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사무를 마친 민이 돌아왔다. 우연일까? 제 2천왕 디레스와 제 4천왕 크리세이스도 차례대로 집무실로 들어왔다. 각각 다른 용무로 따로따로 찾아온 건데 애석하게도 타이밍이 절묘했다. 그래도 다른 4천왕에게 알려져도 상관없는 것인지 껄끄러워하는 이 하나 없었다.
“이건 뭐 우연치고 너무 절묘하잖아. 그래도 제일 시답잖은 얘기를 할 녀석은 밀리엄 너겠지?”
“부정 안 해.”
시아는 책상 앞 안락의자에 편히 기대앉았다. 4천왕은-지원과 세나가 특별 수업을 받았던 그- 집무실의 가운데에 있는 소파에-시아를 중심으로- 좌우로 두 명씩 앉았다. 밀리엄은 아직까지 보스에게 보고할만한 거리가 없지만 4천왕 모두가 정말 우연히 모인 지금, 혼자 자리를 비우고 나가기 애매해서 그냥 안에 남았다.
“민이 넌 아까 아지트 밖으로 나가는 것 같던데, 그걸 보고하려는 거야?”
“네. 수색 부대가 가져온 괴생명체가 양성되는 곳을 발견했어요. 크루세이더의 짓이 아니에요.”
“안 그래도 화타의 말을 가져왔어. 그 안에 투여돼 있던 독은 기프테 폰 크로이추크와 완전히 다른 거래.”
민과 크리세이스가 내놓은 정보는 최근에 터져 나온 온갖 것들 중에서 제일 획기적인 것이었다. 크루세이더가 아닌 길드에서 특별한 약을 제조하는 경우야 흔한 일이지만 비정상적인 괴물을 만드는 일은 여간해선 있을 수 없었다. 곧바로 양대 길드 가디안스와 크루세이더에게 위험한 적으로 찍힐 텐데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상 시도조차 할 수 없다.
“하? 대체 어떤 바보가 그렇게나 빨리 죽고 싶대?”
시아는 인상을 팍 구겼다. 아무리 길드 크루세이더가 온당치 못한 약을 만들고 성가신 일을 벌여도 쓸모없는 괴물은 만들지 않는다. 순종을 키메라로 억지로 만들긴 하지만 둘 이상의 생명체를 그야말로 한 몸으로 만드는 짓거리는 안 한다는 얘기다. 시아는 이 엽기적인 범인을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길드 에덴입니다.”
“에덴……이라고.”
가디안스가 신생 길드지만 구성원 특성상 금방 최고의 길드로 등극했다. 그 때 밑으로 눌린 길드가 바로 에덴이다. 모든 길드 중에서 제일 오래됐다고 한다. 소문에 의하면 키메라의 역사와 에덴의 역사가 동일하고도 한다. 심지어는 펜타곤과 연관돼 있다는 소문도 있다.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에덴의 보스는 여태껏 바뀐 적도 없고 언제나 실루엣만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키메라의 전통이자 길드간 관습 때문에 에덴은 언제나 열외였다. 가입도 탈퇴도 없이 초창기 멤버 그대로 에덴을 지켰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가입이 불가능하다는 건 확실하다. 때문에 그들을 간섭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에덴에서 유출시키고 있다는 약이에요. 슬럼가에서 입수했어요.”
“돌아다닌 지 얼마나 됐데?”
“알 수 없다고 하네요. 이미 1년 넘었다는 것밖에 모른다고 해요.”
“말도 안 돼!”
어처구니없는 사실에 시아만 넋을 왔을까. 정보를 입수한 민조차 어안이 벙벙한데 다른 4천왕들은 당연히 멍 때리는 거다. 특히 수색·정보 부대를 지휘하는 디레스는 더더욱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다.
“1년이나 됐는데 지금에서야 저런 괴물이 나오고 이런 약이 있다는 것 자체를 아예 몰랐단 말이야?”
“뒷거래든 앞거래든 모든 물품을 파악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봐. 보스, 내 불찰이야. 다시 샅샅이 조사할게.”
디레스는 엄청난 실수에 얼굴을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민이 가져온 약은 한 번도 본적 없는 ‘침입자(길드에서 자신들의 영역에서 거래되지 않다가 갑자기 어둠의 루트로 들어온 외부의 물건을 일컫는 단어)’였다. 보통은 길어봤자 일주일이면 침입자를 발견하는데 이 침입자는 일이 커질 때까지 1년 동안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이건 자존심 문제나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 그리고 밖과 안의 거래도 더 단단히 단속하고.”
“Ja, f?r Sie, meine Boß."
영역 내의 약을 모두 거두고 폐기한다 해도 밖에서 또 들어오는 것이 뒷거래다. 시아는 어디에 구멍이 뚫린 건지 고민하면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역시 에덴이기 때문인가 싶었다.
“크리세이스. 화타가 그 약을 분석했다지? 원초 샘플이 생겼으니까 더 자세히 알아보라고 해.”
“Ja, f?r Sie, meine Boß."
크리세이스는 민이 입수한 약을 받아 챙겼다. 화타가 보여준 걸쭉한 액체와 똑같이 생겼다. 그가 살덩어리에서 문제의 약을 제대로 채취한 것이다. 아마 이 약을 전달받으면 미친 듯이 연구를 속행할 것이다. 크리세이스 휘하 길드원 중에 제일 바쁜 팀은 아무리 봐도 연구진과 치료반이다.
“보스, 이 와중에 말이지, 다른 큼지막한 건수가 있어.”
디레스는 한숨을 푹 쉬며 시아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디레스가 들고 온 ‘큼지막한 건수’는 분명 정보 부대의 수확물일 것이다. 수색 부대가 괴생명체를 가져와서는 머리 복잡한 일이 빵빵 터지고 있는데 정보 부대는 뭘 건졌을지 걱정이 10보 앞섰다. 그렇다고 안 들을 수도 없지 않은가. 제 2천왕은 뜸들이지 않고 핵심을 술술 말했다.
“지원이랑 세나가 있었다는 길드 말이야, 에덴에서 떨어져 나온 건데 보스가 다스 트로이에르스필(das Trauerspiel)의 친자라는군. 참고로, 아이들은 조부가 펜타곤이라는 사실을 몰라. 대신 조부가 다시 옛날 길드로 돌아갔다는 건 부친에게서 들었대. 그래서 그 조부를 추적해 보니까 스피였고 옛 길드가 에덴이었어.”
사마엘과 원 세훈에게 직접 당했다더니 역시 거물이 숨어있었다. 사마엘이 스피(다스 트로이에르스필의 애칭)를 어떻게 찾아냈는지 몰라도 지원과 세나를 놓친 건 그의 큰 실수였다. 덕분에 시아가 스피에게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
“절대 키메라 3세……. 그 녀석들, 자기네가 얼마나 대단한 핏줄인지 모르고 살았다니, 스피도 꽤나 입조심 했나보군.”
키메라의 자식은 키메라가 아니다. 키메라는-다시 말하는 거지만- 후천적인 종족이다. 그러니 키메라의 자식이 어떤 종족으로 태어날 지는 미지수다. 혼혈이든 순혈이든(예 : 네레이드는 순혈, 하프 네레이드는 혼혈) 순종이 태어날 뿐이다. 절대 키메라의 직계 후손이라도 마찬가지다. 펜타곤끼리 관계를 가져서 나온 자식이라면 어떨지 알 수 없지만 스피는 확실히 다른 펜타곤과 얽힌 것이 아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처신했다. 안 그러고서야 그의 존재나 그의 친자손의 존재가 이렇게 고요하게 감춰질 수 없다.
“보-스. 또 에덴이야?”
“그래, 또 에덴이야.”
밀리엄의 말이 맞다. 길드 에덴이 펜타곤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사실로 판명됐고 그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두 인물이 현재 가디안스에 있다. 정체불명의 역사적인 길드가 요주의 대상으로서 리스트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두 신입이 어떤 방식으로든 가히 더러운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 물론 최후의 방책이겠지만 길드 크루세이더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면 가디안스도 별 수 없다.
“지원이네 길드가 박살난 지 일주일 좀 넘었어. 그런데 스피도 모습을 안 보이고 사마엘도 잠잠하단 말이야.”
“페라이랑 플루를 견제하는 것도 힘든데 스피까지 출현하는 군요.”
“플루는 소식만 들리지 모습은 꽁꽁 숨기고 있으니까 더 스트레스지. 그래도 스피는… 우리 쪽에서 끌어낼 수도 있으니까 당분간 지켜보자고.”
디레스와 민의 푸념을 시아가 차분히 받아들였다. 펜타곤은 성가신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먼저 자극하거나 특별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과거나 현재나 시아의 주 초점은 길드 크루세이더, 특히 사마엘 클러치였다.
“지금은 에덴이 뿌린 침입자부터 처리하고 보자. 크리세이스, 노는 녀석들을 골라서 디레스한테 보내. 이쪽이 제일 많은 일손이 필요해. 디레스, 거리 정리랑 뒤처리, 하나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끝내. 민, 에덴과 크루세이더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밀리엄, 진격 부대는 이번에 나랑 같이 원정 나갈 거야.”
“원정?”
다른 4천왕들의 말을 얌전히 들으면서 자신이 낄 염려는 없다고 안심하던 중에 보스에게스 뜬금없는 말을 받았다. 타 길드와 직접 부딪히거나 밖에서 건진 큰 건수 중 그들에게 해당하는 몇 가지가 아니고서야 진격 부대는 원정을 나갈 일이 없다. 방금 들은 이야기를 포함해서 최근 밀레스가 입수한 소식들 중에 원정을 나갈만한 일은 없었다.
“얼음의 대지로 갈 거야.”
“결국 가시는 겁니까?”
“응.”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줘-.”
시아가 얼음의 대지에서 발견된 키메라에 흥미를 가졌음을 민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밀리엄은 왜 하필 그 먼 얼음의 대지로 원정을 가는지 도저히 이유를 추측할 수 없었다. 디레스와 크리세이스도 시아의 원정 발언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지금까지 진행된 얘기와는 전혀 별개라서 더더욱 그랬다. 얼음의 대지라고 하면 생명체가 있다고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얼음뿐이다. 아무나 감히 살 수 없는 강추위가 계속되고 미생물도 안사는 것처럼 보이는 무생명 대지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짧게 말하면, 원정을 갈 가치가 없는 곳이다.
시아는 두 팔을 높이 들고 기지개를 쭉 켰다. 그리고 자신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시선들을 한 번 쭉 둘러봤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격하게 따지지도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고 보스의 말을 기다린다. 이 순종적인 반응이 정말 재미없었다. 보스에게 태클을 거는 용자는 민 한 명뿐이니 별 수 없나 싶었다. 밀리엄도 가끔 개겨 오르지만 그건 말대꾸 하거나 시아의 성격을 슬슬 긁을 때다.
“디레스, 한 쪽이 글라셰인 키메라가 발견됐다는 보고 기억나?”
“응. 그런 보고가 있었지. 하……. 그걸 찾으러 가겠다고?”
디레스는 시아의 막나가기가 발동했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이미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에 막을 수 없었다. 시아가 얼마나 고집이 센지 잘 아는데 어떻게 태클을 걸겠는가. 시아가 내린 명령, 맡은 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며 그녀를 지원하는 게 고작이었다. 손꼽히는 강호이거늘 죽을 거라는 걱정일랑 아예 하지도 않았다.
“추위를 안타려면 쉴 새 없이 뛰어야겠네.”
보스도 간다는데 제 3천왕이 거절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기대도 했다. 얼음의 대지를 일부러 가는 바보가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그렇다고 우리의 보스를 바보라 부르면 안 된다.) 밀리엄도 얘기만 들어왔지 직접 가본 적은 전혀 없다. 그래서 원정, 임무 보다는 견학 가는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살날이 많이 남았지만 그 중에 과연 얼음의 대지를 한 번이라도 갈 것인가. 아마도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그러니 이왕 기회가 생긴 거, 즐기기로 했다.
“물론. 얼음의 대지를 한 번 거하게 뒤집자고.”
“우리 진격 부대의 불같은 성격으로 거기 얼음을 죄다 녹여주겠어.”
“……밀리엄. 그거 지금 개그라고 한 거면 진짜 재미없다.”
시아의 말이 그의 가슴을 푹 찔렀다. 엘프에겐 위트가 통하지 않고, 엘프는 개그 센스가 없다는 종족 백과사전의 한 구절이 여기서 슬쩍 지나간다.
“보스. 영역 안에서 다른 괴생명체가 발견되면 어떻게 할까요?”
길드 에덴에서 약도 퍼트리고 양성도 하고 있다니까 지금 가디안스가 확보한 샘플 말고도 수 개체 더 있을 것이다. 민이 약과 함께 길드 에덴을 조사하던 중에 한 개체를 제거한 바도 있고, 후에 발견될 것들에 대한 처분 방법을 정확하게 정해야 했다.
“혹시 약이 조금씩 다를 수 있으니까 화타가 충분하다고 할 때까지는 아지트로 ‘가져와.’ 될 수 있으면 산 채로 ‘데려와.’ 그 다음엔 흔적도 남기지 말고 제거해.”
“Ja, f?r Sie, meine Boß."
길드 가디안스의 어린 보스는 긴 명령을 쉬지 않고 조금은 빠른 속도로 술술 말했다. 예비적 상황에 대한 대처까지 전부 지시하고 나서도 직성이 풀리지 않는지, 계속해서 머리를 최신형 오토바리의 모터보다 빠르게 굴렸다. 혹시나 빠진 건 없는지, 자신이 내린 모든 명령 중에 사소한 틈은 없는지 철저하게 재확인했다. 재확인에 재확인 중에 하나 빼트린 것을 찾아냈다.
“디레스, 크림슨은 진격 부대에 넣을 거니까 바로 밀리엄한테 보내줘. 밀리엄, 신입 환영회가 끝나고 바로 출발할 거니까 그때까지 녀석이 진격 부대에 익숙해질 수 있게 네가 직접 챙겨.”
오늘 갓 들어온 신참의 교육까지 세세하게 지시한 다음에 다시 모든 일정과 일들을 검토했다. 슈퍼컴퓨터보다 더 능력치가 좋은 두뇌는 Q. E. D를 결과로 산출해냈다.(논리학에서 농증 과정을 끝내고 마지막에 쓰는 ‘증명 완료(논증 완료)’라는 뜻의 라틴어 약자.)
“좋아, 해산. 민 빼고.”
집무실에 시아와 민만 남고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직속 간부급 길드원(가디안스엔 간부라는 개념이 원래 없다.)에게 향후 임무를 속히 전달했다.
“남은 서류도 없는데 뭘 시키시게요?”
“다스 엔데에 갔다 오려고. 혼자 가면 화낼 거 아냐.”
“얼마 전에도 다녀오셨잖아요.”
“그 땐 막연히 둘러보기만 했어. ‘스피’로 결정됐으니까 그거만 자세히 읽어볼 거야.”
밀리엄에게서 솔리 소식을 전해듣고 엘더와 함께 다스 엔데에 다녀왔다. 그 땐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발견하지도 새 지식을 습득하지도 못했다. 다스 엔데에 잠들어 있는 지식은 뚜렷한 초점이나 목적이 없으면 얻어낼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스피’와 그의 후손 혹은 길드 에덴 등 구체적인 키워드를 확보했으니까 새 지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다스 엔데에 가는 건데 이것저것 챙길 필요 없다. 곧장 워프를 만들고 그곳으로 들어갔다. 아주 중요한 용건이 없으면 누구든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 성역에서 이 두 키메라 외에 다른 키메라의 기척이 느껴졌다. 두 키메라가 지난 2년 동안 남모르게 가끔씩 접근했던 그 키메라였다. 길드 가디안스의 길드원 전원과 길드 크루세이드, 다른 길드에서도 모두 죽었다고 알고 있는 그 키메라가 다스 엔데에서 아주 흐릿한 마력을 풍기는 중이었다. 완벽하게 기를 감추고 있다가 길드 가디안스에서 온 두 어르신을 위해 자신을 알리는 표시다.
“오늘따라 기묘한 우연이 제법 일어나는군.”
시아는 자기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 신 휴를 보며 사악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까지 알아낸 모든 것을 얼른 불라는 뜻이었다.
“보스는 사람 부려먹는데 일가견 있으시단 말입니다.”
휴는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그녀에게 엄지손가락 두 배 굵기에 손바닥 길이만 한 은빛 크리스털을 내밀었다. 라티카. 그것의 주인이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이 그대로 기록되는 마족의 특별한 기록 아이템이다. 감정체계 뿐만이 아니라 주인이 직접 문자를 입력할 수도 있다. 라티카 전용 주문을 외우면 그 안에 기록된 지식을 한꺼번에 습득할 수 있다. 단 몇 초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긴 임무를 수행할 때 많이 사용된다. 필요하다면 사적으로 사용하는 자도 있다. 사용이 엄격하게 제한된 물건이 아니라서 타 종족도 돈만 지불하면 살 수 있다.
시아는 라티카를 들고 마족의 언어로 주문을 외웠다. 마족과 친밀도가 높은 악마족이기 때문에 발음이 까다로운 마족의 언어를 쉽게 구사했다. 라티카는 따로 시동어가 존재하지 않고 동일한 주문을 반복해서 읊는 도중에 발동하기 때문에 어려운 문자를 곱씹는 과정을 귀찮아도 감수해야 했다. 은으로 코팅된 크리스털은 본래의 색인 투명 하면서도 오색찬란한 빛을 발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휴가 수집한 모든 지식이 시아에게 전달됐다. 빛이 약해질 즈음에 민의 손으로 라티카가 넘어갔다. 그리고 민도 동일한 지식을 습득했다.
“인간이 아무리 아둔한 족속이라지만 이건 좀 심하다.”
가디안스의 보스는 자신의 오리지널이 인간이라 할지라도 거침없이 비아냥거렸다. 마법과 친하지 않아 순수한 인간 마법사가 손에 꼽힐 정도 밖에 없고, 키메라를 제일 많이 배출한다. 무슨 말이냐고? 인간에게도 마력은 있다. 각성(이 때는 키메라로 변하는 각성이 아닌 평범한 마력 각성을 말한다.)만 하면 여타 마법 종족(선천적으로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종족)처럼 마력을 활성화 할 수 있다. 그런데 유전자에 마법 거부 인자가 박혀있는지 ‘마법’이라고 하면 치를 떤다. 여하튼 인간 순종 중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자가 굉장히 적다. 마법과 친하지 않은 인간이 각성한 마법사라서 그런지 몰라도 대개 타 종족이 인정하는 대마법사까지 성장한다. 할 때 하는 종족이라는 타이틀이 이름값 하는 셈이다. 본디 인간은 신체적으로 공격능력도 방어능력도 거의 바닥을 친다. 아무리 단련했어도 다른 종족에 비하면 총알받이 밖에 되지 못한다. 그래서 무기를 살상 능력에 초점을 맞춰서 무한대로 찍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인간의 나약함에 회의감을 갖거나 강해지기 위해 꾀를 내는 작자들이 키메라를 선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의 종족적 특성(육체가 별 볼일 없을 정도로 약하나 타 종족과의 동화율이 월등히 높다.) 때문에 오리지널이 인간인 키메라가 전체 키메라의 40%를 차지한다. 플러스가 인간인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건 알려진바 두 개체 밖에 없다.
지금까지 사설이 길었던 것은 휴가 얻은 지식 중에 시아와 민을 당황하게 만든 것이 이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마이아(인간계는 마이아, 에졸로페, 델테 이렇게 3대 황국으로 크게 나눠진다. 참고로 길드 가디안스와 크루세이더는 가장 큰 황국인 에졸로페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의 황제가 펜타곤 중 한명인 디 파인(die Pein)이라는 사실이다. 사이렌들의 여왕이자 해상 및 해저 종족들의 신으로 추대 받는 그녀가 인간계의 황제로 군림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마이아의 수석 궁정 마법사가 인간 순종 마법사 중에서 최고인데 그녀의 정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펜타곤은 키메라만이 알아볼 수 있다지만 황제가 바꿔치기 됐다는 것쯤은 알아차려야 하지 않을까? 시아는 이 한심한 이야기에 한숨을 내쉬며 얌전한 독설을 내뱉었다.
“89살 먹은 할아범이 치매라도 걸린 거야? 마법엔 젬병이던 황제가 갑자기 마법을 쓰고 드래곤과 대적할 만큼 강해졌으면 으레 의심하는 게 기본이잖아. 인간이 각성해서 일정급 이상까지 실력이 오르면 200년, 300년 장수하는데 이 할아범은 완전 글러먹었군. 에졸로페의 바보 마법사가 더 낫겠다. 그 녀석은 최소한 낯선 자와 낯익은 자는 구별할 줄 아니까.”
긴 대사를 막힘없이 술술 말했다. 인간 마법사는 상대도 안 된다며 전혀 신경을 쓰지 않던 시아가 그들에게 ‘유감’이라는 게 있을 없다. 시아의 독설 상대에는 원한의 유무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고 봐야겠다.
“무슨 일 있었어?”
휴가 민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민은 피식 웃은 다음에 천천히 하나씩 열거했다.
“플루가 무스펠 실험을 시작했고, 길드 에덴이 이상한 약을 1년 전부터 유포했는데 지금 알아챘고, 그 약의 부작용 때문에 이상한 괴물이 나타나는 중이고, 에덴이 독자적으로 그 괴물을 양성까지 하는 중이고, 크루세이더는 스피랑 그 자손을 노리고 있고, 최근에 들어온 신입이 알고 보니 스피의 손자?손녀고, 이게 전-부 일주일 사이에, 그것도 90%가 오늘 하루 안에 팡- 하고 터졌어요. 별 거 아니에요.”
“류 군. 표정이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런 무시무시한 대사까지 화사하게 웃으면서 말할 만큼 진화한 줄은 몰랐어. 인상을 굳히고 있던 예전보다 이게 더 무서워.”
신 휴야, 원래 영업용 스마일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라서 항상 부드러운 미소로 모든 대사를 소화해 낸다. 그런데 카리스마에 있어서 시아와 1위를 다투는 민이 여성 여럿 울릴 미소로 심도 있는 대사를 줄줄 읊으니 공포가 두 배였다.
“그나저나 펜타곤에게도 자손이 있다는 건 획기적인데? 신의 자손을 갓 블러드라고 하니까 펜타곤의 자식은 펜타곤 블러드라고 해야 하나?”
“애석하게도 펜타곤의 자식은 평범한 키메라의 자식과 다를 거 없어. 펜타곤의 능력은 눈곱만큼도 전해지지 않아.”
“그거 정말 유감입니다.”
시아가 휴와 민 사이에 끼어들었다. 휴는 간만에 만나는 보스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조금 구겨진 왼쪽 셔츠 소매를 정성스럽게 펴줬다. 아주 조금, 정말 티도 안 날 만큼 조금 구겨진 것을 빳빳하게 폈다. 과도한 친절이지만 시아는 매몰차게 손을 빼서 거부한다거나 쓴 소리를 한다거나 하지 않고 심지어 인상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아마 상대가 휴이기 때문일 것이다.
“민, 이 아저씨는 왜 아직도 아빠처럼 굴까?”
그렇다. 휴에게 직접 불평하지 않을 뿐이다. 간접적으로 민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무표정에 무뚝뚝한 말투로.
“보스, 너무 하세요. 엘프 나이 30이면 아직 어리다고요.”
“쿼터야, 쿼터. 인간이랑 삐까친다고.”
그렇다. 휴의 오리지널은 쿼터 엘프다. 인간보다 좀 더 아름답고, 귀가 아주 살짝 뾰족하고 선천적으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차이점을 빼면 엘프가 아닌 영락없는 인간이다. 다만 그 차이점이 ‘쿼터 엘프’라는 종족을 다로 구분할 만큼 분명하다는 것이다.
“보스, 나날이 언어 사용이 거칠어지십니다.”
“아, 맞다. 얼마 전에 가족 분들께 키메라라는 사실을 들키기도 하셨어요.”
휴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아의 거친 언어 사용을 이해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측은한 눈길에 시아는 하마터면 주먹을 날릴 뻔했다.
“아무리 심기가 불편해도 고귀하신 분께서 천한 말을 쓰시면 안 됩니다.”
“역시 보스께 직접 간언을 할 수 있는 분은 미스터 신밖에 없어요.”
“이 자식들이 정말…….”
“류 군. 내 몫까지 보스를 보필하느라 수고하고 있단 건 잘 알아. 그래도 좀 더 신경 써 드려.”
“물론이에요, 미스터 신.”
“어이, 이봐들…….”
시아에 대해서라면 속속들이 파악하는-가끔 아닐 때도 잇지만- 민확 휴가 합심하면 제아무리 시아라도 이겨낼 재간이 없다. 미간 주름위에 살포시 손가락 끝을 대고 고뇌에 찬 표정을 일관하며 지금을 한스럽게 생각할 뿐이다.
“그래. 끼리끼리 놀아라. 난 일 할란다.”
시아는 가벼운 두통을 알고 뒤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휴와 민은 키득키득 웃더니 시아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스피와 관련된 기둥을 찾았다. 플루와 페라이의 문장은 곧잘 보이는데 다른 세 슈튀크의 문장은 아주 드물었다. 다스 엔데는 넓고 각 슈튀크의 기둥은 불균등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흠. 이거 먼저 해볼까?”
먼저 눈에 들어온 기둥에 오른손을 갖다 대고 마력을 그 손에 집중했다. 한 기둥의 지식을 얻을 때 가까이 있는 같은 종류의 기둥(스피의 기둥에 손을 대면 가까이 있는 다른 스피의 기둥)도 동화하여 지식을 공급받을 수 있다. 그래서 다스 엔데에 있는 기둥을 조사할 때 비교적 시간이 덜 걸리는 것이다. 물론 구체적으로 본인이 원하는 지식만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다른 기둥이 동조하는 편리한 시스템을 구축하고는 있지만 지식을 무한히 퍼주지 않는다는 얘기다.
어두운 피색의 마력이 시아와 그녀가 손대고 있는 기등과 근처에 있는 두 개의 기둥을 감쌌다. 그 시간은 단 몇 초 밖에 되지 않았다. 라티카는 원래 지식 기록 및 전달을 위해 만들어진 아이템이니 전달 속도가 바르지만 다스 엔데의 기둥은 그렇지 않다. 책을 읽듯 천천히 지식을 원하는 자의 머리에 스며든다. 시아가 기둥에 손을 대고 떼기까지 몇 초 밖에 걸리지 않았단 것은 그녀가 원하는 지식이 그것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보스, 스피의 기둥이라면 서남쪽에 많습니다.”
“응.”
시아는 텔레포트로 스피의 기둥이 밀집된 곳에 갔다. 휴와 민도 그녀를 따라 이동했다.
“여기서는 대충 20개 까지 읽을 수 있겠어.”
아까와 같은 일을 반복했다. 몸을 감싸는 암적색 마력이 일렁거림에 따라 그녀의 짧은 머리카락도 살랑살랑 흔들렸다. 1분, 2분, 3분…… 거의 한 시간 동안 고요한 순간이 끊임없이 이어져 흘렀다. 다스 엔데의 지식을 읽을 때 시아의 속독 능력은 소용없다. 다스 엔데가 주는 속도만큼 천천히 받아들여야 한다. 더 이상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지 않을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야 한다. 적으면 짧은 시간을 많으면 긴 시간을 할애한다. 이것이야 말로 자연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있지-. 지금 에졸로페 황제가 여든 둘인가 셋이지?”
“네.”
“후계자를 찾는다지?”
“네. 그게 왜요?”
에졸로페 황국의 황제는 미혼남이다. 정부 한 번 둔 적 없는 진짜 늙은 총각이다. 그에게 행방불명된 누이가 한 명 있는데 그 누이의 자식에게 왕관을 넘겨주기 위해 황좌를 지키며 금욕을 고수했다. 신하들이 황후를 들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여태껏 황제가 여자를 건들지 않았으니 황제의 권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모든 신하들을 아직까지도 거뜬히 제압하고 있는 것이다.
“스피의 유일무이한 그녀가 황제의 누나야.”
여기서 예의상 멍 때리는 표정을 지읍시다.
“엄청 아꼈어. 진짜 애지중지 고이 모신 모양인데 플루가 일으킨 사고에 휘말려서 그녀가 죽고 심하게 우울증에 걸렸대.”
“플루는 스피에게 가족이 있다는 걸 아는 건가요?”
“아니, 그 어떤 슈튀크도 몰라.”
시아는 팔짱을 끼고 손댔던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섰다. 그녀 고유의 무표정이 두껍게 깔렸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휴와 민은 침묵을 지키며 그녀를 바라봤다. 바람 한 점 없는 다스 엔데에 시아의 무거운 분위기 때문에 위화감이 감돌았다. 누구든 재빨리 도망칠 만큼 강한 긴장감이 짙어졌다.
“길드 에덴의 보스는 그냥 수명이 긴 키메라야. 스피는 정체를 숨기고 에덴의 원로 간부로 있고. 보스를 선택할 수 있는 실권력자면서 에덴의 일엔 일절 손 댄 적 없어. 되레 에덴을 부수기 위해 자식들에게 새 길드를 만들어 준 건데, 에덴이 생각보다 견고하고 자식들이 예상보다 약해서 곧바로 중립으로 돌아섰다는군.”
“원래 펜타곤은 길드나 정치 쪽에 개입하지 않는 존재니까요.”
“황제 자리에 있는 파인은 잠깐 변덕을 부리는 것 같긴 합니다.”
스피가 자식들에게서 등을 돌린 행위가 매정하게 보이면서도 이해되는 것이, 그가 펜타곤이기 때문이었다. 자손이 존재한다는 것도 이례적인데 길드의 존망에 직접 손대는 것까지 하면 그는 다른 펜타곤에 의해 제거될 것이다. 분명히 ‘제거’될 것이다.
“황제로 있어도 중립만 지키면 그만이야. 아무튼 지금 필요한 결론은 이번 두 신참이 에졸로페 황제가 찾는 후계자라는 거야.”
다시 길드 에덴 안으로 자취를 감춘 스피는 시아의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 시아가 여전히 초점을 맞추는 대상은 펜타곤의 후손이자 에졸로페 황실의 피가 흐르는 지원과 세나였다. 이 아이들은 까면 깔수록 양파였다.
“그래서 어떡하실 겁니가?”
“깊게 생각할 필요 없잖아. 우린 황권하고는 완전 별개야. 어떤 핏줄이든 한 번 가디안스에 들어왔으면 죽을 때까지 내 사람이야.”
시아의 반응은 완고했다. 휴와 민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에졸로페 황제만 불상하게 됐습니다.”
“황실 핏줄은 방계도 있어. 황손이 끊기는 것도 아닌데 뭔 상관이야.”
“인재가 탐난다고 그런 식으로 고집 부리시는 건 약간 억지스러운데요?”
시아가 민을 매섭게 노려보는 것과 동시에 휴가 ‘헤에-’하는 반응을 보였다. 시아의 눈은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라고 말했다. 확실히 지원을 탐내는 민의 입장으로서도 시아가 신참들을 황실에 순순히 보내주는 건 바라지 않을 것이다.
“뭐, 시답잖은 것만 얻어가지만 딱히 나쁘지도 않아.”
어린 보스는 양팔을 앞으로 쭉 뻗어서 등 근육과 팔뚝 근육을 푼 다음에 휴 앞으로 몇 발짝 걸어 나갔다. 그리고 왼손으로 그의 가슴 가운데를 가볍게 쳤다.
“좀 만 더 죽은 척 해라. 솔리도 조만간 다시 불러들일 거니까.”
“이거 재밌는 반응들을 볼 수 있겠습니다.”
휴는 걱정하지 말란 뜻으로 그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었다. 보스의 정신적 대부인 휴. 그는 그렇게 보스의 힘이 됐다. 처음에 민에게서 시아의 계획을 들었을 대 당황함을 금치 못했지만, 이런 비밀 생활도 익숙해지니까 스릴 있고 재밌었다. 솔리처럼 시아를 이해하고 믿을 뿐 원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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