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Mutation-Kimera(리메이크)

Mutation - Kimera : 제 5 각성 ③

★은하수★ 2009. 12. 27. 14:01

길드 크루세이더의 보스, 클러치 사마엘이, 시아가 로키의 보물의 주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두 달이나 지나서였다. 길드 에덴이 퍼트리는 약은 아직도 문제고, 최대 피해자인 길드 크루세이더는 이렇다 할 일을 하나도 해내지 못했다. 그러는 중에 염장 지르는 소식이 전해지니, 펜타곤 때문에 날카로워진 신경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고 말았다.

“보스. 크루세이더가 다시 보스 비상 체제에 들어갔어요.”

“무스펠 실험을 준비한다는 플루는 긴장감만 남기고 여태 무소식이니까 혼자서 전전긍긍했나보지? 생각보다 도화선이 짧은데?”

사마엘이 아무리 자기네 지부를 두 군데나 완전 박살내고 죄 없는 민간인을 수백 명 학살해도, 길드 가디안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정도 소규모 난동이야 다른 곳에서도 공공연하게 일어나는 세계다. 일일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 피곤할 뿐이다. 가디안스에게만 피해가 없고, 펜타곤이 직접 얽힌 일만 아니면 된다.

“그나저나 수룡왕의 표정은 볼만 했어요.”

“응. 사진으로 찍어둘 걸 그랬어. 기분 꿀꿀할 때마다 보면 효과 좋을 텐데, 아까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진짜 아깝긴 아깝네요.”

시아에게 한 번 호되게 당했던 수룡왕이 다시 시비를 걸었다. 이번에는 시아를 직접 자극하지 않았다. 사건의 시발점이었던 크림슨을 기습했다. 다행히도 크림슨은 마침 진격 부대 대원 세 명과 같이 있었기 때문에 기습 속에서도 가벼운 부상만 입었다. 그들만으로도 충분히 수룡왕을 방어할 수 있었지만 다시 길드 가디안스를 자극하는 그가 괘씸해서 곧바로 보스에게 호출했다. 그 즉시 시아가 이를 바드득 갈며 모습을 보였다. 왕의 반지와 사안의 반지를 당당하게 끼고 다니는 중이라, 마침 잘 됐다 싶어서 수룡왕을 사안의 반지의 첫 희생물로 삼았다. 수룡왕이 로키의 마력을 고스란히 경험하고 황급히 도망치는 모습이 상상이 되는가? 말 그대로 가관이었다. 거대한 드래곤의 몸으로 경악한 표정을 짓고서 꼬리가 바삐 흔들릴 만큼 뒤뚱뒤뚱 도망쳤다. 그 자리에 있던 가디안스의 일원은 배꼽잡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용왕 이미지 실추. 자격 박탈 조건이잖아.”

“그런데 수룡왕이 바뀌었다는 소식은 없네요.”

“내 말이.”

중요한 서류에 서명하는 시아의 손놀림이 거칠었다. 의외로 종이가 빳빳해서 필요 이상의 힘이 가해진 날카로운 펜촉을 견뎠다.

“보스-.”

밀리엄이 문 앞에서 서류 하나를 건들건들 흔들어 보였다. 시아가 가져오라는 손짓을 하자 서류만 시아 앞으로 날아갔다. 서류에 붙어있는 라벨의 색은 정보 부대의 것이었다.

“스승님께서 브롤 씨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도 있네요.”

“바쁠 땐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잖아. 지금 제 2천왕 쪽은 말도 못하게 바빠.”

밀리엄이 사뭇 진지했다. 웬만해선 볼 수 없는 진지함이었다. 길드간 충돌이 있을 때나 SS급 위험 임무를 맡았을 때 정도나 그의 굳은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스마일 맨이 웃지 않을 때 그 일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 가볍게 추측하면 곤란하다.

“크루세이더한테 정신 팔 틈이 없군. 에덴이 테러를 선포했어. 이제 우리도 전면전으로 간다.”

시아가 서류를 책상 위에 가볍게 던졌다. 그런 것 치고 그녀의 분위기는 가볍지 않았다. 마력이 옅은 오라를 그렸고, 살기가 기체 드라이아이스처럼 바닥을 따라 무겁고 낮게 흘렀다. 그리고 블랙-레드 오드아이가 날카로운 카리스마를 머금었다.

민이 서류를 훑어보는데 끝까지 읽지 않았다. 중간까지만 제대로 읽고 나머지는 대충 훑었다. 그래도 서류의 내용을 전부 파악할 수 있었다. 길드 에덴의 만행이 열거된 서류를 끝까지 제대로 읽으면 자신도 감정적으로 날카로워질까봐 가급적 자제했다.

키메라끼리 엉겨 붙어서 새로운 괴물을 창출하는 약이 쥐도 새도 모르게 빠른 속도로 유통되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괴물들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다니는 것도 나름의 파급효과로써 골치 썩는 문제였다. 그런데 그 괴물의 수가 최근 며칠 사이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거대 도시 하나를 단 한 시간 안에 초토화할 수 있을 정도의 군대였다. 재미있는 건, 지능이 존재하지 않은 고기 덩어리들이, 길드 에덴의 길드원이라면 그 자의 명령을 뭐든 충실하게 따른다는 것이다. 즉, 길드 에덴은 자신들의 손을 직접 더럽히지 않고 세계를 파괴할 수 있었다.

“전면전……. 살육을 허락하는 건가?”

밀리엄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시아가 사마엘에게나 보이는 최고 경멸의 눈으로 저 먼 곳에 있는 길드 에덴을 노려봤기 때문이다.

“그래. 어차피 해독제가 존재할 수 없는 독이고, 녀석들은 평범한 살덩어리야. 거리낌 없이 죽일 수 있잖아. 조종하고 있는 에덴 녀석이 있으면 그 역시 가차 없이 죽여. 길드의 시조? 길드 세계의 영광? 어찌 됐건 녀석들도 하나의 길드고, 세계의 해충이야. 눈에 거슬리는 벌레는 제거한다. 눈에 보이는 즉시 제대로 짓이겨버려.”

“Ja, für sie, meine Boß."

제 1천왕과 제 3천왕은 허리를 절도 있게 굽혔다. 아무 생각 없이, 진짜 홧김에 내뱉은 말 같지만 엄연히 보스의 고귀한 명령이었다. 이 즉석 명령은 두 명의 사천왕에게 말로 전달되는 것과 동시에 텔레파시를 통해 가디안스의 길드원 전원에게도 전달됐다. 다스 엔데에서 죽은 듯이 대기하고 있는 휴도, 크루세이더 내에서 츠뵐프 리터로 있는 솔리도 보스의 목소리를 들었다. 오랜만에 듣는 그 목소리는 여전히 기품 있고 당당하면서도 강렬했다. 그들은 가디안스의 아지트를 향해 충성의 말을 조용히 내비쳤다.

“길드 에덴이 우리를 향해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하면 우리가 불리할 거에요.”

“이길 자신이 없는 건가? 암살 부대와 특수전투 부대의 총대장씨. 널 키메라로 만든 가이스 공작이 붉은 달을 보며 한탄하겠어.”

“그 자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건가요? 이미 죽은 자가 무얼 알고 무얼 한탄하겠어요? 그런데 오랜만에 그 이름을 들으니까 속이 확 뒤집히는 것 같네요.”

뱀파이어 중에 뱀파이어 세계를 쥐락펴락 하는 일곱 명의 공작이 있다. 그 중 한 명이 가이스. 가이스 가의 뱀파이어 중에서 지식과 잔혹한 지성을 풍부하게 겸비한 자가 공작이 된다. 공작이 된 가이스 가의 뱀파이어는 이름을 잃고, 순수하게, 고귀한 성과 작위만으로 불린다. 다음 공작이 정해지거나 죽을 때까지 ‘가이스 공작’으로 불리는 것이다. 민을 키메라로 만드는데 크게 일조한 선대 가이스 공작은 그 날이 생애 마지막 날이 됐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다. 민은 시아와 마찬가지로 순종의 심장을 먹어 키메라가 된 케이스다. 시아가 악마계 바르베리트 후작의 심장을 먹을 때 민은 뱀파이어계 가이스 공작의 심장을 먹은 것이다. 그리고 둘 다 마력 충돌에 의한 쇼크를 버티고 키메라가 됐다.

민은 가이스 공작과 딱히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하급 뱀파이어 다섯 명에게 오성 의식을 받아 키메라가 된 민의 부친이 가이스 가의 사병으로 일했던 것을 계기로 얕은 관계를 가졌다. 그런데 민의 눈에는 얕은 관계가 아니었다. 가이스 공작이 시시콜콜 사적인 일에 시비를 걸고 자기 뜻대로 했다. 부친이 독립하고 작은 길드를 생성한 뒤에도 가이스 공자그이 간섭이 계속 됐다. 부끄럽지만, 민에게 전투법을 가르친 첫 스승이 바로 그였다. 일주일에 두 차례 꼬박꼬박 방문하면서 민에게 억지로 지식을 주입했다. 민은 괴로웠다. 죽을 만큼 싫었다. 도망쳐도 늘 붙잡혔다. 자유롭지 않은 평범한 나날이 잘 흘러가고 있는 중, 불청객이 모든 것을 깨부쉈다. 가이스 공작이 방문하지 않는 날이라는 것을 알고 온 클러치 사마엘과 원 세훈이었다. 쑥대밭이 됐다. 민은 아무 힘없는 순종 인간이었으면서 혼자 살아남았다. 이틀 뒤에 멀쩡한 얼굴로 나타난 가이스 공작에게 냅다 주먹을 날리고 아는 욕을 처절하게 전부 퍼부었다. 가이스 공작이 민의 부친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시체를 보며 무한히 슬퍼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달았지만, 당시 정신이 성숙하지 못했던 민은 책임지라며 윽박질렀고 가이스 공작은 그의 말대로 책임을 졌다. 필요할 때 곁에 없었던 죄에 대하여 그 값을 치렀다. 민은 그 날 가이스 공작에게 책임을 들먹이며 몰아붙인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공작 되는 자에게 칼을 들이대고 그의 심장을 거리낌 없이 먹어치운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맨 처음 손에 묻힌 피가 가이스 공작의 것이라는 사실을 혐오하거나 경멸하지 않았다.

“보- 스-. 제 1천왕의 말이 맞아. 길드 에덴이 세상 밖으로 완전히 드러나면 우리가 불리해.”

제 3천왕 밀리엄 브롤은 주변에서 혹시나 엿듣고 있을지도 모를 길드원을 의식하여 낮은 톤으로 진지하게 그가 보는 현실을 말했다. 길드 에덴이 정체를 감추고 침묵 속의 존재라지만 그렇다 해서 타 길드와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디안스의 진격 부대 중에서 선발된 네 명이 거쉬티른(das Gestirn : 별)의 계곡에서 2급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중에 에덴 소속 길드원 한 명과 충돌한 일도 있었다. 그 때 진격 부대 네 명이 에덴 소속 한 명에게 처참하게 당했다. 간부도 아닌 일개 길드원에게 꼼짝 못했다. 와인드급 다크 엘프-다크 드래곤 키메라. 상대가 너무 나빴던 것도 기분이 상한데, 그 정도 실력자가 간부가 아니라는 것도 기분이 불쾌했다.

“표면적으로 알려진 에덴의 규모가 어떤지 알아?”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우리도 소수 정예지만 그들보다 수가 많으니까 규모로 밀어 붙이자는 거야?”

“2500. 크루세이더랑 맞먹어.”

밀리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미 알고 있던 민은 담담했다.

“2500? 보스. 에덴은 초기 때부터 줄곧 소수 정예였다고. 기껏 해야 100명 될까 말까야.”

“어제까지의 통계야. 에덴이 공식적으로 거대 살덩어리 괴물이 자신들의 군대라고 선언했거든. 현재 밖에서 보란 듯이 돌아다니는 살덩어리가 2400을 웃돌아.”

“난 또 뭐라고. ……. 그런데 그거 나름대로 성가시군.”

표정이 잠깐 밝아지는가 싶더니 다시 심각해졌다. 상대가 일단 길드 에덴이기 때문에 절대 만만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존재 자체만으로 모두에게 공포를 불어넣는 집단이니 어련하겠는가. 여기서 여유로운 건 시아밖에 없었다.

“야비하지만 에덴을 손쉽게 저지할 수 있는 카드가 있어. 그러니 그렇게 진지하게 굴 필요 없어. 안 어울려.”

시아는 오른 손 검지로 조그만 빛을 만들어 벌이 춤을 추듯 부드럽게 그림을 그렸다. 손이 심심하거나 잠깐 생각할 때 으레 나오는 버릇이었다. 네온 사인의 형광처럼 부드러우면서 자극적인 빛은 점점 글자를 만들어나갔다. das Trauerspiel. 펜타곤 중 피에로 스피의 이름이었다.

“지원과 세나를 이용할 생각이세요?”

“스피의 근거지를 알아냈지만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잖아.”

길드 가디안스의 초고위 간부 4천왕이라면 모두 펜타곤 스피와 길드원 2인과의 관계를 알고 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관용어를 만든 혈연관계. 정작 본인 2인은 모르는 이 관계가, 가디안스에서는 길드내외 어느 곳에서든 절대 누설하면 안 되는 1급 비밀에 속한다.

“4천왕씩이나 되는 녀석들이 그렇게 자질구레하게 걱정이 많아서야 어디 쓰겠어?”

시아가 무뚝뚝한 눈으로 민과 밀리엄을 훑어봤다. 두 간부는 무슨 그런 섭한 소리를 하냐며 반박했지만 시아의 귀에 닿지 못했다. 시아의 온 신경은 의도적으로 수많은 서류에 몰려있었다.

“보스. 딴 짓 하지 마세요. 길드 에덴에 맞대응하기 위해 정말로 스피를 끌어내실 거에요? 그것도 우리 애들을 미끼로 써서?”

“에덴과의 충돌이 불가피한 상황에, 더 좋은 타개책이 있으면 한 번 늘어놔 봐.”

블랙-레드 오드아이가 순식간에 날카롭게 빛났다. 그 눈빛은 민을 몰아붙이고 밀리엄을 선제 방어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보스를 억누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비굴하게 보일만큼 고개를 숙이고 연신 네, 네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에 대해 아는 바 없는 길드원을 그 고유의 신분을 높이 평가하여 미끼로 사용하는 행위는 이기적이고 비열하다. 두 간부는 이 말을 당당하게 하지 못했다.

“스피가 에덴을 싹 청소하는 만큼 손쉬운 방법도 없어. 펜타곤이 직접 나서는 모양 자체가 열렬하게 효과가 크다고.”

당연히 맞는 말이다. 하지만 스피가 미끼를 물지 않았을 때도, 경우의 수로서 생각해 봐야 한다. 시아는 그 때가 되면, 직접 맨 앞으로 나가 길드 가디안스의 사기를 높이고 가장 많이 그리고 정중하게 길드 에덴을 상대할 것이다. 그녀의 힘이 얼마나 큰 효과를 볼지 미지수지만 절대 에덴에게 밀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가급적 길드 가디안스가 전선에 나가지 않고 에덴이 결빙 혹은 붕괴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펜타곤 스피의 능력이면 충분히 가능하다. 아주 좋은 패를 갖고 있으면서 사용하지 않는 건 죄. 야비하고 비정할 수 있지만 세계의 흐름이 에덴 때문에 망가지고 있는 걸 감안하면 희생할 가치는 있는 패다.

“지원과 세나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미끼로 쓸 자신 있어?”

“없으면 말도 안 꺼내셨겠죠.”

“당연하게 대답하는 소년이 잔인하게 보이는 건 나의 착각인가?”

“저도 당연하게 알고 있는 제 자신이 싫어요.”

시아는 그들을 보면서 벙글벙글 웃었다. 결국 보스에게 굴복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고뇌하는 최고 간부 두 명의 표정은 혼자 보기 아까울 만큼 가관이었다. 디레스나 크리세이스가 이 자리에 있었어도 반응이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만약 스피가 기대에 응해주지 않으면 에덴과의 전쟁이 불가피해. 우리 말고도 크루세이더도 가만히 안 있을걸? 임시 연합을 형성할 가능성이 의외로 높다는 얘기지.”

“아.”

민과 밀리엄이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길드 에덴이 전면전 선언을 했지만 그것이 특정 길드나 지역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현재 에덴은 공공의 적이다. 분명 불순분자를 제거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공동 전선이 형성될 것이다. 민과 밀리엄은 이 당연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음이 부끄러웠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 단면만 생각했군.”

시아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이런 건 내가 스피 얘기를 꺼내기 전부터 눈치를 챘어야지.”

가볍게 던진 한 마디가 상당히 매몰차게 그들의 심장을 자극했다. 4천왕으로서의 자존심을 까득까득 구기고도 남을 만큼의 자극이었다. 시아는 그런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 왠지 모르게 즐거웠다.

마침 타이밍 좋게 제 4천왕 크리세이스가 들어왔다. 그녀의 왼손에는 얼굴이 잔뜩 상기된 멜로즈가 있었다. 크리세이스도 약간 화가 난 표정이었다. 속으로는 무지막지하게 화가 끓고 있다는 뜻이다. 아무튼 크리세이스는 멜로즈를 질질 끌고 들어와서 시아에게 오른손에 들고 있던 서류 다섯 부를 넘겼다. 후방지원 부대에서 특별 조사한 갖가지 것들의 완전판 결과물이었다.

“수고했어. 음. 둘이 왜 이 모양이냐고 물으면 누가 대답할 거지?”

“보스, 나…….”

“멜로즈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제 부족함에 스스로 환멸을 느낀 것 뿐입니다. 속히 시정하겠습니다.”

멜로즈는 순식간에 온몸을 덮친 한기 때문에 움찔거렸다. 시아는 대강 감을 잡았다. 100% 멜로즈가 크리세이스의 화를 부르는 용서 못할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이럴 때 시아는 간섭하지 않고-멜로즈를 구해주지 않고-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후-. 공주. 신의 딸을 화나게 하면 어떡해? 신의 분노는 엄청나다고.”

“나도 신족이다 뭐.”

“유사신족과 갓블르더 중에 강한 쪽을 택하라면 갓블러드를 택하겠어.”

“밀리엄 아저씨-.”

“혼날 건 혼나야지. 명복을 빌어, 공주.”

밀리엄은 멜로즈의 키에 맞춰 쭈그려 앉은 다음에 그녀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멜로즈는 울상을 짓지 않았다. 자기편이라곤 없는 이 상황에 불만을 갖고 양 볼을 크게 부풀렸다.

“얌전히 있어.”

크리세이스의 짧은 한 마디가 큰 효과를 발휘했다. 멜로즈는 그제야 자신이 처한 처지를 파악하고 몸이 경직됐다. 반항해선 안 될 상황을 구분하지 못하다니, 위험한 실수를 해버리고 말았다. 고개를 들어 크리세이스의 얼굴을 마주 볼 자신도 없었다. 손이 꽉 잡힌 상태라 도망칠 수도 없었다. 크리세이스에게 잘못했다고 빌기에도 늦은 것 같았다.

“지금 길드 전체가 바쁘단 걸 알면서도 정말 대담하군요, 프린세스 멜로즈.”

“그러게. 크리세이스가 요즘 유래 없이 무리하고 있는데, 공주가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리 갓블러드라고 해도 힘이 딸린다고.”

조용한 타이름 속에 잘 손질된 칼날이 무장되어 있었다. 멜로즈는 저도 모르게 크리세이스의 뒤로 빠지더니 그녀의 옷을 꽉 붙잡고 허리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으니까 자동적으로 보호자에게 손을 뻗는 것이다.

“휴-.”

크리세이스의 한숨이, 내장과 폐포 속의 공기를 모두 내빼는 마냥 길었다. 안에 쌓아둔 화를 긴 한숨으로 승화시키고 나니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멜로즈만 덜컥 겁먹고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미스 하갈. 차 한 잔 할래요?”

“아뇨, 괜찮습니다. 재윤이 돌아올 때가 됐습니다.”

크리세이스의 비서 겸 중화제 역할을 맡고 있는 재윤은 일주일간 출장을 가 있었다. 소수 정예라서 지부가 없는 길드 가디안스지만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은 많다. 이것이 재윤의 개별적인 담당사항이다. 다시 말하면, 재윤은 부동산의 현 상태를 살피러 정기 출장을 나간 것이다.

“보고서 하나가 더 늘겠네.”

그렇게 말하면서 시아는 방금 막 모든 서류 업무를 마쳤다. 그와 동시에 민이 끓인 따뜻한 레몬티가 그녀의 앞에 놓였다. 그녀는 행복한 표정으로 따끈따끈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집무실에 없는 자의 마력이 약하게 아른거렸다. 밀리엄의 부하가 밀리엄을 재촉하는 텔레파시였다. 밀리엄은 배실배실 웃을 뿐 답신을 보내지는 않았다.

“나 먼저 퇴장할게.”

어차피 디레스가 맡긴 서류만 전달하러 왔으면서 쓸데없이 오래 머물렀다. 에덴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기도 하지만, 밀리엄 스스로 본업에 돌아가는 것을 꺼렸다. 골치 아픈 일에 스스로 뛰어드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주의라서, 매사 미리 도망치거나 처음부터 안 한다고 박아두는 편이다. 그래도 일단 맡은 일은 끝까지 해내는데, 이번 일은 무진장 마음에 안 드나 보다.

“저도 나가보겠습니다.”

“잠깐만.”

시아가 크리세이스를 불러 세웠다.

“길드 에덴하고 전쟁을 할지도 몰라.”

시아나 크리세이스나 무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크리세이스는 잠깐 허공을 보다가 금방 시아에게로 시선을 되돌렸다.

“에덴이 자체적으로 전쟁을 유도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다른 길드에서도 에덴을 상당히 견제하던데,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에덴과 가디안스의 전쟁이 아니라 ‘에덴과 세계의 전쟁’ 쯤 될 겁니다.”

크리세이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이에 시아는 아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차를 마셨다. 거시적 상황판단은 사천왕 모두 뛰어나지만 우선순위를 매기자면 크리세이스가 1위다. 이번에도 그 기대를 져 버리지 않았다.

“맞아. 에덴이 무모하게 자체적으로 고립상태가 됐어.”

“짬짬이 준비해 두라는 말씀이십니까?”

“해석은 자유야.”

제 4천왕은 간단하게 목례를 하고 멜로즈를 데리고 나갔다. 그 다음에 시아와 민의 눈이 마주쳤다. 시아는 계속 웃고 있었다.

“순간 파악이 빠른 류 민과 거시 파악이 정확한 크리세이스 하갈을 비교하는 건 즐거워-. 이건가요?”

시아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민 스스로 알고 있다면 두 번 말할 필요가 없다.

“보스 지금 지나치게 여유로운 거 아세요?”

“너무 걱정하는 것보다 정신상 건강에 이롭지.”

길드 에덴의 만행 때문에 세계 전체의 스트레스 지수가 부쩍 오른 지금. 시아는 천상계의 제 3저인 마냥 느긋하게 세계 동향을 살폈다. 한 길드의 보스로서 보고서 등을 읽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현상을 조사 연구하는 학자처럼 모든 일을 대했다. 모두들 긴장 속에서 속이 타들어가는 중에 유독 시아만 여유였다. 강자의 자만? 그것과 다르다.

“스피를 끌어내겠다는 그 예기. 진심이신가요?”

“뭔 소리야? 알잖아. 난 폼으로라도 헛소리 안 해. 그런고로 당분간 지원이 스케쥴 비워 놔.”

“이 번만큼은 보스의 속을 모르겠어요. 에덴을 제압하고 싶은 건지 펜타곤을 견제하고 싶은 건지 애매모호하단 말이죠.”

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아의 오드아이가 빛났다. 민은 정곡을 찔렀구나 싶어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튼 넌 못 속여. 둘 다 목적이야. 이번 기회에 스피를 쥐고 흔들 수 있으면 펜타곤을 상대하는 내 입장이 확연히 달라질 거야. 플루와 페라이의 움직임이 둔화되고, 토드와 파인의 정식 등장도 늦춰지겠지. 그만큼 신정보를 얻어낼 수 있어. 좀 자만하게 말하면, 내가 펜타곤을 견제하던 관계가 펜타곤이 날 견제하는 관계로 바뀔지도.”

길드 가디안스의 목적은 ‘길드 크루세이더’의 견제다. 그리고 펜타곤을 상대하는 건 보스 시아다. 길드 크루세이더는 완벽한 기프테 폰 크로이추크(크루세이더의 독)를 완성하기 위해 정진한다. 그리고 보스 클러치 사마엘의 야욕을 충족하기 위해 길드 전체가 펜타곤을 추적한다. 표현이 다르지만 같다. 같아 보이지만 다르다. 시아는 이 역겨운 광경을 깨부수고 싶었다.

가디안스에서 펜타곤 조사에 매진하는 길드원은 없다. 있어도 죽었다고 알려진 신 휴와 배신자로 알려진 강 솔리다. 나머지는 간간히 들려오는 소문이나 사건을 보고서의 형태로 시아에게 넘겨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펜타곤과의 관련성은 시아에게 밖에 없는 것이다. 페라이의 ‘장난감’ 발언만 아니었어도 시아가 민감하게 펜타곤에 반응하고 개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펜타곤에 한정해서, 우리는 보스의 장기짝이니까 맘껏 사용하세요― 라고 말했었죠. 제가 말해 놓고서 이끼니 뭐니 하다니……. 그저 보스의 판단을 믿고 따르겠어요.”

“바로 저자세로 바꾸는 건 잽싸게 야비하다고 해야 하나?”

“이왕이면 변덕이라고 해주세요.”

“해석은 자유잖아.”

둘 다 소리내지 않고 온화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