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Mutation-Kimera(리메이크)

Mutation - Kimera : 외전1

★은하수★ 2009. 8. 13. 15:59

외전1

 

길드 가디안스의 제 2천왕 디레스 엑서스엘. 레드 드래곤 순종으로서 올해 487세다. 인간의 나이로 환산하면 약 22세. 그가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 할 때 훤칠한 미청년으로 변하는 이유가 다른 데에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원래 청년이다. 수색 부대와 정보 부대를 통솔하고 제 1천왕 류 민의 스승으로서 모두에게 성실하고 어른스러운 이미지로 박혀있는 그이지만, 가장 좋아하는 음료가 바로 ‘술’이다. 드래곤답게 주량도 상당하다. ‘병’이 아니라 ‘드럼통’으로 계산하니 평범한 인간 중에 그와 대적할 만한 이가 있을까.

“어이. 한 잔 꺾자고.”

그가 머리통 두 배만 한 나무 술통을 어깨에 하나씩 지고 반갑게 맞이하는 상대는 다름 아닌 길드 가디안스의 신참 강 지원이었다. 펜타곤 중 다스 트로이에르스필의 친손자이자 에졸로페 황제의 조카손자라는 어마어마한 핏줄을 가졌지만 정작 본인은 모른다. 길드 크루세이더의 보스 클러치 사마엘에게서 모든 것을 강탈당하고 사촌 동생 박 세나를 데리고 굳세게 사는 중이다. 보통 21세 대학생처럼 설렁설렁 학교에 나가는 여유 만만한 인간이 아니다. 학교는 학교, 길드는 길드, 생계는 생계. 가능하면 학교에 나가고 가능하면 아지트에서 전투 기법 및 다양한 지식을 배워나갔다. 그리고 남은 시간엔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것도 두 탕. 가디안스에서 관리하는 큰 상점에서 창고 물류 정리도 하고, 어떤 인간 순종이 경영하는 호프집에서 바텐더도 한다. 몸이 남아나지 않을 듯하지만 그래도 착실하게 휴식 시간까지 챙기면서 부지런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그 바쁜 와중에도 자신의 스승인 디레스와 같이 술을 마시며 잡담을 나눈다는 사실이다.

디레스와 지원은 487세 스승과 21세 제자의 고두와 22세 형님과 21세 아우의 구도를 동시에 이뤘다. 평소엔 스승과 제자로서 격식 있게 지내지만 여유로울 땐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형 동생 혹은 술친구로서 편하게 서로를 대했다. 디레스는 지원이 술을 잘 마신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고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길드 가디안스 내에서 술을 좋아하는 이가 드물고, 좋아한다 해도 주량이 디레스에 비해 턱없이 적어서 혼자 마시는 게 일이었다. 그의 친동생 플릿 엑서스엘은 술을 싫어하는 쪽이라 술을 마실 때 옆에 있어달라고도 하지 못한다. 드래곤이 외로움을 타는 종족이 아니건만 길드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혼자만 있는 것이 왠지 어색해졌다.

“내일 아침 수업이 없는 걸 노리신 거죠?”

“하하. 제자가 첫 임무를 무사히 마친 것을 축하하기 위한 술인데 노릴 게 뭐 있나? 그냥 마시는 거지.”

신입 환영회가 끝나고 정식으로 특수전투 부대에 이름을 올린 지원은 이틀 만에 임무를 받았다. 솔아의 스페셜 훈련을 의외로 잘 따라가서 훈련 기간이 끝나기 전에 임무가 부여된 것이었다. 그를 직접 훈련시킨 교관이 다름 아닌 특수전투 부대의 부대장 윤 솔아니까 의심 없이 그에게 임무를 내릴 수 있었다.

3인 1조로 움직인 이번 임무는 그에게 신선한 자극이 됐다. 오리지널보다 육체적인 면에서도 더 강하고, 마력을 활용하는 정도도 훨씬 수월한 플러스를 주력으로 유지하긴 하나 때때로 오리지널로 요긴하게 힘을 발휘했다. 그는 언제나 미노타우르스의 강한 힘에 의지하여 무작정 돌진만 했었는데 인간의 능력과 미노타우르스의 능력을 적절히 배분하면 몇 배로 더 강해진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게 됐다. 이는 머리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확실하게 납득됐다. 그리고 가디안스의 체계적인 조직과 효율적인 지휘 및 작전에 눈을 뜨니, 예전 길드가 얼마나 무식하고 무모하게 활동을 했던 것인지 깨달았다. 그건 소름끼칠 정도로 바보 같은 짓이었다.

“키르케의 유산을 직접 본 건 처음이지?

“보기는커녕 봉인 된 곳에 가까이 가는 것도 여간해선 안 하잖아요. 전설 속에서 악의 화신 만만찮게 두려운 존재로 묘사된 키르케의 유산을 건드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라고요.”

“그래서 특수전투 부대를 보내는 거잖아.”

지원은 키르케의 열두 가지 유산 중에서 화산의 마그마를 물처럼 마시고, 바위를 음식처럼 씹어 먹는 그리폰을 직접 보고 상대했다.

마녀 키르케는 신화의 시대에 존재했던 전설 속의 마녀로서 신들도 그녀를 두려워했다. 그녀는 죽기 전까지 열두 마리의 기상천외한 괴물을 만들었는데 이를 키르케의 유산이라고 한다.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진 채 봉인되었다. 보통 전설 속의 장소는 음산하거나 신성하긴 해도 실제로 전설 속 존재가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저 전설일 뿐이다. 하지만 키르케의 유산은 12장소가 표시된 지도가 존재하고 실제로 유산도 있다. 키르케의 이야기는 전설일지 몰라도 그녀의 유산은 실재하는 것이다. 난폭하고도 잔혹한 12마리의 괴물. 그래서 웬만해서는 누구도 키르케의 유산에 손대지 않는다. 봉인지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그런데 가끔씩 그것에 손대는 작자들이 있다. 키르케의 유산을 소유하고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으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헛된 야욕에 사로잡힌 이들이다. 한 번 생각해보자. 전설 속의 마녀 키르케가 만든 괴물이다. 봉인할 필요가 있는, 이성일랑 전무하고 감성에 충실한 괴물이다. 생포하는 것도 하늘에 별 따기인데 과연 제대로 조종할 수 있을까? 키르케의 유산이 다른 괴물과 구별되는 건 다 그 이유가 있어서다. 정신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신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트리플 S급으로 높다. 게다가 다룰 수 있었으면 길드 가디안스나 크루세이더, 에덴 등 정상급 길드에서 먼저 손댔을 것이다. 뭐 손대겠다고 마음먹으면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가치도 없고 필요성도 없다. 더욱이 위험하다. 때문에 거물급 길드는 헛되이 봉인에 손대는 녀석들을 저지하고 유산이 일으키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봉사를 자발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세상에 인간만큼 어리석은 존재를 없어요. 키르케의 유산을 지배하겠다니, 웃기지도 않아요.”

“보스도 그렇게 말하지. 인간에게서 욕심을 빼면 흐물흐물한 시체밖에 남지 않는다고 하더군.”

디레스와 지원은 어느새 작은 술통을 한 통씩 다 비우고 두 번째 통의 마개를 열었다. 적당히 숙성된 맥주의 시원하고도 통 쏘는 향이 후각을 강하게 자극했다.

“인간에게 욕심은 뼈대라는 뜻이군요.”

“본인도 오리지널이 인간이면서 그런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니까. 소름끼칠 정도로 비판적이야. 아주 냉정해.”

“인간 순종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아니, 인간 순종이라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할 수 있으니까 보스의 비판은 다른 종족으로서 당연한 비판이에요.”

“키메라의 자긍심은 역시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심오하군.”

디레스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에 미소 지었다. 디레스의 마지막 말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는 시아나 지원의 사고방식을 비꼬는 것이 아니다. 후천적인 종족, 키메라가 존재하는 세계다. 순종은 키메라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러한 진실 하에 디레스의 말은 진심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마그마 그리폰의 둥지는 여전히 뜨거울 열기로 가득한 마그마의 성지였나?”

“아, 말도 마세요. 크레다 씨의 마법이 없었으면 살가죽이 다 녹아버렸을 거에요.”

“역시 그곳의 열기는 대단하군.”

레드 드래곤 순종이기 때문에 웃으면서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원은 미노타우르스의 두껍고 질긴 가죽이 방패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임무 내내 조마조마했다. 봉인 지점에 가까이 갈수록 맥박이 미친 듯이 빨라졌다.

“길드 나흐트의 바보들을 상대할 때는 산 중턱이라 괜찮았지만 유산을 산 정상의 분화구로 유인할 땐 정말 곤욕이었어요.”

길드원 280명 규모의 전투형 길드 나흐트는 현재 보스를 잃고 차기 보스 자리를 두고서 내전 중이었다. 그러던 중 한 무리가 길드 내에서 권력을 차지하고 입지를 굳히기 위해 키르케의 유산에 손 댄 것이다. 마그마 그리폰의 봉인지를 지키는 산지기가 길드 가디안스에 신고하여 특수전투 부대의 한 팀이 급히 출동했지만 몰상식한 놈들은 이미 봉인을 풀고 유산이 날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괴물 정도야 얼마든지 길들일 수 있다고 안이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키르케의 유산이 보통 괴물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길드 나흐트는 켄타우르스 순종, 리자드맨 순종, 인간 순종으로 이루어졌다. 그 때 산에 온 길드원은 리자드맨 순종 다섯 명과 인간 순종 세 명이었다. 길드 가디안스의 특수전투 부대에게 있어 다른 무명 길드의 평범한 길드원은 바퀴벌레만큼이나 잡기 쉬운 상대였다. 그래서 키르케의 유산에 손대는 자, 죽음으로 죄를 갚으라는 오랜 관습에 따라 발견 즉시 단번에 죽였다. 인간 순종 중 한 명이 지원을 향해 총을 쐈지만 본인이 당황하는 바람에 총구가 흔들려서 지원을 제대로 겨누지 못했다. 빗나간 총알은 허공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와 동시에 지원을 노린 인간 순종은 고통 없이 머리와 몸통이 나뉘었다. 지원의 거대한 도끼가 단숨에 그의 목을 자른 것이었다.

키스케의 유산에 손댄 바보들을 처치하는 데는 3초도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분화구에서 100m정도 내려와 마구잡이로 불을 뿜어대는 마그마 그리폰이었다. 불덩어리처럼 몸 자체에서 열기를 풍기고 숨 쉴 때마다 콧구멍과 입에서 불이 들락날락 했다. 몸집은 보통 그리폰의 두 배고 성격은 세 배로 난폭해서 봉인지인 분화구로 유인하는데 어려움이 컸다. 정신 마법뿐만 아니라 보통 마법에도 저항력이 커서 마법으로 옮기지도 못했다. 직접 뛰면서 그것을 유인해야 했다.

“마그마 그리폰도 은근히 피곤할 거야. 봉인이 자주 풀렸다 걸렸다 해서.”

마그마 그리폰의 봉인지는 키르케의 12유산 중에서 그나마 가장 접근하기 용이하다. 그래서 키르케의 유산을 노렸다 하면 웬만하면 마그마 그리폰이었다.

“그래도 신기해요. 스스로 봉인을 깨고 나오지는 않잖아요. 타인이 자극을 주지 않으면 조용하니까요.”

“그렇게 보이려나? 천 년 전, 그보다 더 전 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키르케의 유산이 멋대로 봉인을 풀고 활개 치는 바람에 인근 피해가 엄청났다고 해. 유산도 이제 노쇠해져서 스스로 봉인을 풀지 않는 게 아닐까?”

“으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두 번째 술통도 다 비웠다. 세 번째 술통을 따는 순간 원정에 나가서 감감무소식인 보스가 퍼뜩 떠올랐다. ‘얼음의 대지’라는 창조기부터 존재했던 성지에 있기 때문에 텔레파시도 통하지 않는다. 보스의 용태를 살피고 오라며 심부름꾼을 보낼 수 있는 곳도 아니라서, 보스가 돌아올 때까지 죽치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보스는 지금 뭐하고 계실까요?”

“신나게 헤집고 다닐걸?”

디레스는 눈에 훤히 보인다는 듯이 아주 당연하게 대답했다. 무뚝뚝함이 흘러넘치는 포커페이스로 시종일관 무게 잡으면서 사방팔방 여기저기 구석구석 쑤시고 다닐 것이다.

시아가 키메라가 되기 전, 인간 순종이었을 때, 당시 살아있던 전대 바르베리트 후작을 따라 디레스의 레어에 놀러온 바가 있었다. 아직 7살 꼬마였던 시아는 레드 드래곤 순종의 레어를 이 잡듯이 샅샅이 뒤졌다. 주인인 디레스조차 모르던 것들도 숱하게 찾아냈다. 레어 안에 위험한 짐승이나 식물이 많아서 수십 번 주의를 줘도 절대 얌전히 조심조심 다니지 않았다. 하마터면 그의 레어에 기생해고 있는 리자드맨에게 먹힐 뻔도 하고, 식인 식물에게 잡히기도 했다. 시아와 자연스럽게 교감했던 전대 바르베리트 후작이 제 때 구해준 덕분에 레어 모험을 죽지 않고 마칠 수 있었다. 이처럼 그녀는 어딜 가나 본전을 뽑았다.

“하긴. 캡틴 류도 아마 캡틴 브롤이 보스를 말리느라 정신없을 거라고 말했어요.”

“우리 보스가 겉보기에는 카리스마 있고 정적인 것 같지만 실은 엄청난 왈가닥이니까 그 정돈 각오 해야지.”

“왈가닥……은 아니신 것 같은데요.”

“흐음. 지나친 표현이긴 하네. ……. 그래. 화끈한 성격. 그게 맞겠다.”

디레스의 근엄한 이미지는 온데간데없고 혈기 왕성하고 낙천적인 청년 이미지가 대신 자리 잡았다. 덕분에 드디어 지원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술에 취하진 않았지만 술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리라.

“여기저기 잘 쑤시긴 하지만 타고난 카리스마와 탁월한 무표정 포커페이스는 무시 못 하지.”

키메라가 되기 전에도 표정은 언제나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그래도 전보다 나아진 거다. 과거에는 가족들과 전대 바르베리트 후작 앞에서 밖에 웃지 않았다. 그리고 딱히 내세울 게 없는 인간 순종 여자 아이 주제에 타고난 카리스마로 상대를 위축시켰다. 일부러 노려보지 않아도 위압감은 충분했다. 레드 드래곤 순종이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그 카리스마에 압도되었다면 말 다 한 거나 다름없다.

“캡틴 류 말이, 목표물을 찾아서 확보할 때까지 안 돌아오신다고 했는데 설마 몇 년 걸리진 않겠죠?”

“두고 봐야지.”

최근 몇 백 년 동안 얼음의 대지에서 글라셰가 발견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한 쪽 종족이 글라셰인 키메라를 발견한 것은 기적적인 일이었다. 얼음의 대지 근처로 파견된 첩보원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글라셰가 아닌데 얼음의 대지 근처다 보니 글라셰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다. 시아가 무슨 생각으로 뭘 믿고 태초의 대지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시작한 이상 끝장 보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을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왜일까? 그녀라면 찾아올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은연중에 생겼다.

“캡틴. 또 안주도 없이 드시는 겁니까?”

“역시 레스.”

“한 잔 드실래요?”

“난 됐어. 그보다 너, 속 버린다.”

디레스의 비서이자 정보부대 안에서 플릿과 쌍벽을 이루는 유능한 첩보원, 레스가 꼬치구이와 과일을 가져왔다. 레스. 성도 없고 이름도 없는 그를 데려온 것도, ‘레스’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도 진 보스였다. 그는 인간-하프 스프라이트 키메라라고 하면 뒷골목에서 유명한 키메라였다. 고아원에서 자라서 키메라가 되고 결박을 깰 때까지 죽는 것 빼고 안 해본 게 없었다. 사기, 강도, 살인, 마약 등등 깡패들 사이에서도 진정한 무법자로 불렸다. 게다가 가장 아랫단계인 락급에 만족하는 시궁창 속에서 몸을 혹사시키며 악바리로 체인급까지 올랐다. 시아를 만나고 거둬지기 전엔 이런 평화…는 아니지만, 나름 성실한 정착 생활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냥 한 잔 받지? 신참이 권하잖아.”

“캡틴. 술 끊은 지 3년이 다 돼 가는데 무슨 소리십니까?”

레스는 길드 가디안스에 들어온 후 마약도 술도 담배도 모조리 다 끊었다. 금단 현상으로 고생 좀 했지만 세상만파 다 겪어본 그에게 금단 현상은 괴로운 축에도 끼지 못했다. 새 사람이 되기 위해 죽어라고 노력했고, 인정받았다.

“대단하세요. 보통은 끊기 힘들다는데.”

지원은 한 때 세나에게 구박 받고-술주정은 없지만 한 번 마셨다하면 수없이 들이 부으니 구박 받을 만하다- 술을 끊으려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택도 없었다. 알콜 중독은 아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 맥주 한 캔씩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았다.

“난 한다면 하는 놈이잖아.”

“가끔 그게 지나쳐서 보스에게 된통 혼나고.”

“아, 캡틴.”

레스가 자랑스럽게 말하는데 디레스가 초를 쳤다. 겉모습만 보면 레스가 연상으로 보인다. 올해 정확하게 서른 살. 하지만 표정이나 행동거지는 동네 악동과 다를 바 없다. 플러스가 하프 스프라이트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용할 때는 한없이 조용하지만 행동을 개시할 때는 한 치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완벽함과 보기 드문 무자비함을 겸비하고 있다. 거기에 오리지널일 때의 익살스럽고 쾌활한 본성이 제대로 섞여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천방지축이 되어 버렸다. 장난기 넘치는 사고뭉치로 바뀌었다. 아지트 안에서 여유로울 때 이 성격이 빛을 발한다.

“지원아. 세나가 항상 이 녀석 장난의 희생양이란다.”

“항상 이라뇨. 이제껏 두세 번 밖에 안했습니다.”

“그 두세 번이 그 여린 아이에게 얼마나 트라우마를 남기는지 알아? 집무실에 들어오는 걸 꺼린다고.”

“제 탓도 있지만 캡틴 잘못도 있습니다. 부적당한 어휘 사용으로 가슴에 스크래치를 남기시지 않습니까.”

“얌마. 내가 언제.”

“항상 입니다.”

제 2천왕과 그의 비서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절대 혼자 죽지 않으리라는 물귀신과 같은 고집으로 팽팽하게 맞섰다. 그걸 중간에 끊은 것이 지원의 한숨 소리였다. 참으로 길고 무거운 한숨이었다.

“하아아아-. 세나가 용케도 혼자서 잘 버티고 있구나.”

사랑하는 여동생과 떨어져 지내는 것이 처음인지라 걱정에 걱정만 늘었는데, 위의 바보 같은 대화를 듣고 나니까 수만 근의 걱정이 한 번에 그의 양 어깨를 짓눌렀다. 지금 혼자 방에서 자고 있을 세나가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가서 확인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설마 내가 제자를 방치할까. 세나가 날 얼마나 잘 따르는데.”

“학교도 꾸준히 다니고 길드 생활도 제법 익숙해졌어. 너 만만치 않게 부지런해.”

디레스와 레스는 화해모드로 돌변했다. 같이 있는 상대가 세나의 사촌 오라비인 강 지원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어야 했다. 시스터 콤플렉스가 약간 심해서 세나와 관련된 것이라면 그의 앞에서는 최대한 조심해야 했다.

“겉으론 그래 보여도 마음고생이 심할 수도 있죠.”

지원은 세상 달관한 눈으로 두 상관을 지그시 바라봤다. 두 상관은 지뢰를 밟은 기분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착한 거 빼면 시체인 아이였어요. 그리고 마음이 얇은 유리구슬 같아서 섬세하고 또 섬세하니,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대하지 않으면 금방 깊게 상처받아요. 원래대로 되돌아가는데 상당히 긴 시간이 필요하죠. 남을 배려하는 게 우선인지라 일부러 괜찮은 척 하는 데에 도가 텄고요. 그러면서 혼자 속으로 끙끙 앓는 게 다반사에요. 가뜩이나 크루세이더의 보스의 손에 모두가 처참하게 죽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두 눈 똑바로 뜨고 본 바람에 심리적으로 위태위태한데 말이에요.”

오빠의 동생 사랑 긴 사설이 줄줄줄 이어졌다. 그늘진 얼굴에 눈은 보이지 않고 입술이 상하좌우로 바쁘게 달싹 거리는 것만 보였다. 그는 두 손에 꼭 잡은 소형 맥주 통을 내려다보고 맥주 수면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면서 두 상관에게 사정없이 속사포를 날렸다.

“다들 제가 세나를 과잉보호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세나가 절 지나치게 챙겨주는 거에요. 자기 걱정은 안 하고 다른 사람만 걱정하는 바보라고요. 인생의 90%는 손해 보면서 자신이 상처 받았는지 조차 느끼지 못해요. 쌓이고 쌓여서 한꺼번에 터지게 되면 원상복구하기 얼마나 힘든 줄 아세요? 사람에게 상처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상식이잖아요. 상대가 여리고 곱고 착한 아이라면 더더욱 신경 써 주셔야죠. 보스 덕분에 겨우 진정된 아이를 다시 불안감 속에서 혼자 떨며 서서히 말라버리게 두실 건가요? 제가 옆에 있어 주질 못한 탓에 매일 걱정하고 있는데 안 도와주실 건가요?”

지원이 특수전투 부대로 확정된 날, 몇 없는 짐을 옮기기에 앞서 디레스와 레스에게 이것과 비슷한 말을 막힘없이 길게 연설했다. 두 상관은 걱정 말라며 지원을 다독였었는데 며칠 새에 대시 긴 대사를 듣게 됐다. 그들이 볼 때 지원은 자신이 시스터 콤플렉스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그에게 변명 같은 말을 해봤자 먹히지 않을 테고, 이럴 땐 다른 말로 돌리는 게 최고다. 아니면 레스처럼 자리를 피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캡틴. 전 이만 자러 가겠습니다. 너무 어지럽히지 마십쇼.”

레스는 지원에게도 인사를 하려다가 그냥 밖으로 나갔다. 맥주 통만 내려다보고 있으니 아직 건들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어이. 술은 마시라고 있는…….”

“큭. 큭.”

갑자기 지원이 어깨를 들썩이면서 웃었다. 그보다는, 웃음보가 크게 터지려는 걸 억지로 참는 듯이 보였다.

“파-. 웃음을 참는 것도 상당히 힘드네요.”

“너…….”

“작은 복수였어요.”

거의 반 통을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손에 통을 든 채 소매로 입가를 슥 닦았다.

“스승님. 세나한테 아무 생각 없이 막 말하셨다면서요? 캡틴 류가 옆에서 필터 기능을 해줘서 다행이었다고 다이나 씨가 가르쳐줬어요. 그리고 캡틴 하갈이 아니었으면 레스 씨 장난에 휘말려서 세나가 다칠 뻔 했다고 하던데요?”

디레스는 가슴이 뜨끔 하는 동시에 수다쟁이 다이나의 입을 꿰매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일단은 세차게 밀려오는 민망함을 날리기 위해 새 맥주 통을 따서 지원에게 건네주고 자기가 마실 것도 유쾌하게 ‘뻥!’ 땄다.

“안 그래도 반성하고 있었어. 세나가 워낙 백지 같은 아이여야 말이지. 들은 그대로 믿고 시킨 그래도 해서 내 쪽이 다 겁난다니까. 아마 레스도 앞으로는 여간해선 세나에게 장난치지 않을 거야.”

“제발 스승님께 건 제 믿음을 저버리지 말아주세요.” “그래, 그래.”

길드 가디안스의 제 2천왕은 건배를 하기 위해 그의 제자 쪽으로 소형 맥주 통을 내밀었다. 지원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건배에 응했다. ‘통’하는 나무통끼리 부딪히는 소리는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에 비해 더 정겹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