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보석전쟁록

한 달 간의 보석전쟁록 : D-25 더 타락한 보석

★은하수★ 2010. 11. 3. 17:42

 

D-25 더 타락한 보석

 

국왕을 비롯하여 클라마 왕국의 중신들이 각기 말을 타고 왕성 동쪽 사냥터에 모였다. 트리오인 리벤과 헤르겔도 그 자리에 있는 건 당연했다. 헤르겔은 나이를, 리벤은 기사단을 핑계 삼아 빠지려고 했지만, 왕자 에드워드에 이어 공주 에덴이 참가하겠다는 나서는 바람에,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재미없는 놀이에 가담해야 했다.

지체 높은 분들이 말을 타고 왕성 동쪽 사냥터에서 할 만한 일이라면 하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귀족 이상의 부유층이 누리는 가장 호사스러운 놀이라고 길게 명명되는 ‘사냥 시합’이다.

국왕이 주최하는 사냥 시합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먼저 첫 번째는 지금처럼 문무불문 중신들을 대상으로 여는 것이다. 일 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길일을 골라서 한다. 두 번째는 왕궁 기사단에 소속된 기사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계절마다 한 번씩, 일 년에 네 번씩 정기적으로 실력 테스트를 겸하는 일종의 통관의례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일 년에 딱 한 번, 건국일에 여는 대규모 사냥 ‘대회’다. 전국으로 당해 시합 장소를 알려 참가자를 자유롭게 모집한다.

그런데 지금은 명실 공히 여름이다.

“저 운동치 늙은이들이 이 더운 날에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겠어?”

“문관들은 100% 전멸하겠지.”

헤르겔은 자기 일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유쾌하게 웃어 젖혔다. 리벤은 그와 함께 대열의 맨 뒤를 쫓아가면서 1분에 한 번씩 한숨을 내쉬었다.

“에덴 공주가 나올 줄이야 상상도 못했어.”

“레이먼드 왕자의 자리를 메꾸려고 한 게지.”

“그럴 필요 없잖아.”

리벤은 미간에 잔뜩 힘을 줬다. 쌍둥이가 이 모습을 보면 주름살이 생긴다고 한 소리 하겠지만, 행렬을 뒤따라가는 현실이 귀찮은 걸 어찌하랴. 표정으로 감정을 다 드러내면서 속을 조금이라도 비우는 수밖에 없었다.

“레이먼드 왕자가 아직까지 왕성에서 살고 있지만, 스스로 서쪽 구역에 한정해서 조용히 지내고 있지. 반역자로 찍히기까지 했는데 제 발로 밖에 나올 리 없지 않은가.”

“그건 알아. 그런데 그게 에덴 공주가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못 돼.”

그녀는 이를 악 물고 살쾡이처럼 으르렁거렸다.

클라마 왕국의 제 1왕자이자 왕위계승서열 3위인 레이먼드 왕자는 원래 공식 자리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왕성 내에서도, 후궁의 자식이기 때문에 스스로 활동 범위에 제한을 걸었다. 그래서 왕성의 서쪽 구역이 그의 별궁화 됐다. 그가 반역자로 의심을 사고 반역자라고 확실해진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쫓아낼 수 있으면 해보라는 듯이 소름끼칠 정도로 평범하게 자기 생활에 충실했다.

“그러면……. 오늘 에덴 공주가 나온 건 단순한 ‘여자의 변덕’이야.”

“뭐야. 그 이상한 일반논리는.”

“헤르겔 다르케스 식 여자 이해하기.”

“이- 봐-. 당신 노망들면 여기저기서 추잡한 짓거리나 골라 할까봐 겁나.”

“이미 충분히 막나가잖아.”

“아아. 자각하고 있는 거야?”

리벤은 오늘 내쉰 한숨 중에서 가장 길고 농후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다 늙은 자의 노후를 걱정하는 것은 비생산적인 걱정일지 모르지만, 거기에 얽힐 타인들을 생각하면 꽤 가치 있는 걱정이다.

“그나저나 머리 잘 썼어.”

헤르겔은 앞에서 어기적어기적 행진하는 군중을 넓고 길게 훑어봤다. 그의 시선 높이는, 각 말의 고삐를 잡고서 길을 따라가고 있는 시종들에게 맞춰졌다.

국왕부터 신하들까지 각 한 명씩 붙은 시종은 왕성에서 일하는 사용인이 아니었다. 전원 왕궁 기사단의 기사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리벤에게 호되게 당하고 직급이 나이트(Knight)에서 스콰이어(Squire)로 떨어진 자들이었다. 페이지(Page)까지 뚝 떨어진 8명도 전원 시종 노릇을 했다.

“이 여름에 중신들이 픽픽 쓰러지면 곤란하다고. 건장한 청년들이 대신 사방팔방 뛰어다니고, 늙은이들은 제자리에서 과녁 맞추기나 하면 되는 거야.”

“어이, 어이. 인격 비하적인 발언이야.”

“어디가? 어떻게? 난 순리대로 얘기했어.”

“허허허. 이 사람이. 잔뜩 비뚤어졌구먼.”

리벤이 헤르겔의 제자였으면 긴 설교를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스승 잭 세스턴 홀이 있었으면 짧지만 독하게 꾸중을 들었을 것이다.

“나도 시종 하나 붙여 줬으면 좋을 걸 그랬네.”

행렬에서 트리오에게만 시종이 없었다.

“보석을 솜방망이보다 더 가볍게 휘두르는 노친네가 그런 말 해봤자 설득력 없어.”

“허허헛. 자네가 날 싫어하는 건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상상 이상이군.”

[퍽!]

리벤은 다리를 쭉 뻗어서 헤르겔이 타고 있는 말의 목을 걷어찼다. 헤르겔은 고삐를 놓치지 않고 말이 멋대로 이탈하지 않게 머리 방향을 고정했다.

“뭔 헛소리야? 내가 스승님을 졸래졸래 쫓아다닐 때부터 다 알고 있었잖아. 다 늙은 너구리.”

“두 아이를 키우면서 좀 변하려나 기대했는데, 역시 사나운 본성은 어쩔 수 없구먼.”

말로 상대를 농락하는 솜씨는 인생을 두 배 이상 더 산 헤르겔 쪽이 더 능숙했다. 리벤은 상대를 깎아내리는 재주 정도였다. 점잖은 잭에게 배웠을 리 만무한 그녀의 독설은, 잭을 만나기 전부터-선천적 재능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어릴 때부터-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장기였다. 그러나 상대를 자유롭게 들었다 놨다하는 헤르겔에게는 딱히 효과를 보지 못했다.

[삐――――이]

사냥 시합 시작을 알리는 피리 소리가 났다. 그리고 질서정연하던 행렬이 사방팔방 흩어졌다.

“쳇!”

리벤이 먼저 말을 재촉했다. 그녀가 지켜야 할 대상이, 제일 종횡무진으로 돌아다닐 에드워드였기 때문이다.

헤르겔은 속에 능구렁이를 품은 것처럼 생글생글 웃으면서 국왕과 에덴이 있을 곳으로 향했다. 그의 입이 ‘역시 젊음이란 좋은 것이야’라고 리듬을 섞어 흥얼거렸다.

숲 속에서 투명한 녹색 양날 도끼가 번뜩였다. 그것은 사냥감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지만 리벤에게는 표지판이었다.

[캉!]

짙은 감색 플랑베르쥬가 배틀 엑스를 막았다. 두 명의 쥬엘 나이트의 충돌에 강한 바람이 일어났다.

하마터면 반으로 썰릴 뻔한 사슴은 플랑베르쥬의 주인 덕분에 무사히 도망쳤다.

“리벤 포르포냐. 다 잡은 걸 놓쳤잖아.”

투명한 녹색을 자랑하는, 긴 자루의 큰 머리 배틀 엑스는 에드워드의 그린 사파이어였다. 그리고 칼날이 파도 모양으로 굽이치는 플랑베르쥬는 리벤의 인디고 사파이어였다.

“사냥과 살생을 혼동하지 말라고, 머저리 에드워드.”

헤르겔과 생산성 없는 대화를 하느라 저기압이 된 리벤은 헤르겔의 제자 중 한 명에게 검을 들이댔다. 그것도 일국의 왕위계승서열 1위의 목을 겨눴다.

에드워드에게 배정된 시종은 이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서 부랴부랴 뛰어오고 있었다. 말을 타지 못한 자가 말을 탄 자를 쫓아야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20m를 남겨두고 멈춰 섰다.

“활로 쏘는 것보다 이게 더 효율적이란 말이다.”

“여길 피바다로 만들 셈이냐?”

트리오와 왕자의 싸움에 기어들 수 있는 대범한 이는 극히 드물 것이다. 처음 한 홉을 제외하고 둘 다 보석을 휘두르지 않았지만, 쥬엘 나이트와 보석이라는 조합은 쥬엘 나이트가 손에 보석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에덴도 나왔는데 내 성적이 저조하면 창피하잖아.”

“에덴이 피투성이 토막 시체를 보고 퍽이나 자랑스러워하겠다.”

에드워드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런데 리벤이 그를 한심해 하며 혀를 차기도 전에, 에드워드에게 배정된 스콰이어가 목청이 찢어지도록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두 명의 쥬엘 나이트는 주변 공기를 싹 바꾼 괴기스런 살기를 감지했다. 그 스콰이어가 서있는 곳이 살기의 중심지였다.

“살려, 커걱!”

별안간 나타난 악령이 스콰이어의 입 안으로 머리를 쑤셔 넣었다. 그의 발밑은 탁한 암녹색의 늪으로 변해 있었고, 그곳에서 수많은 악령이 튀어나와 그를 늪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몸이 삽시간에 악령으로 꽁꽁 뒤덮였다.

“저건……. 윌!”

“예―!”

빛의 상급정령은 악령퇴치용 성스런 빛을 짙게 깔았다. 악령은 늪 속으로 녹아내려갔고, 스콰이어는 정신이 먹히기 전에 늪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난생 처음 이런 일을 겪은 터라 공포에 질린 눈을 하며 바들바들 떨었다.

“고생 없이 얌전히 자란 티가 팍팍 나는군. 기사에 안 어울려.”

리벤은 그를 슬쩍 흘겨보고 나서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리벤. 이건 분명히 ‘녀석’의 강령식 저주술이야.”

“녀석? 강령식 저주술?”

에드워드는 주위를 둘러보며 경계태세를 취하다가 윌의 말에 귀를 쫑긋 세웠다. 공부를 하던 적에 접해본 바 있는 단어지만 현실에서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신은 쉬이 접할 수 없는 성 밖 세계의 무언가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왕성에도 마수를 뻗힐 대담한 녀석……이라고 생각만 했었는데, 그게 진짜가 돼버렸어. 독한 놈이야.”

리벤은 ‘녀석’의 술법이 한 번 개봉됐기 때문에, 두 번째가 일어나거나 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안심할 수 없었다. ‘녀석’이 얼마나 끈질기고 빈틈없는 상대인지 그녀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었다.

“윌. 사냥터 전체를 스캔해줘.”

“그런 거라면 미리 했어. 또 다른 소환 포인트는 아직까지 없어. 그런데 음지에 들어가 있으면 내 힘이 미치지 않으니까 이래저래 불확실한 부분이 많아.”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만큼 이용해먹기 쉽겠지. 뭐, 다른 곳에서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야.”

리벤과 윌은 자기들만의 대화를 이끌면서 주변을 날카롭게 경계했다. 이런 상황에 충분히 익숙해 보였다.

악령에게 한 번 붙잡혔던 스콰이어는 리벤의 살기어린 표정을 보자 더 겁에 질렸다. 얼굴빛이 새파래졌다가 새하얘졌다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손톱을 까득까득 씹다가. 자신이 공포에 사로잡혀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정신 산만하게 나타냈다.

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시체 썩은 내가 연하게 풍기는 기분 나쁜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멋대로 수풀을 헤집었다. 바람에 닿은 모든 것들이 닿은 만큼 조금씩 생기를 잃어갔고, 바람의 강도는 점차 세졌다.

“드래이크.”

에드워드는 주변에서 어기적어기적 돌아다니고 있던 자신의 탄생정령을 제 옆으로 소환했다. 명령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어도, 파이어 드래이크는 주인이 원하는 대로 불시의 공격에 대비하여 주변 경계에 신경을 기울였다. 특히 수상한 바람에 주의했다.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람이 지나갈만한 길목에 성냥불만한 불씨를 피웠다.

“리벤. 이거 꼭 그 때 같지 않아?”

“그 때보다 훨씬 정교해졌어. 세월을 헛보내진 않은 모양이야.”

리벤의 미소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오른손에 인디고 사파이어 플랑베르쥬를 잡고 있으면서 왼손에 가넷 크로스보우까지 들었다. 단거리와 중․장거리 기습을 모두 막아낼 생각이었다.

“리벤 포르포냐. 네가 이토록 경계하는 자의 정체가 뭐냐? 이 바람은 정령의 것이 아니야. 정령술사도 쥬엘 나이트도 아니라는 거지. 아까 윌이 강령식 저주술이라고 했는데 ‘이교도 박해’ 때 살아남은 자가 있었단 거야?”

―이교도 박해. 클라마 왕국에서 34년 전에 있었던 무차별 다수학살사건을 말한다. 주변국들의 질타를 받고 백성들의 원성을 산 이 사건은, 선왕이 현재 국왕에게 왕위를 양위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학살의 이면에는 ‘흑주술 척살’이라는 계획이 숨어 있었다. 흑주술사를 모조리 제거할 목적으로 관계없는 백성들을 다수 끌어들여 무차별 학살로 크게 포장한 것이다. 나라의 위신이 급격하게 떨어졌지만 흑주술 척살은 완벽하게 달성했다 ―고 보였다.

“국내 흑주술사를 모조리 쓸어내면 뭐해? 외국에서 들어올 수도 있잖아. 그리고 30년이 훌쩍 넘었어. 어떻게든 자력으로 힘을 손에 넣은 자들이 나타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야.”

“맞아. 흑주술 척살이 가능하면 정령술 척살도 가능하단 얘기니까. 클라마 왕국은 무의미하진 않아도 쓸데없는 일에 힘을 낭비했어.”

윌은 리벤의 말에 강하게 맞장구쳤다.

시체 썩은 내가 진해진 바람이 드디어 드래이크가 피운 조그만 불씨 하나를 껐다. 바람의 움직임이 더 정교해졌다.

“에드워드. 저 쓸모없는 시동을 데리고 가급적 멀리 피해라.”

“적에게 등을 보이라는 거냐?”

“본인이 왕위계승서열 1위, 에드워드 포비아 트루마이어라는 사실을 자각해라, 이 등신아.”

“안 보이는 적과 너 혼자서 싸우게 놔둘 것 같아?”

“지-랄 한다. 방해 밖에 안 될 둔탱이가 어디서 입을 싸게 놀려?”

가넷 크로스보우에 장전된 화살의 화살촉이 에드워드의 인중을 향해 반짝 빛났다. 리벤의 푸른 눈동자는 그보다 더 싸늘하고 날카로웠다.

에드워드는 푸른 사신의 위엄에 굴복하고 스콰이어가 주저앉아 있는 곳을 향해 말을 몰았다. 드래이크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주인을 따라갔다. 그리고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기 위한 불꽃들이 한 순간에 사그라졌다.

“바람이 덜 부는 북쪽으로 가 있으마.”

“일일이 떠벌거리지 말고 100m 밖으로 재빨리 꺼져.”

리벤의 신경이 1초 간격으로 날카로워졌다. 다르게 말하자면, 파트너 윌이 겨우 장단을 맞출 수 있을 만큼 리벤의 상태가 불안정했다.

“여어-. 장난질은 이제 그만 하시지?”

[휘익-!]

리벤이 플랑베르쥬를 고속으로 휘둘렀다.

바람이 갈라졌다.

“나날이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는구나.”

윌이 상공 높은 곳으로 날아올라서 리벤의 주변을 한 눈에 파악했다. 똑같이 땅 위에 있어도 리벤이 가장 잘 보였다. 심리적 착각에 의한 착시일지도 모르지만, 파트너가 가장 잘 보인다는 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었다.

“헤에. 여기군.”

리벤과 윌이 동시에 어느 그늘 어느 한 곳을 푹 찔렀다. 어둠의 스멀스멀 녹아내리고 노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찔린 상처라곤 하나도 없었다. 결단코 노인이 만든 결계가 단단해서가 아니었다. 리벤과 윌이 고의로 결계를 부술 수 있을 만큼만 힘을 사용한 것이다.

“오-랜만이군. 베시릴 타운.”

리벤의 목소리에 살기가 농후하게 응어리져 있었다. 그건 노인의 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녀석이 어떻게 성 내에 있는 거지?”

윌은 음지 밖으로 약간 삐져나온 그림자에 시선을 뒀다. 그의 주특기인 강령술을 응용해서 사념체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까 그림자가 달려 있는 본인이었다.

“누군가에게 고용됐겠지.”

“에에에에? 설-마-. 레이먼드는 아니겠지?”

“본인한테 물어봐.”

리벤이 턱짓으로 노인-베시릴 타운을 가리켰다. 그는 음지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알아듣기 힘든 소리로 고대 언어를 끝없이 중얼거렸다. 쇠붙이가 갈기갈기 분쇄되는 듯한 목소리가 청각을 적잖이 괴롭혔다.

“윌. 반경 30m에 빛의 가호 부탁해. 초강력하게.”

“응.”

윌은 힘차게 대답하고 양손을 가슴 앞으로 조신하게 모아 잡았다. 그리고 기도하는 수녀처럼 두 눈을 감고 온몸으로 빛을 발했다.

그녀를 중심으로 빛의 원이 빠르게 커졌다. 그것은 부정한 것을 밖으로 밀어내면서 바깥의 부정이 안으로 침입하지 못하게 공간을 단절하는 결계였다. 그 증거로 반경 30m 내 공간이 따뜻한 빛으로 채워졌다.

“맘대로 날뛰어봐. 한낱 인간이 상급정령의 고위 마법을 깰 수 있을 것 같아?”

“오늘은 그저 인사. 내가 외운 주문은 평범한 소환 주문이다.”

베시릴이 망토 속에서 소환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두루마기를 꺼냈다. 아군을 딱 한 명, 자기 쪽으로 긴급히 데려올 수 있는 특수한 아이템이었다. 술시에 능통한 자라면 어려움 없이 만들 수 있는 흔한 소비품이기도 하다.

“정령?”

리벤은 베시릴의 곁에서 상급정령의 기운을 느꼈다. 윌 역시 강한 마력을 느꼈다. 그녀는 곧바로 빛의 가호를 해제하고 리벤을 지키는 일을 우선했다.

베시릴의 등 뒤에서 온통 검게 차려입은 거구가 나타났다. 그의 파트너가 바라므이 상급정령 ‘진’이었다.

“흰 검신에 검은 글자가 새겨져 있는 글라디우스……인가? 자기 자신만 숨기면 뭐해? 보석 때문에 다 들통날거면서.”

리벤은 거구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런데 거구는 온몸을 검은 천으로 휘감은 것에 비해 자신의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리벤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싸울 생각도 없어 보였다. 리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맘대로 해. 너네가 레이먼드의 부하라면 굳이 지금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짓밟을 수 있으니까.”

“자신만만하군.”

“대놓고 그 미친 노인을 구하러 온 네놈보다 덜 건방지니까 괜찮아.”

“의미를 모르겠군.”

“신용할 수 없는 녀석에게 선의를 베푸는 네놈이 기특하다는 말이다.”

거구는 피식 웃고는 베시릴이 격노하기 전에 데리고 사라졌다. 진의 바람은 더 이상 동쪽 사냥터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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