇다. ‘응, 그래.’로 대답을 끝냈다. 뭐, 항상 그런 식이었으니까. 여하튼 바알님께 이 소식을 전해드리니까 몸을 흐물흐물 책상 위로 떨어뜨렸다. 무쟈게 걱정했나보다. 지금은 원상 복귀된 바알님과 갖은 서류를 살피는 중이다.
“여, 인간.”
[턱!]
“흐익!”
크고 거친 손이 등 뒤에서 내 머리를 우악스럽게 쥐었다. 신이시여, 목소리는 루시퍼님의 것이라 판단되오나…… 뒤돌아보기 싫습니다.
“손 떼라.”
“이 인간한테 볼 일이 있거든.”
“손 떼고 해.”
정말이지 손발이 다 오그라드는 줄 알았다. 바알님도 루시퍼님이 왜 날 찾아왔는지 눈치 채신 것 같다. 당연히 내가 만든 계약서 때문이겠지만 내 직감 상 시셰야님의 결혼식에서 장난을 친 것도 내가 주범이란 걸 알아차린 게 아닐까 싶다. 한낱 인간에게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으니 화가 나는 게 당연하다. 내 안전은 이대로 물 건너가는 건가? 어차피 마계에 들어온 순간부터 ‘내 안전’이 희박해지기 시작했으니까 미련은 없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게야?
“바알, 넌 어디까지 알고 있냐?”
“뭘?”
“벨제뷔트가 하고 있는 짓거리 말이야.”
[쿵!]
이건 심장이 크게 뛰는 소리가 아니라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다. 맙소사. 루시퍼님이 벨제뷔트님을 의심할 줄이야. 언젠 안 그랬냐만은, 어제부터 충격의 연속이다.
“그 녀석 이름은 거내지 마. 상당히 짜증나니까.”
“세일마글레님이 엮이셨어요.”
“아, 그래?”
아주 작은 떡밥을 던졌지만 루시퍼님은 무슨 일인지 바로 잡아냈다. 순간 천진난만한 표정이 보였는데 곧장 심각한 얼굴로 바뀌었다. 혹시 내가 헛 걸 본 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고속의 표정 바꿔치기였다.
“녀석 이름이 안 나오면 얘기가 안 된다고. 안 그래, 인간? 넌 바알보다 많-이 알고 있지?”
루시퍼님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벨제뷔트님을 의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탄할 만하다. 자, 우리 모두 기특한 루시퍼님에게 박수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루시퍼님은 지금 내가 다 알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하, 솔직하게 다 털어놔야 하나. 좀 이르지만 루시퍼님이 스스로 알아냈으니까 상으로 정보를 조금 흘려도 괜찮을 거다. 안 괜찮을 지도 모른다. 제길. 머릿속이 혼돈이 되어 간다.
“그 녀석은 건들지 마라.”
“이 인간이 아니면 진짜와 가짜를 못 가려내!”
[쾅!]
있는 힘껏 책상을 내려치는데 하마터면 서류더미가 바닥으로 쏟아질 뻔했다. 바알님은 이 무례한 행동 때문에 이마에 혈관이 섰지만 루시퍼님을 노려보지도,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상대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것이 도리어 루시퍼님을 자극한 듯싶다.
“인간, 너, 아바트 녀석들한테 내 딸의 결혼식을 망치라 명령한 놈이 벨제뷔트란 거 알고 있지? 그래서 네놈이 그 녀석들을 도와준 거잖아. 아- 무도 다치지 않고 끝나게 말이야.”
역시 내 직감대로 결혼식 건까지 눈치 챘다. 가짜 배후가 나고 진짜 배후가 마왕 벨제뷔트라는 중대한 사실까지 알아냈다. 더 이상 입 다물고 있지 못할 것 같다. 바알님의 시선도 내게 고정됐으니 더더욱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끄응-.”
대답을 하지 못하고 속만 태우고 있는데, 바알님이 일어나서 내 양손 위에 서류더미를 올려놓고 날 스쳐 지나며 집무실 가운데에 있는 소파에 몸을 깊게 파묻는다. 이걸 들고 어쩌라는 건지……. 그저 멍하니 서있을 뿐이다.
“난 네 놈 얘기부터 듣고 싶은데?”
“뭐?”
“비서 대리가 알긴 뭘 알겠어? 그 짜증나는 이름을 맨 먼저 꺼낸 너부터 자초지종을 설명해 봐.”
“내가 아는 건 겉껍데기 밖에 안 돼.”
“시끄러. 어쨌든 안단 얘기잖아.”
바알님이 날 보호하기 위해 시간을 끌고 있단 건 잘 알겠다. 그런데 늦든 빠르든 진실을 내 입을 통해 알게 될 것이고, 마왕들이 진실을 알게 된 때, 벨제뷔트의 체스 판은 더 이상 건들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마왕들이 자존심 굽히고 내 말대로 따를 리 없지 않은가. 이제 겨우 말 몇 개를 움직였다. 이 정도로는 훼방 놨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계속 침묵만 지키면 바알님만…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될 것이다. 하……. 이도저도 못하는 내가 불상하다. 진퇴양난, 사면초가 이 모두가 들어맞는 순간이다.
“벨제뷔트님이…….”
내 언변술이 마왕들에게도 통한다면 그들도 내가 만든, 신이 원하는, 벨제뷔트 방해 놀이에 참여할 것이다. 아니, 최소한 부정적으로 간섭하진 않을 것이다. 날 신뢰하는 바알님을 믿고, 좀 빠르지만, 진실을 실토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 예측되지 않는다. 심장이 초고속으로 거센 펌프질을 한다.
“…아니, 아주 오래된 끔찍한 동화의 서장이 조용하고도 비열하게 시작해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아무도 몰라요. 제 3자인 제 눈에는 온통 모순밖에 보이지 않는데, 잔혹한 환상동화 안에 사는 것 같아 매일매일이 힘든데, 그 동화의 주인공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상상이 되세요? 독재자가 멋대로 가지고 노는 체스 판에서 불쌍한 나이트가 힘없는 말을 하나씩 죽여야 하는 괴로움을 몇 백 년 동안 갖고 살았는데 아무도 몰라요. 자신이 플레이어의 수중에서 생사가 결정된다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고, 유일하게 알아챈 이들이 플레이어에게 직접 명령을 받는 나이트뿐이에요. 한 명의 유희를 위해 한 세계가 통째로 체스 판에 올라섰는데 참 웃기지 않아요?
“뭔 소리야?”
“입 다물고 들어.”
바알님이야말로 백지상태에서 내 말을 듣고 있으면서 무슨 말인지 아는 것처럼 루시퍼님보다 더 제대로 듣고 있다.
“벨제뷔트라는 이름의 작은 꼬마가 마계라는 이름의 장난감을 누군가에게서 선물로 받았다. 이게 잔혹한 환상동화의 첫줄이고, 체스의 한 수 한 수가 그 다음 줄, 그 다음 장이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더 재밌는 건 아바트라는 이름의 나이트만 플레이어의 얼굴을 알고 있어요. 왜 일까요? 체스 판 위에서 어떤 말이 플레이어를 알까요? 한 번이라도 손이 닿은 적 있는 말 뿐이에요. 그러면 체스 판 위의 말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요?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다른 말 밖에 보지 않아요.”
난 지금 마왕들에게 등을 보이며 서있기 때문에 마왕들의 표정을 볼 수 없고, 마왕들도 내 표정을 볼 수 없다. 내가 얼마나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을지, 만약 지금 거울을 본다면 이게 내 얼굴인가, 내가 이런 표정도 짓는가 하고 놀랄지도 모른다. 심장이 시끄럽게 뛰놀지만 머리는 분명 깨 있다. 지금 무슨 말을 어떤 순서로 어떤 단어를 골라 배열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러니까 어쨌든 지금 나는 겉으로 제대로 말하고 있으면서 머릿속으로는 앞뒤 섞어가며 생각하고 있다. 누가 툭 건들면 밖으로 횡설수설할지도 모를 만큼 불안정하단 말이다.
“아바트 길드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그들에게 레플리카님을 걸고 협박한 당사자가 그들을 파탄으로 몰아넣고, 지금 튜리-엘더 길드를 만들어서 과거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어요. 살고 싶으면 내 말대로 해라. 그리고 죽어라. 인간 세계에서는요, 누군가가 협박해서 어절 수 없이 범죄를 저지르면 책임이 많이 줄어들어요. 하지만 시킨 자는, 원래 죄보다 더 무거운 책임을 지지요. 마계에서는 힘이 세고 머리가 좋으면 장땡이니까 나쁜 건 아바트 분들 밖에 안 되는 거겠죠? 그러니까 여태껏 괴롭힘을 당했겠죠.”
그들을 질타하는 투로, 그들을 비하하는 식의 발언이란 걸 어찌 모르겠는가.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내손에 들려 있는 서류도 같이 떨리고, 이 몹쓸 말을 술술 내뱉는 입술이 제일 심하게 떨린다. 머리 좋은 루시퍼님과 심각한 상황에서 제일 빛이 나는 바알님이라면 다 알아듣고 대강의 플롯을 이해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이 인정하냐 아니냐만 남았다.
어색한 침묵. 숨소리에 맥박소리가지 들릴 만큼의 정적. 신이시여, 아주 잠시라도 좋습니다. 제게 이 순간을 견딜 수 있게 심장과 두 다리를 붙잡아 주시지 않겠나이까. 이번만, 이 순간만 견디면 되나이다. 부디… 제발…… 불쌍한 어린 양을 굽어 살피지 않겠나이까.
“그러니까 벨제뷔트 녀석이 우릴 갖고 놀았단 말이야? 아니지, 갖고 노는 중인 거지. 하! 300년도 더 전부터 지금까지!”
루시퍼님은 최근의 일만 단서를 잡았나 보다. 논에 보이는 것이 현재 뿐이니 먼 과거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 마왕끼리는 분명 적대적 관계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갖고 있던 신뢰가 한 순간 배신감으로 바뀌었을 거다. 그리고 분노가 그 뒤를 바짝 따르겠지. 당장이라도 마왕 벨제뷔트의 면상에 주먹을 갈기고 싶을 것이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뿌득뿌득 이가는 소리가 들린다.
“넌 어쩔 생각이냐?”
도화선이 짧은 바알님이 의외로 침착하다. 그래도 속으로 엄청난 화를 짓누르고서 한 번에 터뜨릴 때를 기다리는 분위기다.
이제 주된 이야기를 끝냈으니 정면으로 그들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정면을 보이지 않고, 눈을 똑바로 보지 않고 그들을 설득할 수 없다. 그들이 섣불리 움직여 내가 깐 훼방의 포석을 무용지물로 만들지 않게 해야만 한다. 신이 내게 얼마큼의 지혜를 빌려줄지 알 수 없지만 부딪히고 보는 거다.
“환상 동화가 결말 없이 끝나도록 새하얀 원고지를 새카만 잉크로 엎든 훔치든 해야죠. 그리고 나이트만으로 게임 전체를 지배하는 고도의 체스 기술엔 약점이 있어요. 어떤 왕도 체크메이트되지 않게 판을 뒤섞든가 엎어버리든가 해야죠. 정신연령 7살짜리 소년을 확실하게 혼낼 거에요.”
-선우 찬필의 기록 : 마법사의 춤-
마왕 루시퍼가 눈치 챘는데 체스 플레이어가 못 알아챌 리 없다. 자신의 장난감들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새로운 놀이를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할까. 이도저도 아니다. 정신연령 7살짜리 체스 플레이어는 체스 말들이 스스로 움직이면서 새로운 놀이를 자신에게 보여주고 있다고, 자신도 거기에 끼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떤 경우의 수 중에서도 제일 위험한 발상이다. 만약 일이 커지면 먼저 시작한 건 너희고 난 중간에 꼈을 뿐이라며 발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우리 춤을 추자. 꼬마 아이는 빼고 우리끼리 즐겁게 춤을 추자. 아무나 함부로 끼지 못하는, 마법사들의 엄숙한 의식의 끝에서 마법사들만 출 수 있는 춤을 추자. 환상동화의 유일한 독자가 손가락을 빨며 소외감을 느낄 때까지 우리만의 춤을 추자.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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