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무실에 도착하니 책상 위에 쌓여있는 서류들이 저주스러워 보였다. 매일매일 처리해도 줄지 않는 모양이 증식 세포 같기도 했다. 엘더랑 같이 다스 엔데를 조사하는 자이에 무섭게 불어난 서류를 겨우 다 처리한 지 한 시간 만에 다시 쌓인 서류들. 휴식 시간을 갖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다.
[똑똑]
집무실 입구에서 책상에 쌓인 흰 무더기를 멀거니 쳐다보고 있는데 창밖으로 루시퍼가 보였다. 그는 시아를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데 시아 옆에 있는 민이 이를 바드득 갈며 살기를 드러내자 창문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표정은 밝은 환했다.
“너무 그러지 마.”
시아는 괜찮다 하며 여전히 옅은 살기를 풍기는 민을 뒤로 하고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 창문을 사이로 고위 악마의 잡담 같은 밀담이 시작됐다. 펜타곤에 대한 정보를 악마족 측에서도 왕을 필두로 수집하고 시아에게 그것을 제공해 왔다. 이에 가담하는 악마는 전원이 시아를 추종하는 자들임엔 틀림없다.
“이번엔 뭐라 했어요?”
민은 루시퍼 자체는 달갑지 않지만 그가 가져오는 정보는 유익한 것들이 대다수라-가끔 가디안스에서 수집한 정보와 겹치기도 하지만- 그것에 한해서는 흥미를 가졌다. 루시퍼를 악마계로 돌려보낸 시아는 짧은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멀쩡한 펜을 빙글빙글 돌렸다.
“페라이 녀석, 아직도 악마계를 들쑤시고 다니나봐. 이렇다 할 피해는 없는데 귀족들의 불만이 여간 심해야 말이지. 그래도 녀석 덕분에 하급 악마들이 멋대로 정크(키메라가 되는 과정에서 어떠한 이유로 인해 완전 키메라가 되지 못하고 오리지널 변종에서 폭주를 하거나 정체불명 괴물이 된 것들의 통칭)를 만들지 못하게 됐으니까 나를 포함한 상층부는 아직 내버려두자는 의견이고. 그 녀석에 관해선 늘 똑같은 얘기만 나오네.”
시아는 손 안에서 돌리던 펜을 마법으로 공중에 띄운 다음에 학교에서 받은 공문서 및 학교에 제출할 기타 등등에 서명하도록 했다. 수학여행 사유서며, 급식 신청서 등 흔히 볼 수 있는 이 서류들은 매년 봐서 지겨울 정도였다. 아직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집이 아닌 아지트에 사는 길드원들 것까지 시아가 대표로 서명한다. b.G(besonderes Gegeimnis ; 베존데레스 게하임니스 : 특별 비밀)용 서류는 조직의 우두머리나 고위 간부만 작성할 수 있는데, 가디안스에서는 b.G 작성을 시아가 맡았으므로 이왕 서명하는 거, 기타 평범한 공문서도 서명 업무를 맡았다. 시아가 좀 고지식한 면이 있다면, 보호자 서명을 피보호자가 꾸며 쓰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도 체인급 이상만 가입 가능한 가디안스에서 학교에 다니는 길드원은 그리 많지 않으니 이 단순 노동은 아주 소소한 형식적 업무 밖에 되지 않는다. 문제는 길드 업무와 관련된 서류 더미다. 일일이 읽고, 오류를 체크하고, 서명할 것과 돌려보낼 것을 분류하고, 각각 담당자에게 보내고 등등 내용을 읽을 필요가 없는 학교 공문서에 비하면 실질 업무량이 수백 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표정이 좀 심각했는데, 페라이 얘기만 나온 건 아니겠죠?”
“으응. 플루가 과거 헬의 영역에서 무스펠 실험을 기어코 시작했대.”
[후두둑]
민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탁자 위에 흘리듯이 떨어트렸다. 덕분에 원래 탁자 위에 놓여 있던 기처리 서류와 그가 떨어트린 미처리 서류가 섞였고 자연스레 잡무가 늘었다. 그는 얼빠진 얼굴을 한 채 약 3초간 정지했다가 퍼뜩 정신이 들면서 자신이 한 바보 같은 짓을 속히 수습했다.
“예상보다 바람직한 반응을 보여줘서 감격했어.”
“아니, 보스, 무스펠 실험이라면 먼 과거에 금기로 정해진 거잖아요, 그리고 ‘기어코’라뇨?”
서류를 정리하면서도 어리바리한 표정이었다. 펜타곤 중 플루에 관한 얘기를 가끔씩 들어왔지만 이번 소식은 여태껏 들은 것과는 전혀 무관한 폭탄 발언이었다. 그런데 시아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여겼다.
“아, 얘기 안 했구나. 그래도 상관없잖아. 지금 알았으니까.”
“초점이 안 맞아요.”
“으응……. 아직 정확하게 조사되지 않아서 나도 자세한 얘기는 못 해줘. 다만 이걸 노리는 거라고 추측은 하는데 얘기해주면 그 서류들이 또 엉망이 될 거야.”
시아는 마법으로 서류를 차례대로 빠르게 넘기면서 필요한 것에 서명을 했다. 손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있고 눈만 사용하는 것이다. 속독이 가능하고 순간기억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보통 사람들은 한 서류를 정독하고 파악하는데 10분이 최소라면 시아는 최대 30초였다. 그냥 종잇장을 파라락 넘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이에 모든 그림과 글자를 빠짐없이 눈에서 뇌로 전달하고 논리 및 연산 등 사고과정까지 완벽하게 끝낸다. 그래서 지금 책상 위에 쌓인 것들 중에 벌써 1/4를 끝냈다.
“페라이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서 일어난 예의 그 사건 이후, 펜타곤 측에서 일으키는 또 다른 대형 사건이 될 수 있는 건가요?”
“뭔 말이 그렇게 길어? 그냥 펜타곤 재출현 후 두 번째 대사건이라고 해.”
“그 말은…… 필연적으로 일이 커질…….”
“누구도 아니고 그 플루가, 어떤 것도 아니고 무스펠 실험을 한다는데 일이 안 커지고 배기겠냐고.”
보스는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가 쌓인 탓에 말투에서 귀찮음이 뚝뚝 흘러넘쳤다. 민은 그녀의 눈치를 보면서 그녀가 검토를 마친 종이 더미를 집무실 왼편의 사이드데스크로 옮겼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해당 부서별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갓 블러드 중에 헬의 후손은 존재하지 않지만 헬의 능력과 관련해서 ‘나흐폴게르(der Nachfolger :계승자)’가 있다는 건 알지?”
“그런 부류가 있다고만 알려져 있지 실제로 존재하는 지는 확인된 바 없다면서요.”
민은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시아의 말에 집중했다. 시아도 도중에 단순 노동을 멈췄다.
“갓 블러드는 몇몇 있는 거에 비해 나흐폴게르는 역사 속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그냥 전설 속 존재지. 하지만 그들이 기록할 걸로 보이는 책은 있어. 극비 마법서 중 일부가 그거라는데 나도 읽어 본 적이 없어. 악마왕이 티르의 나흐폴게르가 쓴 책을 갖고 있는데 표지만 보여주더라.”
“그게 이번 일이랑 무슨 관련이 있는데요?”
“결론만 말하면, 플루가 부적당한 방법으로 헬의 나흐폴게르가 쓴 책을 입수해서 무스펠 실험을 시작했다는 거야.”
시아가 초점 없는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며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다면 민은 짐짓 긴장된 얼굴로 시아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옛날 얘기를 할 때나 나올법한 나름 가벼운 단어가 무거운 대화 속에 섞여 나오니까 원래 심각한 단어보다 더 심각하게 느껴졌다. ‘나흐폴게르’니 ‘무스펠 실험’이니 하는 말이 결코 가벼운 단어는 아니지만 민담이나 전설에서나 접할 수 있는 거라 그 동안 그 단어들이 가지고 있던 고유의 심오함을 간과하고 있었던 탓이다.
“점점 신화 기록서가 역사서로 자리매김하는 기분인데요.”
“새삼스레 뭘. 갓 블러드가 은둔을 포기했을 때부터 이미 신화는 역사가 됐잖아.”
옛날이야기에는 관심 없는 시아가 신화에 만큼은 흥미를 갖는 이유가 갓 블러드인 크리세이스를 만났기 때문이었다. 피를 통해 타고난 신의 능력을 거부 반응 없이 발휘할 수 있는 존재는 한창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는 어린 소녀에게 신선한 자극이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신화’라 이름 붙은 것이라면 뭐든 머릿속에 넣으면서 단시간에 풍부한 지식을 습득했다.
그녀의 머리에서 ‘무스펠 실험’을 꺼내보자. 거인 중에서 불의 속성을 가진 거인을 무스펠이라 부르는데 창조기에 만들어진 불의 대지에서 태어난 괴수도 무스펠이라 부른다. 먼 고대에 일찍이 금기로 정해진 무스펠 실험은 바로 창조기의 괴수 무스펠에 대한 실험이다. 죽으므이 여왕(여신이라고도 부르지만 정확하게는 신이 아니다.), 헬이 죽음의 세계를 지배하면서 창조기 이후 내버려진 불의 대지와 그곳의 주민인 무스펠도 지배했다. 그러면서 신이라도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 생명의 창조.(신들이 한 인간을 만든 적 있으나 그건 분쟁을 끝내고 화해의 의미에서 모두의 합의로 인해 만든 딱 한 명뿐이다.) 괴수 무스펠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데 헬 스스로 피조물이 얼마나 위험한지 빨리 알아차렸다. 원래 괴수 무스펠도 어떤 괴수보다 강하고 무자비한데 무스펠 실험의 산물들은 그보다 더했다. 그래서 문제가 일어나기도 전에 위기를 느끼고 자발적으로 금기화했다. 그리고 불의 대지 자체가 헬의 강력한 마법에 의해 봉인됐다. 무스펠 실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책에만 기록돼 있으니 여기까지 서술하겠다.
“대체 그 책을 어디서 난 거야. 플루 성격상 심심풀이로 무스펠 실험을 하진 않을 텐데……. 으휴.”
시아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옅은 암기로 스트레스를 대신 방출했다. 민은 서류 정리를 잠시 미루고 아이스티를 만들었다.
“무스펠은 지나가기만 해도 그 일대가 불바다가 된다는데 장미 마녀에게는 상극 아닌가요?”
펜타곤은 각자 별칭이 있다. 본명 페어츠베어플루흐, 애칭 플루는 ‘장미 마녀’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먼저 시끄럽게 일을 벌인 페라이는 거울 마녀라 불리는데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플루가 장미 마녀라 불리는 이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글쎄. 어떠한 불에도 타지 않는 플루의 장미와, 무엇이든 태우고 어떠한 것에도 사그라지지 않는 무스펠의 불. 어디가 이길까나?”
“크루세이더도 견제해야하지만 펜타곤도 성가시다구요. 보스 성격상 내버려두지 못하실 텐데요?”
“내 말 재탕하는 게 네 취미지?”
“진지하게 가르쳐주시면 제가 그럴 필요 없지 않겠어요?”
민은 시아에게 긴 유리잔을 내밀다가 다시 뒤로 내뺐다. 시아는 뻘쭘해진 손을 허공에 둔 채 민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매처럼 쏘아보는 눈과 고양이 같이 동그란 눈이 수초 간 아이컨택트를 계속 했는데 결국은 매가 고양이에게 졌다. 아이스티를 획득한 시아는 아주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마셨다.
“역시 민이 만든 아이스티가 맛있다니까.”
시아는 방긋방긋 웃다가 민을 슬쩍 쳐다봤다. 체념한 얼굴.
“무스펠이 불의 대지 밖에서 돌아다니는 건 나도 사절이고, 악마왕도 사절이고, 다른 모든 이들 모두 싫어하는데 설마 가만히 내버려두겠어? 절대 키메라씩이나 되고 그 중에서도 우두머리로 꼽히는 플루가 허튼 짓은 안 할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모르니까 이쪽 세계에서 실험하도록 놔두진 않을 거야.”
“그러려면 플루의 실험지를 찾아야겠군요. ……랄까, 보스. 갑자기 순순히 가르쳐주시는 건 또 무슨 변덕이에요?”
“응? 정보를 원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바쳐라. 이게 우리 같은 뒷세계의 기본원칙이잖아.”
시아는 아이스티를 들어 보이며 민의 뚫어져라 쳐다보는 의심의 눈초리를 당연하다는 투로 가볍게 받아쳤다. 아이스티의 향미처럼 상큼한 응수였다. 민은 고개를 푹 숙이고 책상을 짚은 두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길드 내에서 민이 보스에게 제일 잘 적응하고, 보스를 가장 잘 안다지만 역시나 마이페이스 시아는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튀어나갈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보스는 제가 마냥 장난감 같죠?”
“아니.”
“아니긴요. 항상 말로 농락하잖아요.”
“말이 심하다. 보스가 자기 부하를 데리고 말장난 좀 하자는 건데.”
단순한 한마디지만 민의 가슴을 푹 찔렀다. 민은 자기 앞에 있는 동급생이 자신의 보스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했다. 시아는 자신이 바라는 반응을 민이 충실하게 보여줘서 불쾌했던 심기가 풀리고 따분한 사무 시간을 유쾌하게 흘려보낼 수 있어 마냥 즐거웠다. 그래서 평소엔 자신이 보스라고 강조하지 않지만 민을 약 올리기 위해 일부러 보스-부하를 언급한 것이다.
“있지, 민아. 네가 플루라면 무스펠 실험을 뭘 위해서 할 것 같아?”
시아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서 머리를 푹 숙인 민을 빤히 쳐다봤다. 민이 천천히 머리를 들 때 시아도 그에 맞춰 고개를 똑바로 세웠다.
“아예 실험을 안 할 걸요.”
“단순해서 좋구먼.”
아이스티를 후루룩 소리 내면서 한 모금 마셨다.
[화륵]
민의 왼쪽 뺨 바로 옆에 주먹만 한 검푸른 불꽃이 나타났는데 민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시아가 만든 악마와 불꽃은 와인드급 키메라로써 방어력이 높은 민에게 어떠한 고통도 주지 못했다. 시아가 조절한 바도 있지만, 민은 불이라면 느낄 수 있는 뜨거움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나라면 내가 부릴 수 있는 무스펠을 만들 거야. 새빨간 불꽃이 아니라 검푸른 불꽃이 일렁이고 아무데나 불꽃을 흘리고 다니지 않는 아주 쓸 만한 군사로 말이야.”
주먹만 한 불꽃이 사라지고, 시아가 서류더미에서 하나를 골라 민에게 건네줬다. 정보 부대의 한 대원이 제출한 보고서였는데 민의 관심을 후하게 살만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유리잔을 깨끗하게 비운 시아는 민의 표정 변화와 마기의 미세한 변화를 관찰했다. 엔돌핀이 활발하게 방출되면서 심장이 빠르게 박동하고 격하게 흥분되는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 포커페이스를 발휘했지만, 시아만 못해서 그녀의 눈에 감정 상승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시아에겐 이것도 유흥거리였다.
“그래도 무스펠에게 대항하려면 그 반대되는 녀석이 좋겠지.”
“설…마…… 글라셰가……. 보스, 이 얘길 하려고 이때까지 서설을 길게 한 거에요?”
“아니, 이건 마무리. 즉, 난 할 얘기 없어.”
창조기에 불의 대지와 얼음의 대지가 존재했다. 얼음의 대지는 지금까지도 열려있는데, 그 안의 생명체는 비밀로 남아있다. 편의의 차원에서 얼음의 대지에 사는 비밀스런 생명체를 통칭 글라셰라고 부를 뿐이다. 일부는 괴수 무스펠의 불꽃을 잠재울 수 있는 냉기를 뿜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글라셰가 발견됐다. 정확하게는 플러스가 글라셰인 키메라가 두 개체 발견됐다.
“수룡왕의 레어를 뒤집어엎은 키메라도 추적 중인데 이 키메라들도 찾으시겠다는 얘깁니까?”
“아, 휴의 말투. 흐음. 처음에 이 보고서를 받았을 땐 그냥 흥미만 생기는 정도였는데, 플루 녀석의 소식을 듣고 나니까 얘네가 급 끌려.”
시아는 서류 처리를 재개했다. 눈으로는 새 서류들을 초속으로 훑어보면서 손으로는 민이 쥐고 있는 중요한 보고서를 돌려받았다. 민은 시아가 새로운 사업을 벌일 때마다 긴장이 쌓였다. 알아서 잘 하는 모스님이건만 너무 독단적인 면도 있어서 그녀의 보좌로서 어떻게 거들어야 할지 감을 잡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신적으로 해로웠다.
“보스, 좀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민은 과감하게 시아가 보고 있는 서류를 가로챘다. 그 서류는 시아의 마력에 의해 뒤로 잘 넘어가고 있다가 민의 손에 잡힌 순간 밑으로 축 쳐졌다. 그런데 곧 쳐진 부분이 시아를 향해 떠오르고, 민의 손에 잡힌 부분은 점점 구겨졌다. 시아는 마력으로, 민은 악력으로 서류를 사이에 두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시답잖은 장난일랑 천하게 생각하는 시아는 괜한 오기 때문에 서류를 안 뺏기려고 버티다가 그냥 마력을 해제해 버렸다. 그 때문에 민은 서류를 쥔 채 뒤로 넘어졌다. 소파가 가까이 없었으면 추하게 자빠졌을 지도 모른다.
“내가 알아서 적절한 때에 다 말해줄 텐데 뭐가 그리 급해?”
“결국은 가르쳐주실 거면서 뭘 그렇게 뜸들이세요?”
시아와 민의 신경전은 실로 팽팽했다. 이건 보스와 부하 간에 흐르는 긴장이 아니라 동갑내기 친구 간에 펼쳐지는 유치한 고집이었다. 이 두 10대는 철저하게 거부하겠지만, 같이 지내는 시간이 점차 길어지면서 사소한 일에 부딪히는 경우가 늘어갔다. 그리고 점점 유치해졌다. 본인들이 자각하지 못할 뿐이었다.
“머리는 뒀다 뭐할 거야?”
“제가 무스펠이나 글라셰 이런 거에 빠싹한 것도 아닌데 머리가 있어 봤자 어떻게 써먹어요?”
“불을 제압하기 위해 얼음을 쓴다는데, 꼭 그것들을 잘 알아야 추측할 수 있냐?”
“대등해야 가능한 얘기잖아요. 보스가 노리는 글라셰는 순종이 아니라 키메라의 플러스 종족인데 무스펠에 대응하기 어렵다고요.”
[딱!]
시아는 마력을 뭉쳐 만든 유리 구슬만한 공을 민의 이마 한가운데를 향해 퉁겼고 정확하게 맞췄다. 공이 다시 시아에게 튕겨올 만큼 세게 쳤기 때문에 민은 두 손으로 이마를 가리며 고개를 숙이고 무지 고통스러워했다. 눈물까지 절로 났다.
“키메라의 플러스 종족이 순종보다 약하다고 말하는 거야? 본인이 키메라면서 그런 바보 같은 말을 하는 녀석이 세상에 어딨어?”
키메라에게 오리지널이나 플러스나 그 종족의 역량은 각 순종과 동일하다. 꾸준히 수행하면 발전하는 것도, 세상 유유자적하게 평화롭게 살면 퇴화하는 것도 순종과 다를 거 하나 없었다. 간혹 플러스가 유사 신급이나 특수 종족의 상위 작위 등이라면 순종보다 능력치가 떨어지는 때도 있다. 하지만 체인 급 이상으로 각성하면 순종과 비슷하고, 와인드급 이상으로 각성하면 대개 순종보다 강해질 수 있기 때문에 문젯거리가 안 된다.
“글라셰는 그냥 얼음의 대지에 사는 미확인 생명체의 총칭이잖아요. 혹시나 무스펠보다 약한 거라면…….”
“그러니까 찾아내서 확인해야지.”
“네?” “……에휴. 야, 나도 이제 막 겉껍질 같은 정보를 얻었어. 근데 어떻게 구체적인 걸 짜고 설명하고 하겠냐고.”
민은 이제 이해가 됐다. 시아가 아직 구체적인 뭔가를 생각한 바가 없는 것이다. 직소 퍼즐에 빗대어 보면, 일단 바로 눈에 보이는 조각먼저 손가락으로 건드려보고 한 번씩 들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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