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무실로 돌아온 시아는 곧바로 책상 위에 엎어졌다. 잠깐의 외출이 휴식이 아닌 조심스런 비밀 업무라서 은근히 피곤했다. 다스 엔데의 지식을 읽는 일이 마력이 많이 소진되는 일이긴 하다만, 최근에 밀려든 방대한 일 때문에 두뇌의 빈 용량이 순식간에 적어져 공간 없는 하드디스크마냥 삐그덕 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벌써 저녁이다. 한 일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분명 다사다난한 하루였지만 기분 상- 하늘에 노을이 졌다.
“보스, 오늘 저녁은 비프스튜랑 플레인 샐러드로 할 건데, 괜찮으세요?”
시아는 이마를 책상 위에 꾹 댄 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민은 그녀와 마주보며 쭈그리고 앉아서 책상 위로 두 눈만 빼꼼 보이게 했다. 그녀의 검은 머리칼만 응시하다가 오른손 검지로 그녀의 머리를 꾸욱 눌렀다.
“죽을래?”
고개는 들지 않고 목소리로만 위협한다.
“무대답은 싫다고요.”
“으……. 그냥 라면 끓여. 라면 먹고 싶어.”
시아는 두 팔을 책상 위에 가지런히 포개놓고서 오른쪽 뺨을 슬며시 얹었다. 그녀의 왼쪽에 보이는 종이 달리아가 그녀와 마주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다고. 그녀를 기죽이는 말을 멋대로 지껄였다. 그건 시아의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소리였다.
“또 말 못하는 꽃이랑 싸우시는 거에요?”
민은 손가락으로 종이 달리아의 윗부분을 툭 쳤다. 가끔 시아가 멍한 눈으로 무생물을 응시할 때면, 100이면 100 정부 자기반성을 하는 것이다. 휴를 만나고 왔으니 당연히 심난할 것이다. 점점 시간은 흐르고, 뾰족한 수는 없고, 상황은 가면 갈수록 복잡 난해해지고, 과거에 준비한 모든 초석이 과연 얼마나 효력을 발휘할지 무서울 정도로 걱정이 쌓여갔다. 시아와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민도 그녀 만만찮게 초조했다.
“영양가 없는 라면 대신에 칼국수 해드릴게요.”
“라- 면!”
시아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한창 배고픈 나이 17세. 배만 채울 수 있다면 뭐든 괜찮다? 아니, 진 시아 양은 먹고 싶은 건 먹어야 한다. 맛 따위, 영양 따위 중요하지 않다. 다른 사람을 챙길 때는 맛과 영양을 철저하게 챙기면서 정작 본인은 먹고 싶은 것만 챙긴다. 타인에겐 관대하면서 자신에겐 엄격하다는 성향이 여기에도 반영되는 것일까? 아니, 조금 다른 문제라고 본다.
“보스. 오늘 아침에도 라면, 점심에도 라면. 저녁까지 라면으로 드실 겁니까?”
“그랬나? 그러면 컵라면.”
“보스!”
가족들과 등 돌린 이후로 시아의 식성이 갑자기 부실해졌다. 빵과 라면이라고 하면 쳐다보지도 않던 그녀가 하루 세끼 중 두 끼는 빵 아니면 라면이 돼 버렸다. 민인 챙겨주지 않으면 아마 식사로서 그것들만 먹을 것이다.
시아와 민이 저녁 메뉴를 붙들고서 유치한 신경전을 벌이는 중에 집무실 안에서 워프의 낌새가 느껴졌다. 감히 길드 가디안스의 보스 집무실에 워프를 타고 오다니, 두 키메라의 화가 그쪽으로 집중됐다. 손님이 누군지 정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시아가 마력을 동그랗게 뭉쳐 그 자에게 냅다 던졌다.
[퍽!]
“억-!”
목소리의 주인공은 악마왕의 심부름꾼, 마르틴이었다. 허름한 날개 한 쌍이, 제대로 접히거나 펴지지 않은 어중간한 상태인 채, 갑자기 닥쳐온 통증 때문에 부르르 떨렸다. 명치의 바로 아래쪽을 맞은지라 하마터면 속을 게워낼 뻔했다.
“너, 내가 안으로 곧장 들어오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먹겠어? 응?”
“죄송합니다……. 진 후작님.”
힘없는 하급 악마 주제에 후작에게 뭐라고 말하겠는가. 그저 잘못했다고 비는 수밖에 없다.
“무슨 일이야?”
“폐하께서 오늘 만찬에 초대하신답니다.”
“만찬?”
시아는 무표정으로 마르틴을 지긋이 쳐다봤다. ‘귀찮게시리 왜 불러대. 다른 차원을 왔다 갔다 하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알기는 하는 거야? 왕이라고 사람 멋대로 오라 가라 하고, 쓸데없이 만찬이니 파티니 하는 명목으로 귀족들 죄 다 불러 모으기나 하고, 완전 짜증나.’라는 긴 뜻을 담고 있는 표정이었다. 마르틴은 시아의 무표정과 마주보면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두려웠다.
“잘 됐네요. 가서 많이 드시고 오세요.”
“루시퍼 면상을 하루에 두 번씩이나 보라고? 응, 그거 괜찮네. 정말 잘 됐어.”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국어책 읽듯이 딱딱하고 부자연스럽게 말하는 모습도 하급 악마에게는 공포였다. 악마왕의 부름에 불만이 가득한 후작에게 차마 ‘안 오면 렉스(인간계에 있는 시아 대신에 악마계에 있는 시아의 성을 관리하는 악마)를 죽이겠다’는 협박성 전언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억지로라도 가셔야 하잖아요. 이왕에 가시는 거 마음을 비우고 좋은 얼굴로 가세요.”
민은 진 후작만이 입을 수 있도록 허락된 순흑색 실크 코트를 가져왔다. 민소매 형태라서 긴 조끼 같기도 하다. 어깨에 걸치면 발목까지 닿는 긴 길이에 바람이 불면 우아하게 흔들릴 듯이 맵시 있게 잡힌 주름이 왼쪽 가슴께에 있는 가는 금제 체인보다 더 고급스러웠다. 세 줄의 가는 사슬은 각각 다른 길이로 둥글게 늘어 뜨려진 모습으로 옷에 달려 있었다. 치렁치렁하거나 반짝반짝한 액세서리를 좋아하지 않는 진 후작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도 훌륭한 장식물이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받은 온갖 선물들은 아마도 허술한 나무 상자에 아무렇게나 담겨져 기억도 안 나는 어떤 곳에 방치돼 있을 것이다.
“그래, 힘없는 후작 주제에 어떻게 왕의 명령을 거역하겠어. 가서 사탕발린 소리나 잔뜩…… 듣고 와야지.”
천하의 진 시아가 사탕발린 소리를 하겠는가. 대공작 후보로 계신 유명한 후작님이 다른 녀석들에게 아첨을 들으면 듣지 절대 하지 않는다. 악마왕조차 그녀의 비위를 맞추려고 달콤한 말을 협박의 세 배로 한다. 악마계에서 낯간지러운 대사가 곳곳에서 만발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것들이 가증스러웠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잖아요.”
“새삼스럽게 불평하는 내가 한심하지만, 그래도 역시 왕이 여는 만찬회는 영 껄끄러워.”
시아는 원래 입고 있던 청바지와 연한 갈색 세로줄이 그려진 흰 반팔티 상태 그대로 민이 입혀주는 민소매 롱코트를 입었다. 단추나 지퍼가 없기 때문에 앞을 잠글 필요가 없었다. 민은 무릎을 굽혀 코트의 주름을 깔끔하게 손질하고 다시 일어서서 목둘레의 이중 삼각 칼라를 반듯하게 폈다. 안에 어떤 옷을 입든지 코트가 그녀의 존재를 나타내기 때문에 옷맵시에 각별히 신경 썼다.
시아는 가만히 있다가 민이 물러나자 구속체 주박을 깨고, 길어진 머리칼을 차분히 정리했다. 명색이 후작이고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17세 소녀인데 이왕이면 단정한 모습을 보이고 싶을 것이다. 어떠한 기교도 없이 붉은색 머리끈으로 긴 머리칼을 높게 묶었다. 항상 헤어스타일이 같아서일까, 그녀는 포니테일이 제일 잘 어울렸다. 오리지널일 때도 머리를 기르면 좋을 텐데 기르는 도중의 어중간한 길이가 싫다면 숏컷을 고수한다.
“다녀올게.”
“다녀오세요.”
“문을 열겠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마르틴이 악마왕의 성으로 통하는 악마계의 문을 열었다. 곧바로 성 안에 있는 대화랑의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마르틴은 옆으로 비키면서 허리를 숙이고 팔을 뻗어 대화랑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시아는 그에게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당당히 들어갔다.
“오오, 진 후작, 정말 오랜만이군.”
“후작님. 악마계에도 자주 오십쇼. 얼굴 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후작님의 고귀한 날개는 여전히 진정한 어둠의 색을 띠고 있습니다!”
“진 후작님. 이렇게 직접 뵈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시아가 지나갈 때마다 근처 귀족급 악마들이 그녀에게 집적거렸다. 그녀는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커다란 의자에 앉아있는 악마왕을 향해 걸어갔다. 가끔 따갑고 날카로운 시선도 느껴졌다. 시아가 아닌 다른 악마를 대공작으로 세우려는 자들이었다. 한 순간 클러치 사마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아차 싶었다. 루시퍼를 또 본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사마엘을 볼 지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너무나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걸어 지나가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왕 앞에서 형식적인 인사를 했다.
“후작 시아 진-바르베리트.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시아의 오리지널 성이 ‘진’이기 때문에 다들 편의상 ‘진 후작’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플러스는 정통 바르베리트 후작가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자연스럽게 바르베리트의 성을 갖고, 바르베리트 후작이 됐으며, 바르베리트 가의 당주가 됐다. 바르베리트 계열의 백작과 자작 빛 이하 가솔은 수 명 존재하지만 직계 후작 가 악마는 현재 시아뿐이다. 부득이한 사건으로 바르베리트 후작가가 몰살되고 전대 후작까지 죽었는데, 그와 동시에 시아가 키메라가 되면서 자동적으로 후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악마 바르베리트 후작 가와 인간 진 시아의 관계. 조만간 이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마음껏 즐기고 가게, 바르베리트 후작.”
악마왕도 형식적으로 시아를 대했다.
“폐하. 뒤에 폐하를 알현하고픈 자들이 많으나 아까운 시간을 감수하며 하나 여쭙겠습니다.”
“누구도 아닌 바르베리트 후작이 묻겠다는데 그 누가 시간을 들어 그대를 탓하겠는가.”
악마왕이 연 만찬에 시아가 가장 늦게 도착했거늘 뒤에서 기다리는 이가 뉘 있으랴. 그저 공적인 자리니까 형식적으로 시작해서 형식적으로 끝내는 것이다. 시아는 한 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다른 쪽 무릎을 세우는 식으로 앉았다.
“슈튀크 디 페라이터루흐의 거처를 알고 싶습니다.”
“그걸 어찌 이리 어렵게 묻는가.”
악마왕은 오른손을 시아를 향해 뻗었다. 시아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악마왕이 전해주는 지식을 받았다. 악마 중에서도 백작급 이상의 소수만이 할 수 있는 지식 전달 마법이었다. 여타 악마계 마법처럼 특별한 주문이 필요 없다. 마법을 시행할 수 있는 자는 소수로 제한되어 있지만 마법의 상대방은 같은 악마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페라이의 임시 거처를 알게 된 시아는 옷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그리고 악마왕을 향해 목례를 한 후 루시퍼가 있는 우측 두 번째 기둥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 그녀에게 쏠려있는 수많은 시선 속에서 길드 크루세이더의 보스의 시선을 감지했다. 그녀를 감시하는 듯한 불쾌한 시선이었다.
“루시퍼. 너희 공작께 인사드리고 싶은데.”
시아는 사마엘의 시선을 계속 의식하면서 루시퍼에게 말을 걸었다. 시아와 가까이 지내는 루시퍼는 공작급 악마이나 공작, 즉 루시퍼가의 당주는 아니다. 게다가 삼남이라서 공작의 자리를 물려받을 가능성도 현저히 낮다. 풀 네임은 델로스 체트 루시퍼. 알고 지낸 시간이 꽤 기니까 ‘델’이라든지 ‘데스’라고 부르거나, 애칭을 부르기 께름칙하면 ‘델로스’라고 부르면 될 것을, 시아는 굳이 루시퍼라고 부른다. 그와 자신은 철저한 이해관계 선상에 있을 뿐 이름을 부를 사이는 아니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는 시아를 대개 ‘수작’이라고 하지만 기분 내키는 대로 부르는 편이다.
“아버지라면 저쪽 테라스에서 바르제바브 공작과 밀회 중.”
“그 늙은이…… 항상 대타를 보내더니 오늘은 웬일이래?”
“공작 어르신의 속내를 나 같은 녀석이 어찌 알겠어.”
“하? 형들을 제치고 대법관이 된 주제에 그딴 소릴 하는 거야?”
“큰 형님은 공작이 될 테고, 작은 형님은 재산의 반 이상을 물려받을 텐데 이 자리라도 가져야하지 않겠어?”
가디안스의 어린 보스가 키메라가 된 이후 길드 가디안스를 세울 무렵 루시퍼는 두 형을 제치고 루시퍼 공작에게서 대법관직을 물려받았다. 루시퍼 공작만이 가질 수 있는 직책을 삼남이 물려받는 기현상이 일어나자 루시퍼 공작가의 후계자 순위 문제가 잠깐 시끄럽게 거론됐었다. 하지만 악마왕이 귀족 가 당주와 왕궁의 고관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가 없다고 정리한 덕분에 금방 잠잠해졌다. 오해하지 말자. 원래 왕궁 고관은 능력자 위주로 뽑는다. 루시퍼 가만 여태껏 당주가 대법관을 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제 그것이 깨졌다.
“에잉. 언제 적 일인데 그거 갖고 계속 우려먹지 마.”
루시퍼는 옆에 지나가는 심부름꾼에게서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와인 한 잔을 받았다. 그 심부름꾼은 와인 잔이 여럿 올려져 있는 쟁반을 시아에게도 내밀었지만 그녀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시아의 허리까지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심부름꾼은 두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한 다음에 다른 귀족들에게로 갔다.
“클러치 사마엘이 그렇게나 신경 쓰여?”
“펜타곤 중에서 스피의 행방을 제대로 추적하고 있거든. 녀석이 손대기 전에 내가 먼저 찾아내야 해.”
“흠. 잘만하면 플루랑 스피가 동시에 나타나겠는데?”
스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스펠 실험을 시작한 플루와 사마엘에게 딱 걸린 스피. 골치 아프지만 조급히 굴지 말고 하나씩 제대로 풀어야했다. 냉정한 머리는 진 보스의 주 무기니까 염려할 필요 없다. 그녀가 실제로 걱정하는 것은 사마엘이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것이다. 펜타곤이 이 시대에 다시 나타난 예의 그 사건 이후로 펜타곤에 대해 수많은 조사를 이행하면서 유쾌하지 않은 사실도 알게 됐다. 그래서 사마엘을 1할 정도 이해하는 진 보스였다. 다시 짚고 넘어가자. 1할 이해한다.
“후작. 무스펠 실험이 뭔지 좀 찾아봤어?”
“어떻게 하는 건지를 모르는 거야. 뭔지는 원래부터 알고 있었어.”
루시퍼는 말꼬리 잡지 말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아버지인 루시퍼 공작이 베르제바브 공작과 함께 그들 쪽으로 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시아는 루시퍼의 눈동자가 향하는 곳을 돌아보고서 두 공작을 알아챘다.
“여전히 건강해 보이십니다. 베르제바브 공작, 루시퍼 공작.”
직급이 낮은 시아가 먼저 그들에게 인사했다. 그들은 연륜 때문에, 험난한 마생(악마니까 인생이 아니고 마생) 때문에 표정이 깨나 무게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바르베리트 후작. 대체 대공 자리에는 언제 오를 건가? 서두르지 않으면 레비아탄 공작이 차지하겠네.”
귀족계에서 공작과 후작의 차이는 직급 하나 차이지만 왕과 공작 차이만큼이나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왕과 공작의 중간 직급인 대공작과 가장 가까운 시아는 공작들을 어려워하지 않았고, 그들도 시아를 가볍게 대하지 않았다. 게다가 두 공작은 바르베리트 후작 지지 세력의 필두였다.
“아스모데우스 공작께서 절 지지해 주신다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직도 그 소리인가? 4대 공작 가 중에서 두 가문이 밀어주고 있는데 부족하단 말인가?”
“과반이 아니라 딱 반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가문이 지지해봤자 공작가가 밀어주지 않으면 소용없다. 솔직히 시아가 다른 대공작 후보보다 지지 세력이 많고 실세도 빵빵하지만 자기 자신이 그 높은 직급에 관심이 없어서 여태껏 후작으로 있는 것이다. 그녀의 나이와 악마로 산 햇수를 헤아려보면 ‘여태껏’이라는 부사가 어색하지만 말이다. 여하튼 대공작이 되면 지금보다 업무가 수배로 늘어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핑계는 다 하는 중이다.
“아스모데우스 공작 가는 역사상 중립이 아니었던 때가 없다네. 그가 레비아탄 공작을 지지할 일도 없고, 그의 표는 당연히 기권표가 될 거라네.”
바르제바브 공작은 권력에 욕심이 없는 어린 아이 때문에 속이 탔다. 그건 루시퍼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이 말을 귀에 박히도록 듣고 자란 시아는 미소 지으면서 쉽게 넘겼다.
“저는 확실한 지지를 받고 싶은 것뿐입니다. 아. 루시퍼 공작, 마르베스 경을 잠시 빌려도 되겠습니까?”
“미흘렌 마르베스?”
“네.”
마르베스 자작은 정보계의 큰 손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그에게서 정보 거래를 하려면 어마어마한 금전적 대가나 그에 상응하는 신정보를 제공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 루시퍼 공작의 측근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루시퍼 가는 거의 공짜 수준으로 그에게서 정보를 얻는다. 델로스 체트 루시퍼가 시아에게 온갖 정보를 전해줄 수 있는 것도 실은 다 마르베스 자작 덕분이다. 마르베스 자작이 신정보를 입수하면 루시퍼는 그것을 갖고 악마왕에게 새 소식이 도착했다고만 보고한다. 그러면 악마왕은 내용을 모른 채 시아에게 그것을 전해주라고 명령한다. 이것이 정보 전달 루트의 실체다.
“시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군.”
길드 가디안스의 보스가 그를 요구하자 베르제바브 공작도 루시퍼 공작 못지않게 놀랐다. 그녀도 정보 면에서는 밀리지 않는 세력가인데 역시 마르베스 자작만큼은 아니었던 것이다.
“자네. 귀한 인재인 건 아나 바르베리트 후작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겠나? 나도 부탁하네.”
“무슨 소린가? 내가 바르베리트 후작의 부탁을 어찌 거절하겠어. 내일 오전 중에 그를 보내겠네.”
“감사합니다.”
악마계에서 시아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는 것은 인간계에서 무력행사를 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한 마디만 하면 다들 척척 들어줬다. 인맥이 고급인 것도 그 이유지만 다들 그녀를 도와주고 싶어 안달인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유망한 권력자와 친해지려면 그 1단계가 안면 트기, 2단계가 바로 어려운 부탁이라도 들어주는 것이다.
두 공작은 다른 귀족들이 차근차근 안면을 트러 접근하는 바람에 시아와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그 사이에 시아는 델로스 체트 루시퍼와 같이 아무도 없는 테라스로 골라 나갔다. 어두운 밤하늘이 보이는 테라스는 실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빼면 상당히 조용했다. 2층 테라스의 바로 아래는 정원이었다. 인간의 눈으로는 밤 속이 정원이 보이지 않겠지만 밤눈이 발달한 악마에게는 장미 잎사귀의 테두리 모양까지 다 보였다.
“마르베스 경을 요구하다니, 역시 대단해.”
“써 먹을 수 있는 카드는 전부 써야지. 묵혀두면 아깝잖아.”
“맞는 말이야.”
루시퍼는 큭큭 웃은 다음에 두 번째 와인 잔을 단숨에 비웠다. 은근히 도수가 높은 셰리주는 두 잔째에 루시퍼의 이성을 잠식했다. 그는 잠깐 취기의 매력을 음미하다가 스스로 각성 마법을 걸었다. 대법관이 술에 취한 채 돌아다니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얼음의 대지에서 글라셰 순종을 찾아내면 대박이겠지?”
각성 마법을 쓰지 않았어도 이 한 마디에 정신이 확 들었을 지도.
“무얼 찾아내?”
“귀를 의심할 필요 없어.”
루시퍼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어지간해서는 시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글라셰라니. 얼음의 대지라니. 하필이면 왜 그거야. 그는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플루가 무스펠 실험을 시작했다고 가르쳐준 건 너야.”
시아는 왼손을 들어 손바닥으로 루시퍼의 가슴팍을 세게 쳤다.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리고 상체를 앞으로 굽혔다.
“신이 아닌 자가 신의 실험을 성공 하겠어?”
루시퍼는 오른손으로 시아에게 맞은 곳을 문질렀다. 상체를 세우기 전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는데 한심하게 쳐다보는 두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 그는 왜 라고 묻기 직전에 이마 정중앙에 땅콩을 한 대 맞았다. 그녀의 손바닥 파워나 손가락 파워나 보통 여아들의 배였다.
“헬이 신이었어? 신의 직함을 가진 상급 마족이잖아.”
“아, 그랬지.”
그는 이마에 생긴 붉은 원을 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아마 악마계에서 대법관 루시퍼에게 물리적 타격을 쓸데없이 쏟아 부어주는 간 큰 악마는 시아뿐일 것이다. 공작급 이상 악마들은 품위를 지키느니 해서 그를 말로 꾸중하거나 마기로 위협은 하겠지만 자잘하게 손이나 발을 들어 올리지 않는다. 그 이하 악마들은 감히 어떻게 공작급 악마에게 해코지 하겠는가. 역시 진 후작은 보통 이상의 인물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페라이의 집은 알아서 어쩌려고?”
“글라셰 얘기 중에 페라이는 왜 나와?”
“왠지 그건 얘기가 골치 아프게 될 것 같아서 미리 피하고 보는 거지.”
루시퍼가 선수를 쳤다. 하지만 그걸 가만히 놔둘 시아가 아니다. 분명 끝까지 글라셰를 화제로 둘 것이다.
“페라이는 한 번 다스 엔데에서 내 눈에 찍힌 전과범이야. 일정한 거주지가 있을 때 제대로 감시해야지.”
손이 심심해진 시아는 오른손을 가슴 높이로 올리고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도록 했다. 그녀의 검은 마기가 손바닥 위에서 둥글게 뭉쳤다. 크기는 대략 핸드볼공 만하다. 뭉쳐진 마기는 표면이 볼링공처럼 반질반질했다. 그에 달빛이 반사되어 외벽에 둥근 빛 자국이 생겼다. 그녀는 마기로 만든 공을 위로 던졌다가 손으로 다시 받는 것을 반복했다.
“감시자가 붙거나 감시의 기척이 느껴지면 도망칠 거야. 최소한 불쾌해 하겠지.”
“도망칠 테면 하라지. 어디 있든 찾을 수 있어. 만약 예전처럼 완전히 몸을 숨긴다면 그거야 말로 내가 바라는 일이지.”
시아는 가지고 놀던 공을 루시퍼에게 가볍게 던졌다. 루시퍼는 얼떨결에 공을 받았다. 뭐내는 뜻으로 그녀를 보는데 손가락을 까딱까딱 거리는 동작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짧고 얕게 한숨을 쉰 다음 시아에게로 공을 던졌다. 그들은 검고 가벼운 공을 부거니 받거니 하면서 대화를 계속 했다.
“물론 펜타곤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정신적 민폐야. 그런데 페라이 덕분에 악마계의 진서가 예전의 두 배로 좋아졌다는 결과를 보면 그에게 감시자를 붙이는 건 좀 아니라고 봐. 아니 그 전에 타인을 감시하는 행위 자체가 문젯거리야.”
루시퍼는 대법관답게 정의와 불의를 구별했다. 시아가 이 정도도 모를까. 그는 그저 시아가 너무 감정적으로 움직이지 않길 바랐다. 길드 크루세이더와 관련된 것이라면 늘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그녀였다. 이제는 펜타곤에도 그와 같은 반응을 보인다. 이 때문에 진정 중요한 일을 놓치거나 그르칠까봐 걱정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중립을 지키고 사리분별을 정확하게 해야 하는 입장이라 타인을 걱정하는 건 물론이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시아는 예외였다. 과거에 그녀에게 진 죄 때문에 스스로 올가미에 묶였다. 시아의 말과 행동, 존재 자체를 자신의 약점으로 삼고 그것을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는 행동 방식으로 정했다. 바보 같이 들릴지 모르나, 그는 자발적으로 만든 제한선 때문에 뭔가 하나를 하려고 하면 부담감이 먼저 밀려왔다. 아마 대법관이 되기로 결심한 것도 이러한 부담감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무슨 소리야? 녀석이 악마계에 있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감시는 하고 있었잖아. 다만 내가 안한 거지.”
“그 동안의 일은 감시라기보다 그저 그의 동선이 눈에 보이는 대로 네게 알려줬을 뿐이야.”
“바보. 세상 사람들은 그걸 보고 ‘감시’라고 한다고.”
[휙!]
[퍽]
시아는 힘껏 공을 던졌다. 루시퍼는 손바닥에 열이 확 오르는 듯했다.
“뭐, 페라이는 당분간 조용하겠지. 플루가 본격적으로 행동을 시작했다는데 다른 슈튀크가 감히 어떻게 움직이겠어. 절대 여럿이 동시에 움직이지 않는다, 플루의 말이 곧 법이다. 이 두 가지 룰 덕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는 분명하게 그림이 나와서 편하단 말이지.”
사마엘의 불분명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펜타곤을 추적한지 어언 2년이다. 페라이가 나타나기 전에는 기프테 폰 크로이추크에만 온 신경을 퍼부었었는데, 예의 그 사건 이후에는 펜타곤에 더 치중했다. 그 시간은 절대 헛되지 않았다. 시아가 사마엘보다 정보가 적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아도 펜타곤에 대한 대략적인 그림은 그릴 수 있을 정도 가 됐다. 그것이 그녀 특유의 뛰어난 두뇌와 합쳐져서, 그들의 동선을 7, 80%까지 추측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하……. 결국 다시 플루로 얘기가 돌아가는 건가?”
“그렇지. 그런 고로 의견을 들어볼까?”
“글라셰 아니면 무스펠 실험?”
“둘 다.”
시아는 루시퍼에게 공을 던지려다 말고 혼자 위로 던지며 가지고 놀았다. 회전 없이도 던져보고 엄지, 검지, 중지로 강한 회전을 주며 던져 보기도 했다. 마력을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기에 계속 공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난 솔직히 펜타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어. 이 세상의 창조주도 아니면서 창조주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도 기분 나쁘고, 순종과 키메라의 감정적 경계선이 많이 무너졌는데 그걸 다시 세우려는 것도 불쾌해.”
루시퍼가 언급한 것처럼 키메라를 혼혈보다도 천하게 취급하는 풍토가 많이 사라졌다. 인간이나 천사처럼 심히 보수적인 종족만이 구세대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세상 위로 다시 나타난 펜타곤이 순종은 키메라를 간섭하지 말라고 선언했다. 순종과 키메라는 서로를 침범할 수 없는 존재 관계라고 말한다.
“신이 있다면 그들을 어떻게 했을까?”
“훗. 신이란 모름지기 방과자야. 세상이 사라진다 해도 절대 개입하지 않아.”
“맞아.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어이, 그러면…….”
“세상에 불필요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논리와 딱 떨어지지 않아?”
하늘로 높게 날아오른 공은 공중분해 됐다. 검은 공에서 피처럼 붉은 빛 가루가 흩어져 내려왔다. 시아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빛 가루를 받았다. 그녀의 손에 닿은 것들은 작은 불꽃을 순간적으로 일으키며 소멸됐다.
“뭔가 얘기가 엇나가는 거 아니야? 갑자기 신 얘기는 또 뭐야?”
“펜타곤 자체에 대해서 이해 못하겠다며. 확실히 순종과 키메라는 달라. 펜타곤에 대한 인지에서 이미 확연하게 차이나잖아. 키메라는 본능적으로 펜타곤을 신으로 인지해. 하지만 순종에게는 다 똑같은 키메라로 보이지.”
“펜타곤이 신이라고?”
루시퍼는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신화만 존재하는 현실 세계에서 신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강하게 믿는 종족이 천사와 악마다. 물론 이것은 순종을 기준으로 하는 말이다. 그런데 루시퍼가 알기론 수많은 신 중에서 펜타곤은 없었다. 펜타곤은 신이 아니라 그저 최고 경지에 오른 전설상의 최초의 다섯 키메라였다. 이처럼 그가 펜타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아카데미나 일반 학교에서 가르치는 단편적인 정보에 불과했다.
“응. 우리에게 펜타곤은 신이야. 그들은 세간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그저 영박까지 다 개고 최고 각성을 달성한 키메라가 아니야. 그들은 구속체가 없어. 태어날 때부터 키메라였으니까.”
시아는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것처럼 눈이 멍했다. 그녀는 루시퍼에게 말하고 있으면서, 눈은 테라스의 유리문 너머에 있는 홀을 향하고 있으면서 다섯 펜타곤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등이 서늘해졌다.
루시퍼는 그녀의 말을 부정하려다가 순간 손으로 입을 막았다. 펜타곤은 구속체를 깨지 않고서 어떤 종족으로든 변할 수 없다. 단순한 변신술이 아니라 그 종족 자체가 될 수 있다. 그들은 구속체도 필요 없고, 변할 수 있는 종족이 무한하다. 기존 키메라의 규칙이 통하지 않는 절대 키메라다. 억지스러운 표현일지도 모르나 ‘키메라 순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페라이가 처음 악마계에 나타났을 때 악마왕에게서 들은 이야기였다. 이 말을 하면서 악마왕은 심히 불안해했다는 것도 기억났다. 펜타곤을 두려워했다.
“순종이 키메라가 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뭐 게?”
“어?”
시아가 기습적으로 물어보는 바람에 루시퍼는 잠시 당황했다.
“그러니까…… 그 특별 오성 의식?”
“왜 하필 오성 의식인지 생각해본 적 없어?”
바닥에 키메라용 오각별을 크게 그리고 각 꼭지각에 키메라가 한 개체씩, 총 다섯 개체가 위치한다. 별의 한 가운데에는 키메라가 되고픈 순종이 위치한다. 이것이 특별 오성 의식의 기본 형식이다. 키메라 중에서 96%는 이 의식에 의해 키메라가 됐다. 그 만큼 보편적이고 당연하게 여겨진다. ‘왜’라는 의문을 갖는 것이 우스운 일일 정도로, 무슨 자연 법칙처럼 취급됐다.
“글쎄…….”
순종인 루시퍼가 키메라의 의식에 의문을 품을 리 만무했다.
“쿡. 왜긴. 펜타곤이 다섯 명이니까 그렇지. 그들이 그 의식을 만들고 거기서 후천적 키메라를 만들기 시작한 거야.”
시아는 루시퍼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여태껏 본 표정 중에서 제일 바보 같았다. 처음 들은 사실에 경악한 표정은, 딱딱하고 시작과 끝이 분명한 루시퍼의 평소 모습을 싹 무너뜨렸다.
“그들은 엄연히 키메라의 창조주야.”
“하지만 키메라가 되는 방법은 두 가지나 더 있잖아.”
“아, 그거. 시간이 오래 흐르면서 후천적 키메라의 성격이 많이 혼탁해졌다고 해. 진짜 말 그대로 잡종 말이야. 그래서 차츰 다른 방법이 생긴 거야. 하지만 위험 부담이 너무 커. 알잖아. 그 두 방법 모두 성공할 가능성의 일의 자리도 안 돼. 그러니까 특별 오성 의식이 정통 방법으로 불리고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거야. 이제 우리가 어째서 펜타곤을 신이라 생각하는지 이해 돼?”
짧지만 확실한 설명 앞에서 루시퍼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를 만나기 전까지 키메라는 자신과 상관없는 존재로 생각하고 거들떠보지 않은 그였다. 키메라와 엮이는 일은 절대 없었다. 그런데 진 시아라고 하는 어린 아이와 부딪히면서 키메라의 세계에 눈을 떴다. 불행한 그 사건 때문에 키메라와 엉킬 수밖에 없게 됐다. 하지만 여전히 키메라에 대해 아는 바가 턱없이 적었다. 시아에게서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자신은 그간 키메라를 이해하며 산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플루가 무스펠 실험을 성공할지 못할 지는, 객관적으로 보면 반반이야. 그런데 키메라로서 보면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100%야. 펜타곤 중에서도 치ㅗ고로 꼽히는 자야. 우리의 신 중에서 최고신이라고. 어쩌면 내가 글라셰를 찾으려는 게 하찮은 피조물이 신이 두려워서 무한 번 발버둥치는 것과 같을 지도 몰라.”
시아의 자기 판단력은 오싹할 만큼 객관적이었다. 이토록 자신을 잘 알면서도 무리한 일을 추진하는 것은 고집일까? 아니, 자신을 정확하게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도전이다. 그리고 그녀는 성공을 쟁취할 자신도 있었다.
“뭐, 헬이 신이 아니라는 것도 그렇고, 펜타곤이 대단한 존재라는 것도 이해는 돼. 이해는 했어. 그런데 어째서 무스펠 실험을 지금에 와서 하는 거지?”
“나도 그게 수상하다고. 헬의 나흐폴게르가 기록한 책에는 헬의 모든 지식이 있어. 그 중 무스펠 실험은 헬 스스로 금기로 정한 아주 위험한 지식이야. 구미가 당기는 걸까? 위험할수록 호기심을 자극하는 법이니까. 뭐, 원래 파괴 활동을 밥 먹듯이 하던 펜타곤이니까 그럴 만 해. 하지만 지금 와서 그걸 시도하는 건 역시 석연치 않아.”
얼마나 심각하게 고민했는지 말이 평소보다 더 술술 나왔다. 루시퍼는 자기 생각을 하기 전에 시아의 말을 따라가기 바빴다. 펜타곤에 관한 지식엔 미숙해서 시아의 말이면 뭐든 그럴듯하게 들렸다.
“아, 어려워 어려워. 어쨌든 결론은 얼음의 대지로 갈 것이다?”
“가서 한쪽 종족이 글라셰인 키메라를 찾아 낸다가 최종 결론이지.”
“찾는단 녀석이 키메라야?”
“응. 우리 애들이 재밌는 정보를 입수했거든.”
시아는 아주 살짝 미소 지었다. 가디안스의 길드원을 ‘우리 애들’이라 불렀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길드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아무리 성가신 일거리가 쏟아져도 길드가 굳건하고 모두가 손닿는 곳에 있으면 자신이 무적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 느낌을 모성애에 빗대어 봐도 제법 그럴듯할 것이다.
“얼음의 대지에 발을 들이는 것 자체가 오래 전부터 미친 짓이었다고.”
“우리 길드가 미친 짓 한두 번 해?”
“그래. 가디안스니까 안 말리는 거야.”
루시퍼는 피식 웃었다. 저렇게 자신만만한 녀석에게 어떻게 태클을 걸 수 있겠냐는 식으로 시아를 쳐다봤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는 서포트만 할 뿐이었다. 그녀가 그에게 의견을 물어보긴 해도 결국은 그녀의 뜻대로 행동한다. 그녀는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그의 의견을 물어보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역할을 자청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민과 루시퍼가 하는 일이 비슷해 보이지 않은가?
“글라셰를 만나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니까 찾으면 소개 좀 시켜줘.”
“반드시 찾아낼 거야. 그리고 무조건 우리 길드에 넣을 거고. 반항해도 소용없어.”
“아아, 폭군.”
“새삼스럽게 일일이 말하지 마.”
깊어가는 밤중에 홀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건너 테라스도 시끌벅적해서는 조용히 있기 그른 것 같았다. 목소리 크고 말 많은 자들은 대개 직급이 낮은 귀족들이었다. 직급이 낮아도 당주는 입을 무겁게 다뤘다. 쉴 새 없이 혀를 굴리는 작자들 때문에 시아는 귀가 피곤해졌다.
“저쪽에서 후작을 찾고 있는데?”
“냅둬.”
분명 유력한 대공작 후보에게 아부하려는 것이리라. 인간계에까지 찾아와서 비위 맞추려고 헛수고 하는 자들도 있다. 그런데 악마계에서, 그것도 공식 모임에서 그들이 가만히 있을까. 당연히 적극적으로 기회를 이용한다. 다시 말하지만, 시아는 그 가증스러운 자들이 역겹도록 싫었다.
“난 그냥 가련다. 이 정도 오래 있었으면 폐하도 만족하시겠지.”
“이기적인 가신이십니다.”
“시끄러워. 튀지 않고 참석한 것만으로도 가신으로서 의무에 충실한 거야.”
시아는 곧장 워프를 열었다. 루시퍼는 워프가 닫히는 걸 보고 나서야 홀로 돌아갔다. 아직 어리디 어린 후작 나으리가 툴툴 대는 모습이 마냥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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