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이 미리 준비해둔 독을 탁자 위에 일렬로 세워뒀다. 엄지 손가락만한 크기의 작은 병 6개. 인위적으로 독을 만들 때 흔히 쓰이는 기초 엑기스다. 농축 원액이라서 한 방울 만으로도 위해를 가할 수 있다. 어떤 것은 한 방울이-종족에 따라 다르지만- 치사량이다. 하나만 원액으로 쓰든 희석해서 쓰든 상관없지만 두 가지 이상을 조합할수록 상대가 해독하기 어렵기 때문에 번거로워도 독을 조합 제조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해독법도 다양하게 발달하는 것이다.
“세나는 정령 마법을 인간일 때도 쓸 수 있지?”
“네.”
체인급 이상 키메라는 오리지널 상태에서 플러스의 능력을 쓸 수 있고 반대로 플러스 상태에서 오리지널의 능력을 쓸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준 만능 전투력이다. 길드 가디안스가 괜히 가입 제한을 체인급 이상으로 정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령 마법을 써선 안 돼. 정령력을 봉쇄당할 수도 있으니까 순수하게 지금 슬 수 있는 마력만으로 이것들을 해독하는 거야. 알겠지?”
무릎을 마주 붙이고 가볍게 주먹 쥔 두 손을 그 위에 다소곳이 올려놓은 세나는 고갯짓으로 대답했다. 이전에 있었던 길드에서는 늘 정령 마법으로 정화와 단순한 치유(네레이드는 간단한 치유도 가능하다.)를 했기 때문에 인간의 마법으로 해동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긴장됐지만 해독 자체는 처음이 아니니까 할 수 있다고 속으로 자신을 격려했다.
“진원은 마법 자체를 제대로 못한다지?”
“아주 초보적인 것만 최근에 겨우 배웠습니다.”
“그러면 해독 마법도 기초적인 것만 몇 개 가르쳐줄게. 이런 특이성 마법은 보통 마법보다 더 까다롭거든.”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진원은 존경하는 보스 앞이라서 긴장했을 뿐이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의지만 앞세우는 바보가 아니다. 할 땐 제대로 확실하게 하는 주의라 습득 속도며 발전 속도가 타인의 몇 배일 수 있는 것이다.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고 주먹질, 발길질을 거침없이 구사하는 모습이 근력만 믿고 설치는 무뇌충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플러스가 미노타우르스라는 사실을 깜빡 잊을 만큼 머리도 상당히 좋다. 핏줄이 그러한지, 이 우수한 두뇌는 세나도 갖고 있다. 길드 전체의 상황을 일찍이 전부 파악하고 타 주요 길드의 상황까지 속속들이 뇌세포에 입력한 상태다.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는 모양처럼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줄 안다.
“일단 마비효과를 낼 수 있는 90% 희석부터 시작할까?”
시아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마력을 자유롭게 구사했다. 물이 가득 든 큰 유리병을 창틀에서 가져와 6개의 작은 병 앞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빈 유리컵 12개에 물을 반씩 채웠다. 희석 작업은 조합 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섬세한 수작업을 요구하기 때문에 손으로 직접 독약을 조금씩 유리컵에 떨어트렸다. 6가지의 독이 각각 두 유리컵에 90%로 희석됐다. 인간을 기준으로 이 정도면 전신 마비를 1분에서 5분까지 일으킬 수 있다. 상대가 몸이 약하다면 그 이상의 시간도 가능하고 심장마비도 꾀할 수 있다.
“70% 이상으로 희석된 독은 대개 정화하는 방식으로 해독하는 편이야. 그리고 조합된 수가 적을수록 정화하는 편이 효과적이지. 뭐, 조합된 수가 많으면 대개 희석률이 낮으니까 정화 자체를 안 하지. 어디까지나 보통 마법을 기준으로 얘기하는 거야.”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민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수색 부대가 가져온 괴생명체와 플릿이 데려온 크림슨 카마엘을 천천히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조금이라도 켕기는 것이 있다면 암살 부대를 동원해서 깨끗하게 제거해야 했다. 크림슨 카마엘보다는 괴생명체 쪽에서 시궁창 냄새가 진동했다. 수색 부대와 정보 부대가 필시 무언가를 놓친 게 분명했다. 이런 쪽에서 그의 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민이 단독행동을 시작할 때, 시아는 두 신입에게 ‘클래루흐(Klärung : 정화)’를 가르쳤다. 주문도 길지 않고 일상에서도 곧잘 쓰이는 마법이다. 세나가 구사할 수 있는 정령 마법에 비하면 별 거 아니지만 인간에게는 매력적인 마법이다. 해독할 때만 쓰이는 것이 아닌 실용도가 높은 편이라 배워두면 꽤 쏠쏠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 다 진지한 자세로 열심히 배웠다.
“제법인데? 보통 인간이라면 90% 희석물도 몇 시간 걸리는데 말이지.”
원래 마법을 일상생활에서 잘 사용하는 세나는 70& 희석물을 해독하는데 까지 한 시간 만에 마스터했다. 마법과 친하지 않다는 지원도 한 시간 안에 80% 희석물을 정복했다. 클래루흐 마법에 익숙해진 듯했다.
“디레스가 침이 마르게 칭찬하더니만. 좋아. 지원은 70% 희석물로 클래루흐를 계속 연습하고 세나는 65% 희석물로 필터르(Filter : 거르기)를 연습할 거야.”
시아는 독을 두 가지씩 골고루 섞은 다음에 시범을 보였다. 필터르 마법의 주문(잠자는 대지여, 흐르는 물, 속삭이는 라벤더, 겉껍질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벌레는 여름을 기다리나니, 장미향이 짙어지기 전에 꿈을 깨운다.)은 클래루흐 마법의 주문(모든 물은 하늘을 닮을 지어니, 모든 어머니는 땅을 닮는다.)보다 어렵지만 축약할 수도 있고 다른 중급 이상의 마법보다는 당연히 짧으니까 금방 외울 수 있었다. 세나는 시동어만 외워도 마법을 활성화 할 수 있을 만큼 마력을 정교하게 다뤘다. 하지만 새로 배우는 마법에 익숙해지기 위해 일일이 긴 주문을 전부 읊었다.
“하나 밖에 안 돼요.”
첫 번째 시도에서 그녀가 뽑아낸 독은 두 가지 중에 한 가지였다. 실패라고 할 수 없었다. 필터르 마법을 한 번 더 하거나 클래루흐 마법을 써도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한 가지라도 뽑아낼 수 있는 자는 타고난 센스의 소유자가 아니면 거의 없다. 세나는 마법을 자주 사용해서가 아니라 원체 그쪽으로 타고났기 때문에 이런 급진전을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이잖아. 한 번 더 해봐.”
시아가 괜히 ‘한 번 더’라고 얘기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세나의 타고난 센스를 믿었다. 계속할 필요 없이 한 번 만 더 하면 필터르 마법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시아의 이런 추측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세나는 두 번째 시도에서 65% 희석물을 100% 순수한 물과 두 개의 독으로 분리했다. 오래 걸리지도 헤매지도 않고 능숙하게 해냈다. 옆에서 클래루흐를 연습하던 지원은 세나의 성공을 보고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해, 했어요, 보스.”
“응. 아주 잘 했어. 세나 너 굉장해.”
세나는 얼굴이 확 빨개졌다. 그러면서도 두 개의 독을 다시 물에 타버리는 실수는 범하지 않았다. 거른 독을 빈 병에 옮겨 담는 것까지 완벽하게 했다. 시아의 눈치를 한 번 보더니 다른 조합물도 차례대로 해독했다.
“지원아, 세나만 보지 말고 네 걸 해. 세나보다 네가 더 자주 사용할 텐데 부지런히 연습해야지.”
“네?”
“민이 널 특수전투 부대에 넣겠대. 아지트에 있을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기 상처는 자기가 치료해야 하는 부대지. 암살 부대도 그렇지만.”
지원과 세나 모두 깜짝 놀랐다. 길드 내에서 특수전투 부대는 밖으로 나도는 부대로 통하지만 모두가 동경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 지원이 들어가게 됐으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지원은 흥분 때문에 격동하는 가슴을 쉬이 진정시키지 못했다.
“근 2년 동안 대원이 변하지 않았다는데…….”
“다른 녀석들은 후보에만 올라봤는데 신참이 정식대원으로 결정됐으니까 정말 놀랄만한 일이지.”
후보도 아니고 정식대원. 지원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난감했다. 정확하게는 담담해 보이려고 애썼다. 하지만 입가가 연신 씰룩거렸다. 당장이라도 만세를 외치며 호탕하게 웃고 싶었다. 존경하는 보스가 직접 명령하고 지휘하는 자긍심 높은 부대에, 보스 못지않게 존경하는 제 1천왕이 총대장으로 있는 명망 있는 부대에 정식대원으로 들어간다. 가문의 영광이라고 까지 여겼다.
“오빠랑 저랑 따로인 거에요?”
세나는 눈을 낮게 내리 깔았다. 늘 지원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고 늘 그의 옷자락만 붙잡고 다녔는데 그러지 못한다니까 불안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조금씩 혼자 다니는 연습을 해왔지만 그래도 역시 무서웠다.
“세나는 정보 부대로 확정됐던데? 아까 서류가 도착해서 이미 내가 승인했어.”
“저, 정보…… 수색 부대가 아니고요?”
“뭐야. 정작 넌 아무 얘기도 못 들은 거야?”
수색 부대와 정보 부대가 모두 디레스 휘하에 있지만 운영 방식이 확연히 다르다. 민 휘하의 특수전투 부대와 암살 부대가 팀 방식, 개인 방식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수색 부대와 정보 부대도 그런 식이다. 둘 다 팀 방식이지만 수색 부대는 3~5명으로 규모가 제법 있고, 정보 부대는 2명으로 규모가 작다. 가끔씩 정보 부대는 개인으로도 움직인다. 구성원이 ‘첩보원’이기 때문에 극소수로 움직이는 것이다.
“세나가 정보 부대인 게 어때서? 딱이잖아.”
걱정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하라고 부추기는 지원이었다. 시아는 이 의외의 상황을 잠시 지켜봤다.
“하프 네레이드도 아니고 진짜 네레이드라서 무려 물로 변할 수 있잖아. 어디로든 들어갈 수 있는데 그 능력을 썩히는 건 아까워.”
지원이 말한 것이 바로 디레스가 세나를 정보 부대에 넣으려는 이유다. 한 가지 더 이유를 들자면 그녀의 타고난 마법 능력이다. 가장 적합한 마법을 적당한 강도로 적기에 사용할 수 있는 센스가 선천적으로 몸에 배어 있는 것이 점수가 높았다. 위험도를 보면 수색 부대 보다 정보 부대가 월등히 높다. 암살 부대와 비등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대원이 전투 능력, 못 해도 자기 방어 능력이 필수적으로 높아야 한다. 세나가 이에 딱 맞는 것이다. 그녀와 같이 자란 그녀의 사촌도 인적하고 인물 보는 눈이 다분한 디레스도 인정하니 그녀가 수색 부대로 빠져나갈 길은 없어 보인다.
“이 오라버니는 네가 든든한 한 몫을 할 때가 제일 기뻐.”
“우웅.”
결정타였다. 세나는 시아를 보며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시아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손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할 게요. 정보 부대… 첩보원…….”
“너라면 플릿님 못지 않은 첩보원이 될 거야.”
“동감이야. 이 성격만 조-금 바꾸면 금방 그렇게 될 걸?”
시아는 세나의 오른쪽 볼을 죽 잡아당겼다. 심하게 내성적인 15세 아가씨는 벌겋게 부은 볼을 매만지며 자기 다리만 내려다봤다. 앞으로 지원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도 두렵고 심지어 첩보원으로 활동해야 한다는 것도 무섭지만, 자신을 격려해주는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이전 길드에서도 지금 길드에서도 아지트 안에만 있는 연약한 아가씨였는데, 둥지 밖으로 떨어져도 몇 번이고 날갯짓하는 강한 새로 성장 할 때가 왔다.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만 했었는데 진짜 도움이 되는 기회가 온 것이다.
“자, 자. 계속 연습하자. 지원이 너, 필터르도 마스터해야 한다고.”
“네!”
잠깐의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시 해독 마법 연습이 시작됐다. 마력을 쉴 새 없이 오래 사용하면 지쳐 쓰러질 수 있기 때문에 이만한 짧은 휴식이라도 의외로 상당히 이롭다.
“모든 물은 하늘을 닮을 지어니, 모든 어머니는 땅을 닮는다. 클래루흐.”
엔돌핀을 활성화시킨 희소식 때문인지, 짧은 휴식 시간 덕분인지 지원은 70% 희석물을 하나씩 전부 해독했다. 시아는 그가 마력을 다룰 때 그의 마기를 진지하게 읽었다. 덕분에 그가 지금 최고 어느 정도까지 마력을 발휘할 수 있고 얼마만큼을 순간순간 응용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했다. 마력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적이 여태껏 없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성장에 비해 마력 활용 정도가 현저히 낮았다.
“별로면 한 번 더 할까요?”
“한 번 더 하면 분명히 실패할 거야.”
시아는 왼손 손등으로 턱을 받치며 지원을 지긋이 쳐다봤다.
“넌 마력을 다루는 것 자체가 서툴기 때문에 기분이 어떤가에 따라 모든 게 변해. 방금 성공한 것도 한 창 플러스 상태였기 때문에 마법이 우연히 들어맞은 거야. 지금 네 원래 실력대로 하면 아직 못할 단계거든.”
지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시아는 마법으로 메모지와 볼펜을 가져오더니 뭔가를 빠르게 써냈다. 마지막에 서명까지 했다. 즉석으로 어떤 허가증을 만든 것이다.
“특수전투 부대 부대장 윤 솔아한테 이걸 주면 나랑 민이 직접 만든 다스 드릴라움에 데려다 줄 거야. 그리고 그녀의 지시대로 훈련에 임하면 약점을 고칠 수 있을 거야. 미리 말해두는데 솔아 손에서 벗어나려면 하루 이틀 가지곤 택도 없어. 아주 사람 진을 빼는데 일가견이 있거든. 그 덕에 정신 교육관을 겸하고 있지만.”
시아는 그에게 미리 겁을 줬다. 그는 특별 허가증을 받아 든 다음에 찬찬히 읽어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도 솔아에 대해 들은 바가 있어서 바짝 긴장했다. 허가증에 써 있는 기간은 일주일. 하루에 열다섯 시간까지 사용할 수 있다는데 솔아 부대장이라면 맥시멈을 꽉꽉 채울 것 같았다. 정신을 제대로 챙기지 않으면 훈련 도중에 죽을 지도 모른다. 실전 훈련이라면 이 경고가 어느 경우에나 적용되지만 담당자가 솔아일 경우엔 단순 훈련이더라도 이 경고가 위험 1급에 해당한다.
“나중에 오빠 살아서 볼 수 있는 거에요?”
“너도 솔아의 악명을 알고 있구나. 괜찮아. 이제까지 아군을 죽인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오빠를 적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해요?”
“설마. 막나가는 성격이긴 하지만 바보는 아니야.”
세나는 울상을 지으며 진심으로 지원을 걱정했다. 두 손을 꼭 마주잡고 입술을 굳게 다물면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모습이 애처롭기는커녕 귀여워보였다. 시아는 이 귀여운 생물을 어떡하면 좋을지 몰라 오른 손으로 얼굴을 가리듯이 살짝 이마를 짚고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어깨를 살짝살짝 들썩거렸는데 웃음을 참는 중이었다.
“세나야.”
“네?”
“어떻게 하면 사고가 그쪽으로 되는 거야?”
시아는 이마를 짚던 손으로 입을 가린 다음에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세나의 모습이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닮아서 웃음을 참기 더 어려웠다. 데자뷰처럼, 똑같은 대사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그 때 상대는 세나와 성격까지 똑같았다.
“이 오라비, 정말 섭섭하다. 네 눈에는 내가 그렇게 약한 존재냐?”
지원은 잔뜩 실망했는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태껏 애지중지 보살피고 나름 열심히 지킨 여동생이 그간 자신을 어떻게 봐왔는지 알게 되니까 허무함이 후두둑 쏟아져 내릴 것이다. 아주 같지는 않지만, 열 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다는 부모 마음을 이 순간 뼈저리게 느꼈다.
“내 말은… 그게…… 그 뜻이 아닌데…….”
세나는 어쩔 줄 몰랐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원이가 다칠가봐 걱정하는 건 알겠는데 이럴 때는 열심히 하라고, 힘 내라고 응원해 줘야지.”
“그런 거에요?”
세나는 자기 말이 잘못 전달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안심했다. 그녀의 모습은 길드 가디안스에 막 들어왔을 때의 멜로즈와 거의 완벽하게 겹쳐졌다. 내성적이고, 겁 많고, 일일이 걱정하고, 눈물도 많고 등등 지금의 멜로즈와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실은 가루다 일족의 공주님도 이렇게 유약할 때가 있었다. 세나도 익숙해지면 멜로즈처럼 마음이 강해질 것이다.
“전부터 넌 이 오라버니가 지킬 거라고 입이 닳도록 말했는데 다 쇠귀에 경 읽기였구나.”
“아니야……. 내가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데.”
“그러면 왜,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
지원은 두 손으로 세나의 볼을 양쪽에서 꽉 눌렀다. 세나는 입술이 앞으로 비죽 튀어나온 채 우물우물 거렸다. ‘그게 아니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억지로 도리질을 당한 다음에서야 큼지막한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허물없이 친한 두 사람을 보며 가장 가슴이 아린 사람은 분명 진 보스다. 가족들에게 키메라라는 사실을 들킨 후 길드 가디안스의 보스라는 사실까지 제 입으로 밝히고서 집에서 나왔다. ‘이 시대의 효녀’, ‘동생 사랑 1등’이라는 타이틀은 졸지에 가식이 돼 버렸다. 정말로 가족을 아꼈던 그녀였는데 키메라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거짓으로 취급됐다. 집을 나올 때 본 가족들의 눈을 잊을 수 없다. 짐승을 바라보는 그 눈은 시아를 경멸하고 증오했다. 눈으로 피가 섞여있다는 이유만으로 온 몸이 썩어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분명히 키메라는 후천적인 종족인데도 순종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시아의 가족들도 그랬다. 진 보스의 표정은 포커페이스로 인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깊은 슬픔을 머금었다.
“자,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제 1천왕이 올 거야.”
시아는 그들이 걸러낸 독이 모여 있는 병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옅은 분홍빛의 액체는 옅은 하늘색으로 변했다. 시동어조차 일절 외지 않았지만 6가지 독이 조잡하게 섞인 조합물을 한 번에 다른 것으로 바꿨다. 세나가 관심을 보였다.
“이건 어떤 마법이에요?”
“악마계 마법 중 하나라서 넌 못 해. 굳이 말하자면 ‘벡셀(Wechsel : 변화)’ 마법의 일종이야.”
시아가 마법으로 성분을 바꿔낸 것은 다름 아닌 페어플루흐테스 기프트(verfluchtes Gift : 저주받은 독)였다. 기초 6가지 독보다 훨씬 강력하고, 효력 발휘 후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독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독이 사용됐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증거를 완전히 소멸시킨다는 뜻이다. 색은 옅은 하늘색이고 냄새는 나지 않는다. 악마계 마법으로 만들 수 있는 특수한 독이라 당연히 악마가 애용한다. 해독 역시 악마밖에 할 수 없다. 그 독을 만든 악마의 피가 해독제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어려운 마법도 척척 해내시네요. 부러워요.”
“그건 하급 악마들도 할 수 있는 악마 구유의 잡기야. 후작씩이나 되는 분이 못하시면 망신이지.”
“캡틴 브롤…… 오셨어요?”
세나는 뒤통수에서 밀리엄의 목소리가 들리지 깜짝 놀라며 뒤로 돌아봄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인사했다. 지원도 자리에서 일어선 다음에 인사했다. 그들이 본 밀리엄은 시아가 로프로 묶은 모습 그대로였다. 드워프가 만든 건데 하이 엘프라고 해서 귀이 풀 수 있을까. 묶은 사람만 풀 수 있는 구조인지라 거꾸로 매달린 채 한참 고생하다가 겨우 집무실로 돌아왔다.
“아, 깜빡했어.”
보스는 정말로 밀리엄을 싹 잊어버리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4천왕인 밀리엄을 민망한 방법으로 내버려두게 됐다. 항상 5분 내지 10분만 골려줬는데 이번에는 두 시간 가량 방치했다.
“보-스.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 잊어버렸던 거야? 그런 거야?”
“미안. 지금 바로 풀어줄게.”
시아는 실컷 울상을 짓고 있는 밀리엄에게 다가갔다. 그는 뒤로 돌아서 시아에게 매듭이 있는 부분을 내밀었다. 그녀는 로프를 풀면서 지원과 세나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둘은 시아와 밀리엄에게 차례대로 인사한 다음에 나란히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일찍 오지 뭣 하러 기다렸어? 미련하게시리.”
“보-스. 난 보스를 믿었어.”
“믿지 마. 너만 손해야.”
밀리엄은 피가 머리로 쏠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마법으로 체내 혈류를 조절해서 육체가 죽어가게 놔두지 않았다. 그러니까 두 시간 내리 마력을 옅게 끊임없이 활성화시켰다는 얘기다. 길드 가디안스의 4천왕 중 한 명인데 그 정도 지구력쯤이야 별 거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할 필요 없는 일을 했다는 사실이 그의 미련함을 똑똑히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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