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각성
얼음의 대지에 몰아치는 눈보라 덕분에 길드 가디안스의 진격 부대가 간만에 스릴을 느꼈다. 제 3천왕 휘하 길드원 중에서 알짜만 모은 팀이었다. 게다가 지금 그들을 지휘하는 자는 진격부대 대장이자 제 3천왕, 밀리엄 브롤이었다. 길드 가디안스의 보스도 그들의 일행이었다. 얼음의 대지에 발을 들이기 직전까지는 다같이 있었다.
“정말이지, 우리 보스, 딴 길로 새는 데에 일가견 있다니까.”
보호막 속에서 터벅터벅 걷는 밀리엄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한 쪽 종족이 글라셰인 키메라를 찾으러 얼음의 대지를 찾아온 선발대는, 태초의 땅에 발을 들인지 한 시간도 안 돼서 강한 눈보라를 만났다. 걸어 나가기도 힘들고 시야를 확보하기도 어려워 보호막을 쳤는데, 그 사이에 보스가 사라졌다. 모두의 눈이 가려진 틈을 타 혼자 잽싸게 어딘가로 가버린 것이다. 어이없게 보스와 떨어진 선발대는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캡틴, 벌써 두 시간째 목적 없이 걷고 있습니다.”
옅은 회색 털을 가진 남성체 낭인족 한 명이 밀리엄의 가슴을 푹 찔렀다. 그의 말이 사실이지만 캡틴으로서 그의 말이 맞다고 차마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럴싸한 핑계를 대야했다.
“목적이 없기는. 보스가 시킨 대로 특이한 키메라를 찾고 있잖아.”
“보스를 찾는 거 아니었습니까?”
40대 초반쯤 돼 보이는 남성체 인간이 의외라는 듯이 받아쳤다. 밀리엄은 또다시 가슴이 푹 찔렸다. 실은 이도저도 아닌데 핑계도 엇나간 방향으로 대고 말았다. 하지만 그 캡틴에 그 부하들이라서 깊게 따지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캡틴이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 그러려니 했다. 제 1천왕이 이끄는 암살 부대나 특수전투 부대였으면 캡틴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알아서 뿔뿔이 흩어져 자신이 옳다 생각한 일을 했을 것이다. 제 2천왕이 이끄는 수색 부대나 정보 부대였으면 캡틴에게 다음 지시를 독촉하거나 꼬치꼬치 캐물었을 것이다. 제 4천왕이 이끄는 후방지원 부대는 애초에 이런 오지에 올 부대가 아니니까 생략하겠다. 밀리엄은 자신이 진격 부대를 지휘하는 것을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보스는 훌륭한 먼치킨이잖아. 얼른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갈 궁리나 하자고.”
“캡틴 류께는 죽어도 비밀로 해야겠네요.”
“우린 무사할지 몰라도 캡틴은 무사하지 못할 걸.”
몇몇이 키득키득 웃었다. 어떤 장면을 상상했을까? 민이 고고하게 살기를 뿜고 밀리엄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장면? 아니면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는 민에게서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는 밀리엄의 모습? 어떤 것을 상상하든 전부 밀리엄이 민에게 밀리기만 할 뿐 밀리엄이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민이 아직 10대 소년이긴 해도 길드 가디안스의 제 1천왕이었다. 길드원들이 보기에도 민과 밀리엄을 비교하는 건 당치도 않았다.
“하하하. 목표물을 찾아내지 못하면 보스 손에 죽고, 너네가 입을 가볍게 놀리면 류 민 손에 죽는 거냐?”
제 3천왕은 어색하게 웃었다. ‘말단은 밖에서 죽고 간부는 안에서 죽는다’는 길드 사이에 파다하게 퍼진 격언 아닌 격언이 떠올랐다. 일단은 힘도 약하고 기술도 부족하기 때문에 길드 외부에서 일을 당하면 운이 좋지 않은 이상 무사하기 힘들다. 하지만 간부는 바깥일쯤이야, 전쟁 규모만 아니면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길드 내부에서 또 다른 간부와 충돌하면 보통 골치 아픈 게 아니다. 반드시 내전이 아니더라도 음모도 있을 수 있고 보스의 심적 변화 같은 말 같지도 않은 일이 있을 수 있다. 요점은 간단하다. 말단이든 간부든 허무한 개죽음이 허다하다는 것이다.
눈보라가 차츰 약해졌다. 눈송이가 천천히 공중을 배회하는 정도가 되자 선발대 전원은 보호막을 해제했다. 곧이어 모두의 눈에 빨려 들어온 풍경은 경이롭기 그지없었다.
“캡틴, 이거…….”
“민담이 사실이었어?”
“설마 보스는 이걸 알고 혼자 멋대로 갔던 건가?”
탄성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밀리엄조차 넋을 잃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광경은 존재할 수 없을 텐데 버젓이 존재했다.
너른 눈의 대지 위에 속이 훤히 비치는 얼음 수정이 우후죽순처럼 솟아 있었다. 인간 성인 남자의 평균키를 기준으로 해보자. 기준의 키만 하거나 그보다 조금 더 큰 수정이 수직으로 서있고 그 둘레에 허리높이 까지 오는 비교적 얇은 수정이 빼곡히 뻗어 나왔다. 이런 그룹이 곳곳에 퍼져있었다. 빛은 수정을 통과하기도 하고, 수정의 표면에 반사되기도 하고, 수정 내부에서 무한히 반사되다가 다른 수정으로 튕겨 날아가기도 했다. 짧게 말하면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 얼음 수정 밭이었다.
세간에는 태초의 대지 두 곳 중 얼음의 대지에 관한 민담이 심심풀이 땅콩처럼 퍼져있다. 이 세상이 만들어질 때 가장 먼저 모습을 갖춘 태초의 대지는, 그 성스러움을 보호하기 위해 외곽에 강한 눈보라를 두어 접근을 어렵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민담을 믿고 무모한 도전을 했던 이들 중에 실패하거나 죽어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이 허다했다. 눈보라가 소용돌이치는 범위가 너무 넓어서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워낙 얼음의 대지로 찾아 들어가는 이의 수가 적긴 하나 대부분이 호되게 당하고 돌아오기 때문에 ‘민담은 거짓말이다. 눈보라 밖에 없다.’라는 의견이 정설이 됐다.
길드 가디안스의 선발대는 선발대답게 눈보라가 치는 바깥 구역을 완전히 통과했다. 모두 아무래도 제 3천왕 덕분이었다. 아무래도 밀리엄이 하이 엘프-실버 드래곤 키메라여서 그런지 마력이-상대적으로- 무궁무진했다. 민담은 사실이라는 것이 그들의 몸 던진 경험을 통해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빠-알리도 온다. 시간이 남아 도나봐?”
낯익은 목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전원 일제히 빠른 속도로 고개를 돌렸다. 길드 가디안스의 보스, 진 시아가 플러스(악마) 상태로 높고 긴 얼음 수정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었다. 그녀는 날개를 활짝 펴 유유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역시 보스는 민담이 진짜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응. 악마잖아.”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신화를 믿고 신화의 진실과 거짓을 지키는 일족에게 민담의 진위 여부를 판가름하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선발대 중에 천사족이 있었다면 두말 할 것 없이 시아와 같은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더불어 그들이 눈보라 속에서 천천히 헤맬 일도 없었을 것이다.
“보스, 우리 좀 데려가지 그랬어.”
“너네가 애도 아니고, 내가 일일이 챙겨야 해? 이 무능한 놈아.”
“아으아아(아프잖아).”
시아는 자신을 타지에서 멀거니 기다리게 한 벌을 즉석에서 내렸다. 양 옆으로 볼살 잡아 늘리기. 시아가 손을 놓자 밀리엄의 뽀얀 살이 붉게 부어올랐다. 모두들 그를 보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그의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떠는 자도 있었다. 시아는 두 손을 툭툭 턴 다음에 밀리엄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가 선발대의 캡틴이기 때문에 그 한 명만 하면 충분했다.
“보스, 볼살 늘어나면 날렵한 턱살이 사라진다고.”
밀리엄은 입을 ‘오’ 발음 하듯이 길게 벌린 다음에 볼을 안으로 푹 밀어 넣었다. 품위를 중시하는 하이 엘프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밀리엄 브롤이니까’ 누구도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았다.
“턱선이 두리뭉실한 엘프라……. 나쁘지 않은데? 엘프라고 해서 다 턱선이 날렵할 필요는 없잖아.”
“천성으로 타고난 매력적인 외모는 엘프에게 종족적 특권이자 자존심이라고.”
“세상엔 예외라는 것도 있으니까.”
“우- 못됐어, 보스.”
그는 시아에게 항의했다가 본전도 못 건졌다. 길드원들은 소리 죽여 웃느라 바빴다. 시아와 밀리엄에게 체통을 지키라는 둥 점잖게 굴라는 둥 잔소리 하는 이는 누구 한 명도 없었다.
“보스. 우린 언제쯤 보스처럼 캡틴을 자유자재로 놀릴 수 있을까요?”
“흐응-. 너희가 할 만한 대사는 아니지 않아?”
시아는 30대 초반의 젊은 인간 여성의 대담한 발언을 담담하게 넘겼다. 진격 부대는 캡틴이든 심지어 보스든 상위 간부를 어려워하지 않고 언제나 자유분방한 자세로 무장하고 있는 공통적인 특색이 있었다. 용건도 없으면서, 아니 ‘갑자기 보스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는 용건으로 당당하게 보스의 집무실로 놀러가는 이들은 그들뿐이다. 서류 업무를 귀찮아하고 툭하면 밖으로 새려고 하는 시아로서는 그들의 행동이 무례해 보이지도, 귀찮지도 않았다. 되레 반가웠다. 그들을 좋지 않게 보는 무리라면 시아와 밀리엄을 제외한 모든 간부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일반 길드원 중에서도 그들을 탐탁지 않게 보는 이들이 있다.
“우우-. 보스는 우리를 감싸주는 역할이잖아. 잔소리는 캡틴 류의 전매특허라구.”
타 길드에는 ‘브레이크 없는 불도저’로 소문난 진격 부대였다. 하지만 보스 앞에서는 실컷 어리광을 부렸다. 그들의 평균 나이가 40대 초반인 걸 염두하면 조금 징그러울 수도 있다. 키메라이기 때문에 외모의 노화가 더디게 진행하는 경우도 있어서 외모상 평균 나이는 20대 초반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보스보다 나이가 많다.
“민이 잔소리만 하지 않아. 뭐, 너네랑 코드가 안 맞긴 하다만.”
“보스 은근히 캡틴 류 편만 들어요.”
한 명의 발언에 모두가 동조했다. 밀리엄은 긴가민가한 표정을 하며 시아를 쳐다봤지만 시아는 무대답, 무반응이었다. 당연히 긍정할 수 없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부정도 할 수 없었다. 그녀와 민이 대립하는 경우에는 그녀의 고집대로 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런데 민이 누군가와 대립하면 대부분 민의 편에 서는 것이 그녀였다. 그의 의견이 상대보다 더 옳은데 어쩌겠는가.
“자. 잡담은 그만 하고. 이제 보스랑 합류했겠다, 일 해야지.”
밀리엄이 샛길로 빠진 길드원을 제자리로 모았다. ‘Ja, mein Kaptän.' 그들은 입에 붙은 경례를 어깨의 힘을 뺀 상태로 가볍게 말했다.
얼음의 대지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것과는 별개로 분위기가 싸- 해졌다. 얼음 수정을 통과하거나 표면에 반사되는 빛이 수상해 보일정도로 기묘한 기운이 스멀스멀 그들을 덮으려 했다. 누군가가 노려보거나 훔쳐보는 시선이, 그들 12명 모두를 꿰뚫어보는 강한 시선까지 느껴졌다. 외곽 눈보라와는 또 다른 스릴이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게 상당히 마음에 안 드나 보네.”
시아는 가까이에 있는 얼음 수정에 손을 가만히 댔다. 냉기가 흘러나오는 차가운 표면. 손 끝 뿐만 아니라 손가락 관절도 아릿아릿 했다. 오랫동안 대고 있으면 손바닥이 그에 붙을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과연 이것이 마법으로 녹을까하는 실험적 충동이 일었다.
“진짜로 이 땅에 사는 생명체가 있나 보네.”
“그런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아.”
진격 부대는 의아한 상황에 흥미가 생겼다. 빨리 움직이고파 안달이 났다.
“절대 혼자 움직이지 마라. 나한테 꼭 붙어 있어. 안 그랬다간 먹힌다.”
가디안스의 보스는 그녀의 특별 부대 중에서 앞장서서 날뛰기 좋아하는 진격 부대에게 경고했다. 주의가 아닌 경고 수준의 명령이었다. 모두를 잡아먹을 듯한 거대한 시선에 대항하여 몸을 움츠러들게 하는 살기까지 첨부했다. 곁들어 블랙-레드 오드 아이의 눈빛이 달라졌다. 섬뜩했다. 시아가 더 무섭게 느껴질 만큼 오싹했다.
“먹힌다……. 보스는 상대가 누군지 아는 거야?”
“얼음의 대지.”
“아? 얼음의 대지? ……. 우리가 밟고 있는 이거?”
밀리엄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런데 시아는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정말 얼음의 대지인 것인가.
“너희한테 말 안 한 게 있는데, 얼음의 대지는 살아 있는 땅이야. 글라셰를 잉태하고 낳고 키우는 거대한 모체야. 정령이 자연에서 태어나는 것처럼 글라셰는 얼음의 대지에서 태어나. 생김새도 천차만별이고 능력도 그렇지만 얼음의 대지라는 공동의 어머니가 있어. 글라셰가 위험하면 얼음의 대지가 직접 움직이고, 모체가 위태로우면 자식들이 나서지. 지금 이 소름 돋는 시선은 얼음의 대지의 것이야.”
충격적인 사실에 다들 말을 잃었다. 하지만 바짝 긴장하고 정신 단단히 차렸다.
불의 대지와 얼음의 대지는 둘 다 태초의 땅이지만 서로 반대 속성인 만큼 다른 점이 상당히 많다. ‘불의 대지’는 불이 타오르는 대지 자체만을 칭하는 단어다. 그리고 불의 대지에 사는 유일한 생명체인 불의 거인 무스펠은, 대지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대지 위에서 끝없이 타오르는 무한의 불에서 태어난다. ‘얼음의 대지’는 외곽 눈보라부터 그 안 전부를 칭한다. 상공의 수증기도 지하의 얼음 광맥까지 전부 포함된다. 땅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되는 것이다. 글라셰는 그 동안 조금씩 서술한 것처럼 얼음의 대지에서 태어나는 생명체의 총체를 뜻한다. 그리고 땅 위에 솟아있는 얼음 수정은 글라셰와 얼음의 대지를 이어주는 탯줄이다. 이처럼 태초의 땅 두 곳은 범접할 수 없다는 점을 빼면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 태초의 땅부터 성격이 확연히 차이가 나는데 이 세상이 무궁무진하게 다양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워낙 접근하기도 힘들고 대부분 관심조차 두지 않기 때문에 두 곳에 대한 정보가 아주 미미하다. 신화나 민담 같은 옛날이야기에 들어있는 정보가 고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의 대지가 상대적으로 개방된 곳이라지만 잘못된 정보를 접하는 이가 월등히 많다. 그러면 폐쇄적인 얼음의 대지는 어떨까? 잘못된 정보조차 그 양이 너무 적다. ‘얼음의 대지’라는 단어만 알 뿐 감도 잡지 못하는, 무지 상태인 자들이 태반이다.
“얼음의 대지는 이방인이 자신의 아이들을 괴롭힐까봐 경계하는 건가?”
“그렇겠지. 아마 우리가 나갈 때까지 ㅖ속 주시할 거야. 긴장을 푸는 순간 지는 거지.”
“헤에. 최고의 훼방꾼이군.”
일을 최대한 빨리 끝내기 위해서 진격 부대를 동원한 건데 아무래도 다 같이 다니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됐다. 시아와 밀리엄이 10명의 길드원을 제대로 지킬 수 있냐 없냐는 새로운 과제가 생긴 셈이었다.
“여기선 마법도 못 쓰니까 그거 안 잃어버리게 조심해.”
시아는 밀리엄의 왼쪽 허리춤에 있는 검을 가리켰다. 정교하고 화려하게 세공된 손잡이와 ‘검’보다는 ‘도’에 가까울 만큼 날씬한 칼날. 밀리엄을 위해 특별 제작된 것처럼 잘 어울리는 사브르였다. 따로 주어진 이름은 ‘글릭폰.’ 그가 키메라가 되기 전에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검이자 적들이 ‘밀리엄 브롤’을 알아볼 수 있는 표지였다. 그는 항상 자신의 탁월한 마법 실력을 강조하지만 실은 검술 실력이 그보다 위다. 그가 글릭폰을 쥐면 그의 주변에 말짱하게 서있을 수 있는 적은 하나도 남지 않기로 유명하다. 글릭폰을 든 브롤에게 가까이 가서는 안 된다. 이건 상식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는 늘상 가지고 다녀도 실상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어쩔 수 없이 이 녀석을 써야하는 건가? 그냥 드래곤으로 변하지 뭐.”
“캡틴은 몸 자체가 무기나 마찬가지였죠?”
“드래곤의 특권이지.”
밀리엄은 최대한 부친의 유품을 사용하지 않는 쪽을 원했다. 시아가 그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나 태초의 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무엇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그에게 한 번쯤 일러둘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그저 한 번 언급하고 그가 한 번 인식했으면 그걸로 족하다. 그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무기를 하나씩 더 챙기라고 하신 겁니까? 보스.”
“응. 전투계는 상관없지만 마법계는 이곳 환경이 마음에 들지 않을 거야.”
“하지만 아까 보호막을 쓸 수 있었잖습니까?”
“거긴 얼음의 대지의 외곽 일부였으니까. 여긴 그 안이라고. 못 믿겠으면 한 번 해보던가.”
40대 초반의 남자는 체내의 마력을 활성화시켰다. 그게 다였다. 체내에서 활성화시킬 수는 있지만 밖으로 끄집어낼 수 없었다. 불가능할 것 같지 않은데, 엄청난 집중력과 시간이 필요할 듯 싶었다.
“차라리 검을 한 번 휘두르는 편이 빠르겠습니다.”
그는 그새 볼을 타고 내려가는 땀을 소매로 닦았다. 시아는 그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제한 받지 않는 종족도 있지. 천사계, 악마계, 정령계. 딱 이 세 부류만 태초의 땅에서 아무란 제약 없이 힘을 쓸 수 있어. 쿼터는 제약 받지만 하프 까지는 순혈처럼 제한 없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
그 사실을 증명하는 듯이 몸 밖으로 다량의 마기를 방출했다. 평소와 같이 편한 모습이었다. 아마도 본디 육체가 존재하지 않는 비물질 종족, 정신계이기 때문에 구속받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 어디서든 그들에게 제한이 통하지 않는데, 태초의 땅에서도 그 법칙은 여전했다. 덕분에 12인 중에서 무리 없이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이는 그녀밖에 되지 않았다.
“아앗!”
낭인족 전사가 낮은 톤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의 뒤에 있는 얼음 수정에서 날카롭고 긴 손톱이 달린 거대한 손이 불쑥 나와 단숨에 그의 허리를 붙잡은 것이었다. 눈을 닮은 흰 색에 어떠한 잡티도 묻어있지 않았다. 드래곤처럼 비늘이 질서정연하고 촘촘하게 박혀있는 손은, 윤기가 흐르고 겉으로 보기에 깨나 단단해 보였다.
[퍽!]
“제길.”
역시 단단했다. 쿼터 엘프가 다리를 높게 들어 올렸다가 힘차게 내려찍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 이런.”
낭인족은 두 뒤꿈치를 땅에 곽 대고 버텼지만 천천히 뒤로 끌려갔다. 쿼터 엘프와 인간 남자가 동시에 달려들어 하얀 용린수(용의 비늘이 덮인 손)를 붙잡았지만 그들까지도 그물에 걸린 물고기마냥 끌려갔다.
“비켜라.”
시아가 앞으로 나서자 쿼터 엘프와 인간이 물러섰다. 그녀의 손에는 바르베리트 후작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파혼감-니이드-가 쥐어져 있었다. 혼을 부수는 검. 악마족 전용검이다. 그녀의 파혼검은 높은 살상력을 자랑하는 플랑베르쥬의 모양을 취하고 있었다. 파도처럼 잘게 굴곡진 칼날이 그녀의 마력을 얇게 코팅되어 파괴력이 더 올라갔다.
[서걱]
그녀의 파혼검은 하얀 용린수를 통과했지만 베는 소리는 정확하게 났다. 낭인족을 쥐는 악력이 약해졌고 더 이상 움직이지도 않았다. 파혼검에 잘려 지옥과 같은 고통을 맛본 정체모를 영혼이 겉껍데기를 두고 도망친 것이었다. 덕분에 낭인족은 제 힘으로 굵은 손가락을 하나씩 풀어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용린수는 얼음 수정에 매달린 채 덩그러니 남았다. 손을 어정쩡하게 핀 채 가만히 있었다. 박제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밀리엄이 시험 삼아 시아가 검을 댄 곳을 노리며 걷어찼다. 그랬더니 눈으로 만든 조각상이 부서져 나가듯이 우두둑 떨어졌다.
“설마 이게 얼음의 대지가 한 짓일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시아는 밀리엄에게 일부러 애매한 대답을 했다. 그녀가 밀리엄 일행을 기다리면서 우연히 글라셰 순종을 보지 않았다면 얼음의 대지의 소행으로 확실했을 것이다. 게다가 낭인족이 붙잡힐 즈음에 인기척을 느껴서 의심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늘었다.
“보스.”
30대 초반의 인간 여성이 다급한 목소리로 시아를 불렀다. 그녀 역시 하얀 용린수에 붙잡혀 발버둥 쳤다. 두 팔까지 같이 붙잡힌 것도 문제였지만 그녀는 천연 마법계라서 낭인족처럼 버티지 못했다. 바른 속도로 끌려갔다.
“쉬츠(Schutz : 보호막)”
[챙강!]
용린수를 자르기엔 여유가 부족했다. 시아는 파혼검을 검은 마기로 감사 물질을 벨 수 있도록 만든 다음에 붙잡힌 길드원을 보호막으로 감쌌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단번에 용린수가 나온 얼음 수정을 두 동강 냈다. 그 장면을 본 길드원들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마력이 가득 농축된 검기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얼음을 쉽게 잘랐다. 아마도 그녀도 검이 가장 손에 익은 무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붙잡힌 길드원은 더 이상 끌려가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길드원들이 손가락을 펴주기 위해 접근하는 것을 시아가 가로막았다. 곧이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보호막의 씌어졌다.
[슈악! 후두두두두두둑]
매끈하게 잘린 수정의 단면에서 투명한 붉은 피가 솟아올랐다. 높게 솟아 오른 피는 분수처럼 온 방향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했다. 시아가 만든 보호막은 우산대용이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진한 피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후각이 예민하거나 비위가 약한 이가 맡으면 구역질이 날 만큼 불쾌한 냄새였다. 수많은 시체를 만들며 피의 웅덩이를 밟는 그들에겐 익숙할 따름이었다. 항상 보는 것은 썩은 피, 검붉은 피, 묽게 붉은 피. 이토록 투명한 선홍색의 피는 ‘깨끗하다’라는 이미지를 부여할 뿐 공포나 경멸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피를 뒤집어쓰는 게 일이지만 이렇게 비를 맞는 건 처음이야.”
“그러게. 나쁘지 않아.”
“신선한 경험이군.”
길드원들은 고개를 들어 쏟아져 내리는 가는 핏줄기를 감상했다. 적을 베고 잔뜩 튀는 걸쭉한 피를 뒤집어 쓸 때와는 달랐다. 그들은 이 색다른 경험을 만끽했다. 눈과 얼음 조작이 섞인 지상이 점점 붉게 물들고 그 빛을 거울처럼 비추는 얼음 수정이 점점 늘어가는 와중에도 혐오감을 느끼지 않았다. 주변에 가득 찬 맑은 붉은빛 정도야, 굳이 따지자면 ‘아름다운 고요’정도였다.
“때 묻지 않은 아이라도 이 정도로 피가 깨끗하지 않을 거야.”
“헹. 피는 종족을 가르는 가증스런 기준이야. 갓 태어난 녀석의 피가 가장 깨끗하다는 속설은 노인들을 욕하기 위한 거짓이지.”
낭인족의 말을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가디안스에 가입하기 전에 살인귀로 통했던 쿼터 엘프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태어난 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은 아기나 죽을 날이 며칠 남지 않은 노인이나 같았다. 피의 농도, 탁도 전부 거기서 거기였다. 수많은 생명체를 죽여 수없이 피를 봤지만 피는 역시 피였다. 같은 종족이면 같은 피가 흘렀다. 그런 그녀도 수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처럼 투명하고 맑은 피는 처음 봤다.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피가 버젓이 존재했다. 그녀는 새로운 피를 본 환희 때문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강한 자극이었다.
피의 물줄기가 약해지고 수정의 표면을 따라 흐르는 정도가 됐다. 보호막이 거둬지자마자 용린수에 가까이 있던 길드원들이 핏물을 밟으며 인간 여자에게 다가가 그녀를 구속에서 풀어줬다. 손가락 하나하나를 풀 때마다 빙산에 금이 가듯이 갈라지더니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그 바람에 핏물이 튀어 근처에 있던 자들의 하의에 혹은 일부 상의에 붉은 물이 묻었다. 하지만 그들은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피를 묻힐지도 모른다. 묻힐 것이다. 묻을 것이다. 피를 묻힌 채 돌아다니는 건 신경 쓸 거리가 못 됐다.
“일이 재밌게 됐어.”
길드 가디안스의 보스가 무뚝뚝한 얼굴로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곧이어 그들에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시선이 자동적으로 위를 향했다.
“천사?”
“그냥 천사가 아니야. 세라핌이라고.”
“우리 말고도 방문자가 있었나 보네.”
세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그들을 지나 북쪽을 향해 날았다. 북쪽은 얼음의 대지의 밖으로 나가는 최단 거리이자 가디안스의 선발대가 거쳐 온 길이었다. 문제는 그의 정체였다. 천사 9계급 중에서 제 1계급 세라핌이었다. 천상계에서도 귀한 보호를 받는 계급이거늘 혼자 험한 대지에서 날아다닌다는 건 상식 밖의 일이었다.
“보-스. 뭐가 재밌다는 거야?”
“신을 제외하면 최고의 방관자가 천사잖아.”
“그런데?”
“방관자가 태초의 대지에 나타났어. 하지 않을 ‘개입’을 한 셈이지.”
“뭔가 있구나.”
“그래. 뭔가 있어.”
시아는 여전히 무관심한 표정으로 천사가 날아온 남쪽을 바라봤다. 밀리엄은 호기심이 쭉쭉 올라갔다. 좀 더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대가 그를 사로잡았다.
“그보다는 보스. 갑자기 누구 한 명이 사라져도 전혀 모를 것 같습니다. 천지에 얼음 수정이 깔렸잖습니까.”
“그래서 말했잖아. 먹힌다고.”
짧지만 강했다. 시아에게 말을 건 인간 남자는 먹힌다는 사실이 아닌 먹힌다는 보스의 단호한 말에 더 두려움을 느꼈다.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담한 발언을 하는 보스 자체가 두려웠다. 보스가 원래 그런 인물이지만, 알고 있지만, 역시 보스답게, 보스 특유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죽음보다 보스가 더 두려웠다. 악마이기 때문에? 아니다. 이건 타고난 개인의 포스였다.
“걱정 마. 보스가 확실하게 본보기를 보여줬으니까 함부로 우릴 덮치지 않을 거야.”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부하의 속을 꿰뚫어 본 밀리엄이 그를 안심시켜줬다. 거기에 장난이 덧붙었다.
“그래도 궁금한 걸. 한 번 잡혀볼까? 새로운 곳으로 인도될 지 누가 알아.”
“캡틴!”
“여, 격렬한 반응이군.”
다른 길드원들도 발끈했다. 솔직히 캡틴 브롤과 같은 생각을 해봤지만 얼음의 대지에 대해 한참이나 무지한 상태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건 무진장 위험하기 때문에 함부로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철없는 캡틴이라지만, 그들의 ‘캡틴’이었다. 무모한 도전을 솔선수범하는 건 절대 사절이었다.
“아마…….”
시아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밀리엄은 이때다 싶어서 그녀에게 가까이 붙었다.
“보스. 무너가 짐작 가는 깜짝 이벤트라도 있어?”
“깜짝 이벤트는 아니고, 초기화?”
“초기화?”
모두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두세 개씩 띄울 때 사이킥 엘프가 손가락을 ‘딱’ 퉁겼다.
“얼음의 대지 밖으로 워프 되는 군요.”
“알아듣는 녀석이 있었네. 뭐,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물음표가 한 순간 느낌표로 바뀌었다. 말이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팔짱을 기고서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눈을 빛내며 호기심이 극도로 오른 이는 밀리엄 뿐이었다. 그의 생각을 알아챈 쿼터 엘프가 살기를 풍기며 캡틴 브롤의 어깨에 손을 터억 올렸다. 밀리엄은 그녀가 ‘흐흐흐’ 웃는 입모양이 더 소름끼쳤다.
“나 아무 생각도 안 했어. 정말이야.”
“쓸데없이 일 만들었다간 캡틴 따위 포 떠버릴 거에요.”
“포……?”
“네, 포.”
살인귀의 살인 충동이 번쩍거렸다.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가 새빨간 공포의 상징보다 더 스릴있었다.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는 것이, 기가 센 여성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밀리엄으로서, 쿼터 엘프의 협박은 효과가 아주 좋았다.
잡담이 오가는 사이에 피로 물들었던 눈의 땅이 다시 새하얗게 변했다. 얼음의 대지가 자신의 피를 새하얀 눈과 투명한 얼음으로 바꿔 흰 대지를 유지했다. 누구도 대지를 다른 색으로 물들일 수 없다는 자존심처럼, 새하얀 대지야말로 얼음의 대지의 본성이라는 긍지처럼 하얗게 눈 내린 땅처럼, 붉은 빗자국은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
“생각보다 위험할지도 모르겠어.”
길드 가디안스의 보스는 순백으로 변하는 대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태초의 대지가 자신의 부하들을 공격하고 대놓고 적대심을 비치는 것을 보아하니 오래있기 그른 것 같았다. 오자마자 환영받지 못하는데, 재촉하는 만큼 빨리 일이 풀릴 지도 걱정이었다. 최악은, 아무런 수확도 없이 얼음의 대지에서 강제로 쫓겨나는 것이다.
“자, 가만히 있으면 쉽게 잡힌다고. 부지런히 이동해야지. 밤엔 불침번도 서야할 테고. 여기 있는 내내 바짝 긴장하고 있어.”
“Ja, für Sie, meine Boß."
힘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음 수정마다 음파가 반사되어 수정 표면에 자잘게 흔들렸다. 착시일까. 가늘게 떨리는 수정 표면에 가디안스의 선발대에 속하지 않은 자의 모습이 흐리게 보였다. 얼음 속에서 외부인을 흘겨보는 퀭한 눈동자. 아니면 외부인을 두려워하는 여린 눈동자일 수도 있다. 얼음의 대지가 내비친 잔상일까. 얼음의 대지에서 태어난 존재의 그림자일까.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친 영혼의 편린이 선발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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