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1. 이것은 가정교사히트맨리본 판타지입니다!
2. 커플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3. 팬소설에는 너무나 실력이 미약한 저인지라 졸작이 싫다 하신 분은 ‘뒤로’퍼튼이나 ‘백스페이스’를 살포시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4. 전에 쓴 중편 [환상곡]이 츠나요시 군 중심, [오페라]가 무크로 군 중심, [교향곡]이 히바리 군 중심이었다면, 이번엔 고쿠데라 군 중심입니다.
5. 타 사이트에서 장편 판타지 두 작품을 동시 연재하는 관계로 연재 속도가 늦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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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교황 하야토의 눈에 비친 붉은 불꽃은 세스피아를 송두리째 집어삼키고 있었다. 저 불꽃이 사그라질 때쯤이면, 심장이 뛰고 숨을 쉬는 생명체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는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허망한 눈으로 매정한 불길을 바라볼 뿐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크롬의 영혼도 뜨거운 화염 속에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그들은 누구도 구해내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두 시간 전. 바질과 따로 움직이게 된 교황은 세스피아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봉고레 대주교가 가르쳐 준 사실과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발견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것도 그 모순과 관련이 있다면 모순은 모순이 아닌 게 되고, 진실은 거짓이 되며, 허황은 실체를 갖는다. 만약에… 만약에 모순의 정체를 세상에 공표하면 이 세상은 혼란해지고 ‘혼돈의 침식’을 막을 길이 없어질 것이다. 공표하지 않아도 언젠간 이 세상은 혼돈의 침식에 당할 것이고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그 전에, 교황이 먼저, 진실이 침식되기 전에 진실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알아야만 했다. 세스피아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로 퍼진 이야기. 조그만 아기가 자라서 세상을 멸망시킬 이야기. 거짓은 진실이 되지 못해도 진실은 거짓이 될 수 있는 이야기. 교황은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철컥]
“누구냐.”
교황은 급히 발을 멈추고 총을 꺼내들었다. 순식간에 안전장치까지 풀었다.
“말보다 총을 먼저 꺼내시는 군요. 교황 예하.”
길을 가로 막으며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자는 처음 만나지만 낯익은 자였다. 교황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머리칼 색도 눈동자 색도 체격도 말투마저 똑같은 자신이 몇 발치 앞에 서있었다. 정말 봉고레 대주교의 말대로 세스피아에는 교황의 비밀이 숨어져 있는 것일까? 이 세계를 다시 한 번 죽은 자의 세계로 뒤덮을 수 있는 금기의 열쇠가 봉인되어 있을까? 심장이 욱신거리면서 괴로웠다.
“네가…… 코와토(壞人)인가?”
“예하께서 제 이름을 알고 계시다니 영광입니다. 아니, 반쪽이니까 당연한 건가? 하야토(隼人).”
교황과 꼭 닮은 그는, 태어나자마자 생이별한 쌍둥이 형제였다. 형 하야토(隼人)는 교황의 상징을 달고 태어나 모두에게 축복을 받았지만, 동생 코와토(壞人)는 죄인의 표식을 가지고 있어 탯줄이 마르기 전에 버려졌다. 그들의 누이, 비앙키가 몰래 숨기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면 죄인의 표식 덕분에 좀비들 손에 자랐을 지도 모른다. 하야토-지키는 자(본래 ‘용맹한 자’를 뜻하는 단어)-와 코와토-부수는 자-. 교황과 죄인. 빛과 어둠이었다. 교황이 성령력으로 산 사람을 구하고 있을 때 죄인은 흑주술로 산 사람을 죽여왔다.
“이 근방의 흑주술회를 이끄는 회장이 넌가?”
“이런. 누님이 약속을 어기셨나? 하야토 주제에 날 알 리도 없고, 내가 어디서 뭘 하는 지도 모를 텐데. 안타까워. 누님이 사랑하는 동생은 나 하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봐.”
이 쌍둥이는 비앙키를 대하는 태도까지 완전히 달랐다. 교황은 누이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썼는데 죄인은 누이에게 의지하려고만 했다. 그녀가 교황에게는 엄하게 대하고 죄인에게는 온갖 애정을 낯간지럽게 베풀었기 때문이리라. 여하튼 교황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자가 누이 타령하는 모습을 마주보자니 역겨웠다.
“이제 그만 해요. 사람들이 괴로워하잖아요.”
크롬이 둘 사이에 나타났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토록 구슬펐던가. 교황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무슨 소리야? 나와 함께 이 썩어빠진 세계를 지옥으로 내던지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로 했잖아.”
“당신의 정의는 잘못됐어요.”
“그래서 일부러 하야토에게 접근했던 거냐? 날 버리고? 정신 차려. 하야토는 일부러 내민 네 손을 뿌리치고 심지어는 널 죽였어! 그런데도 저 자식 편을 들 거야?”
교황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크롬과 죄인의 대화를 따라갈 수 없었다. 이제껏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믿고 있던 모든 것이, 의지하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당신은 죽은 자들의 왕이 아니에요.”
크롬의 한 마디에 죄인에게서 어둠의 오라가 피어올랐다. 섬뜩한 살기 덕분에 교황이 제정신을 차렸다. 그는 재빨리 붉은 성령력을 넓게 퍼트렸다. 크롬의 영혼도 교황이 만든 성령력의 결계 안에 들어갔다.
“난 이 세계의 왕이 될 몸이야. 내가 곧 정의야!”
죄인의 힘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졌다. 교황도 성령력을 급속도로 끌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만 해요. 육체가 무너질 거에요.”
“닥쳐. 왕을 거역한 종자는 필요 없어.”
교황은 죄인에게 다가가려는 크롬을 막아섰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쌍둥이이기 때문일까. 교황이기 때문일까, 저절로 알 수 있었다.―이미 미쳐 폭주하는 죄인을 막을 방법은 없다. 교황과 아주 반대되는 존재를 저지하려면 영혼까지 깨끗하게 소거하는 수밖에 없었다.
“크롬. 하나만 물어볼게. 나보다는 코와토를 먼저 알았지?”
“네. 저도 세스피아 출신이니까요.”
지금까지 교황이 알고 있는 본인의 고향은 세스피아가 아니었다. 교황청에 들어가기 전의 모든 기억을 강제 삭제 당해서 어떤 풍경도 떠오르지 않지만 비앙키 주교가 가르쳐준 곳은 절대 ‘세스피아’가 아니었다. 의심스러웠다. 교황은 여태껏 전부 세스피아에서 태어났다. 그곳이 과거 태초의 에덴동산이기 때문에 교황의 상징을 가진 존재는 모두 그곳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현 교황만 세스피아 출신이 아니라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봉고레 대주교는 분명히 기억했다. 그가 아직 대주교가 아닐 때, 새로운 교황이 태어날 거라는 소식을 듣고 세스피아로 직접 찾아갔다. 교회 내부의 최고위층만 모여 있었다. 그는 몰래 숨어서 기이하게도 불안한 상황을 지켜봤다. 여느 교황이 그랬듯이 세스피아의 고목에서 꽃이 핀 후 교황의 상징을 가진 아이가 태어났다. 그런데 죄인의 표식을 가진 아이도 같이 태어났다. 봉고레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전에 막 태어난 아이를 숲 속에 버리는 충격적인 장면까지 목격했다. 아이의 누이, 지금의 비앙키 주교가 몰래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는 것을 발견하고는 뒤를 밟았다. 눈치가 빠른 그녀에게 들킨 후, 철저하게 입막음 당했지만 그 역시 죄인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소문낸다거나 교회 상층부에 알릴 생각이 없었다. 죄인이라도 동생이다.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대주교가 된 봉고레는 흑주술회를 조사하던 중에 죄인이 흑주술회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엘라일이 아닌 세스피아가 흑주술회와 관련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예하. 아세요? 세스피아는 에덴동산. 교황만 태어나는 곳이 아니라 죄인도 태어나요. 교황도 죄인도 에덴동산에서밖에 태어나지 않아요. 이 세상의 시작인 이곳은 축복받은 땅이자 저주받은 땅이니까요. 저도 죄인이에요.”
크롬은 주술로 가렸던 왼쪽 팔뚝의 죄인의 표식을 교황에게 보여줬다.
“그런 건가…….”
교황 하야토는 교황과 죄인의 의미를 깨달았다. 강한 성령력을 타고나 성령력을 쓸 수 있는 자들의 우두머리가 될 자가 교황이고, 속칭 죄인의 힘이라는 초고밀도 흑주술을 타고나 모든 흑주술사의 우두머리가 될 자가 죄인이다. 크롬이 구울을 부리는 힘이 남달랐던 것도 그녀가 세스피아에서 태어난 죄인이기 때문이었다. 요 근래 빛에 대한 저항력이 강한 구울이 출현한 것도 죄인이 세스피아에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죄인이 고향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교황의 얼굴에 강한 의지가 드러났다.
“네가 내 반쪽이라도 사람들을 괴롭히고 구울을 늘리는 짓은 용서 못 해.”
“하야토 주제에 날 이길 수 있겠어? 무지한 바보는 얌전히 바티칸에서 꼭두각시 행세나 하라고.”
교황의 힘과 죄인의 힘이 거세게 맞부딪혔다. 성령력이라 해도 과하면 파괴하는 힘이 되는 법. 주변에 알게 모르게 숨어 있는 생명체들이 두 힘에 휘말려 죽어나갔다. 그 사실을 자각한 교황은 무용한 신경전을 그만두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죄인의 힘은 지치지 않고 계속 강해졌다. 그런데 그의 뒤에 어두운 그림자가 하나둘씩 늘었다. 썩은 내도 점점 짙어졌다.
“구울을 불렀군.”
다섯 명, 열 명, 스무 명…… 수가 계속 늘었다. 교황의 반쪽 되는 그는 죄인 만이 가진 능력, 바로 구울을 지배하는 능력을 무한정 사용했다. 교황은 이를 악물었다. 저 정도의 시체를 자연히 구할 수 없다. 구울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산 사람을 죽인 것이 틀림없었다. 목숨을 사소히 여기는 그의 태도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교황 예하. 제가 구울을 재울 게요.”
“가지 마.”
자동적으로 크롬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영혼뿐인 그녀는 아주 쉽게 빠져나갔다. 그녀를 볼 수 있고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으면서 그녀를 구속하지는 못했다.
크롬은 거칠게 격돌하는 두 힘의 틈새를 약한 곳만 골라 용케 지나갔다. 죄인은 교황에게 온 시선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 탈 없이 그를 지나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곧 공중에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죄인의 등 뒤에서 퀭한 눈을 하고 몸을 흐느적거리며 다가오는 수많은 구울이 그녀를 가슴 아프게 했다. 아무래도 세스피아의 전 주민이 구울이 된 것 같았다. 얌전하고 조용한 성품의 소유자가, 슬픔과 외로움 그리고 괴로움 외에는 감정을 느껴본 적 없는 그녀가, 처음으로 분노를 경험했다. 가슴 속 슬픔이 그녀를 사정없이 짓누르는 바람에 그 반발력으로 분노가 터졌다.
“코와토……. 당신 완전 저질이에요. 어떻게 이런 짓을…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녀의 힘까지 거대하게 방출되면서 힘의 균형이 무너졌다. 죄인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먼저 힘을 거뒀다. 그가 얌전해지자 교황도 크롬도 더 이상 힘을 쓰지 않았다. 과도한 힘 때문에 주변 동식물이 전부 생기를 잃었다. 죄인의 눈에는 그러한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에게 복종할 구울 군대뿐이었다.
“언제 저렇게 많은 수의 구울을……. 이 세상을 진짜 지옥으로 만들 셈이야?”
이제 교황에게도 죄인의 뒤에 있는 수백의 구울이 보였다. 아주 드물게 육체 손상이 심한 것도 있었지만 대개 겉모습이 멀쩡했다. 죽은 지 하루도 안 된 새로운 시체 같았다. 그것도 타살, 자살이 아닌 자연사한 모습이었다. 세스피아에서 나고 자라기까지 한 크롬은 그들이 세스피아의 주민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죄인이라는 것을 들키는 바람에 주민들 손에 쫓겨났지만 그들을 원망하기는커녕 동정했다. 죄인 코와토의 욕심을 위해 단체 희생된 그들을 향한 애도의 마음이 커졌다.
“저들은 이고, 세스피아의 주민, 에덴동산을 지키는 사명을 자긍심으로 살아온 이들이에요.”
“세스피아의…… 주민?”
교황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의 군대를 본 소감이 어떠신가? 교황 예하. 나만을 위해 준재하고, 나만을 위해 싸우고, 내가 살아 있는 한 절대 쓰러지지 않을 무적의 군대가!”
광기. 죄인은 눈동자가 흰자위에 파묻힐 만큼 눈을 최대한 크게 떴다. 입은 양옆으로 길게 찢어 나란히 박혀 있는 치아가 송곳니 다음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어금니까지 보였다. 교황은 자신과 똑같이 생긴 반쪽을 보면서, 자신도 미치면 저런 모습일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그러면서 누이 비앙키가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당신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저질러선 안 돼는 금기를 깼어요.”
“내가 가진 힘을 내가 쓰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봐. 신이 벌을 주지도 않아. 대체 금기는 누가 만든 거지? 애초에 선과 악을 나눈 건 누구지? 누가 기준을 정한 건데? 다 힘없는 인간들이 권력자를 죽이기 위해 만든 바보 같은 구세대 유물이라고. 내가 부조리한 이 세계를 부숴버리겠어.”
“불쌍하군.”
교황은 죄인의 힘찬 연설을 가만히 듣다가 딱 한 마디를 던졌다. 그의 붉은 성령력이 엷고 넓게 퍼져 주변을 따뜻하게 안았다. 죄인도 크롬도 교황의 힘에 반발하여 죄인의 힘을 낼 수 없었다. 수많은 구울은 몸을 흐느적거리더니 차례차례 쓰러졌다. 교황은 힘을 계속 방출하면서 오른팔에 있는 교황의 상징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타버릴 것만 같았다.
“선이면 어떻고 악이면 어때. 잘 살면 그만이야. 난 구울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 구울이 없으면 구울 헌터는 뭘 해서 벌어먹고 살지? 교회의 강경파는 무슨 재미로 살지? 그들은 절대 불필요한 요소가 아니야. 지금 내가 증오하는 건 구울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사람을 죽이는 네놈이다.”
죄인은 의지가 강한 두 눈동자에 밀려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기 싸움에서 본인이 밀릴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의 표식을 갖고 죄인으로서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그들이 저지르는 모든 악향은 악업의 기록에 남지 않는다. 좋게 말하면 죄를 저질러도 다 용서되는 특혜를 갖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고난 특별한 힘으로 강한 구울을 만들거나 구울을 직접 지배해도, 지상의 인간들에게는 심히 미움을 사지만, 하늘은 죄를 묻지 않는다. 하지만 죄인이라도 범해서는 안 되는 금기가 있다. 죄인의 힘으로 사람을 죽이지 말 것. 죄인의 힘은 시체로 구울을 만들고, 구울을 조종 지배하는 힘이다. 죽은 자를 대상으로 하는 힘이거늘, 그것을 이요해서 산 자를 죽이는 것은 하늘도 용서하지 않는다. 교황은 산 자들의 지도자, 죄인은 죽은 자들의 지도자이니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교황 하야토는 조용히 서브머신 건을 들어 죄인을 향해 팔을 뻗었다. 망설였다. 누이가 살리고 지금까지 보살핀 또 한 명의 형제다. 오늘 처음 만났지만 남이 아니라 쉽게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물러.”
그 사이에 죄인은 구울에 다시 힘을 부여했다. 대지를 딛고 일어선 구울은 죄인의 앞에 총알받이로서 일렬로 늘어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살아있던 자들이다. 평소에 구울을 죽이는 것과는 마주보는 느낌이 달랐다. 구울을 시체로 되돌릴 뿐인데 왠지 사람을 죽이는 것 같았다.
[탕]
[탕]
구울의 틈새로 죄인이 총을 쐈다. 교황이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총을 쏘지 않았다면 죄인의 총알을 막지 못하고 그대로 머리를 관통 당했을 것이다.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구울들이 교황을 향해 달려들었다. 교황은 서브머신 건을 자동 연사 모드로 고치고 이를 악 물었다. 쏘기 전에 언뜻 크롬의 슬픈 표정이 보였다.
“신이시여, 억울하게 죽은 저들을 사랑과 자비로 감싸 안아 주소서. 아멘.”
[타다다다다다다다!]
구울은 성령력이 응축된 총탄을 맞고 시체로 돌아가 땅 위로 쓰러졌다. 교황은 곧장 죄인에게로 달려가 길고 단단한 총신으로 얼굴을 있는 힘껏 갈겼다. 그는 그대로 내동댕이쳐지고 주인을 구하기 위해 개미떼처럼 몰려든 구울 무리는 교황의 성령력에 압도당했다. 크롬은 교황의 뒤를 쫓아다니며 시체에 남아있는 죄인의 힘을 제거했다.
[철컥]
교황은 죄인의 왼쪽 관자놀이에 총구를 붙였다. 금기를 어긴 죄, 죽음으로 갚아야겠지만 도무지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표정 값 못하는군.”
[뻑!]
“욱.”
죄인은 교황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역전. 죄인은 헤실헤실 웃으면서 이마 정중앙에 총구를 가까이 가져갔다.
“아까 그 표정, 정말 좋았어. 그런데 안 어울리게도 행동이 너무 물러.”
교황의 굳은 결심으로 가득 찬 표정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적당히 주름 잡힌 미간과 번뜩이는 눈동자. 그리고 굳게 다문 입에서 망설임이 생기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투였다.
“안 돼요.”
크롬이 두 손으로 총신을 꼭 쥐고 힘껏 밀어 총구의 방향을 바꿨다. 그녀는 두 눈을 꼭 감고 몸을 가늘게 떨었다. 죄인은 인상을 잔뜩 구기고 팔을 휘저었다. 크롬은 잠깐 그에게서 떨어졌다가 다시 들러붙었다. ‘비켜’, ‘안 돼요’의 실랑이가 계속되는 동안 교황은 자세를 고쳐 잡고 죄인을 향해 총을 들었다.
“지금 당장 네가 만든 모든 구울을 수거하고 다시 사체로 돌려놔.”
“누구 좋으라고 그런 짓을 해?”
“코와토. 당신이 만든 구울은 모두 잘못 됐어요.”
“너도 별 수 없군. 같은 죄인이라 다른 녀석들하곤 다를 줄 알았는데. 역시 저 놈한테 붙었어.”
교황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욱신거렸다. 분노에 찬 목소리가 그토록 쓸쓸하게 들릴 수 없었다. 죄인 코와토도 외로웠구나. 혼자 죄를 짊어지고 고립된 삶을 살았구나. 교황이든 죄인이든 고독하게 사는 건 똑같구나. 하지만 이 동정심 때문에 그를 놓아줄 수 없었다. 죄에는 죄에 맞는 책임을 져야 했다.
“너의 이기심 때문에 에덴동산을 지키는 자들이 전부 죽었어. 너 스스로 혼자가 되는 길을 택한 주제에 누구 탓으로 돌리는 게야?”
그 때 죄인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는 피식 웃더니 총을 떨어트렸다. 시체를 밟으며 세스피아 쪽으로 몇 발자국 걸어가더니 주머니에서 소형 압축 폭탄을 꺼냈다. 그리고 서스름없이 그 자리에서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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