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6 윌-프로텍터!
새벽까지 드렌필드의 원군들이 생명의 숲에서 대기하다가 해가 뜨고 한, 두 시간이 지나도 별 다른 일이 생기지 않자 드렌필드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생명의 숲 탐방을 개시하기 전에 6명의 소드마스터가 도착했습니다. 윌랜드에서는 모두가 이름은 알고 있는 유명 인사들이었습니다. 저도 한 명은 얼굴을 아는 정도고 내머진 이름만 알고 있었습니다.
“어서들 오세요.”
“편지 받자마자 생각도 안 하고 오셨나 보네요.”
일리안 쌍둥이는 그들을 반갑게 맞았습니다. 치니비가 장난기가 조금 섞여있지만 진지하게 행동하니까 왠지 어색했습니다.
“세상에서 극히 드물다는 소드마스터가 6명씩이나 우루루 몰려오니까 기분이 묘하군.”
폴은 그들에게 관심 없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눈은 6명 중 한 명에게 박혀있었습니다. 긴 생머리의 아름다운 분인데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눈이 아니라 의심의 눈이었습니다.
“비스테스 씨는 어엿한 사내대장부라네. 나이도 이미 60을 넘긴 ‘숫자만 노인네’이기도 하고.”
“흐음. 윌랜드의 소드마스터 중에 여자는 한 명 뿐인데 그 여자는 내가 알거든. 저 외모에 남자에다가 60이 넘었다면, 저건 자연의 섭리를 위반한 거야. 아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고.”
텍스트리터 씨가 아니었다면 비스테스 씨가 유일한 여성 소드마스터라 소문난 그 분일 거라 멋대로 단정 지을 뻔 했습니다. 뭇 여성 못지않은 수려한 외모는 비스테스 씨를 여자라 의심하기 충분했습니다. 옷으로 통해보는 몸매도 좀 날렵하면서 가녀린 자태가 떠오르는 바람에 더 헷갈렸습니다.
“이 여섯 분은 윌랜드의 소드마스터 중에서 딱 하나밖에 없는 그룹 ‘윌-프로텍터’의 단원들이셔.”
소드마스터가 단체로 행동하는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이라는 건 잘 아실 겁니다. 아마 6인의 소드마스터가 모여 만든 ‘윌-프로텍터’는 전대미문 역사상 최초의 소드마스터 그룹일 겁니다. 윌랜드에서는 유례없는 초강력 길드인 셈이죠.
“이 분, 피게스 비스테스 씨가 대장이시고, 차례대로 샤먼 시노어, 히베미어스 소비 덴데르, 키스밋 루, 티메스 카스토페, 재브 에이커. 모두 몬데비언족과 비등한 실력을 자랑하셔.”
윌랜드의 소드마스터 중에서, 아니 체이서스의 소드마스터 중에서 제일 나이가 어린 일리안 쌍둥이는 선배 격인 윌-프로텍트를 신난 아린애처럼 소개했습니다.
어차피 서로 부딪치며 지낼 거라면 첫인상은 좋게 두고 싶은데 폴은 그런 건 어찌 되도 상관없다는 투였습니다.
“정말 믿을 만한 녀석들인 거야? 대장이 계집애처럼 생겨가지곤…….”
“폴 타이니!”
“뭐? 폴 타이니라고?”
“드렌필드의 천재 소드마스터…… 폴 나이티…….”
폴의 이름이 거명되자 윌-프로텍터가 술렁거렸습니다. 단 한 사람, 비스테스 씨만 빼고. 그는 오히려 살포시 웃고 있었습니다. 폴은 그의 미소를 발견하고 불쾌의 포스를 마구 뿜으며 째려봤습니다.
“왜 웃는 거지?”
“당ㅅ니의 눈에 저희가 별 볼일 없어 보여도 저희는 윌랜드를 지키는 소드마스터입니다.”
“그게 어쨌는데?”
“윌랜드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건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다른 소드마스터라고 대답하시면 섭섭할 겁니다.”
비스테스 씨는 폴의 말을 거의 원천 봉쇄했습니다. 말솜씨도 오랜 세월에서 축적된 관록인 모양입니다. 그래도 폴이 더 오래 살았지만…….
폴은 비스테스 씨를 노려보다가 비열하게 째진 미소를 지었습니다. 딥데어족의 상징인 붉은 눈과 긴 송곳니가 두드러져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만큼 실력을 보장한다면 어디 보여봐.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소드마스터 대 소드마스터로 승부를 하려는지 폴의 손에 백색 검기가 당당하게 나타났습니다.
“폴! ……! 텍스트리터 씨…….”
“가만히 보고 있어.”
패시는 텍스트리터 씨에게 가로 막혀서 폴과 비스테스 씨를 말릴 수 없었습니다. 치니비야 회복이 덜 돼서 끼어들 수 없는 건 당연했습니다. 윌-프로텍터의 다른 분들도 가만히 있었습니다.
비스테스 씨도 머뭇거리지 않고 찬란히 빛나는 검기를 내보였습니다.
전 싸움의 파장에 괜히 휘말리지 않기 위해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싸움 구경에는 그닥 흥미 없지만 소드마스터끼리의 대결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큰 맘 먹고 관전하기로 했습니다.
분위기가 점점 가라앉자 다른 소드마스터들이 일제히 거리를 뒀습니다.
[챙!!]
순식간이었습니다. 폴과 비스테스 씨가 육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서로에게 달려들어 검을 맞부딪혔습니다. 그리고 그 파장 때문에 제가 올라가 있던 나무가 흔들려 떨어질 뻔했습니다.
[챙! 챙!]
이리저리, 사방팔방 검기가 난무했습니다. 둘 중 하나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제 머리에 퍼뜩 들었습니다. 그저 서로의 실력을 확인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심장이 표준박동수치를 넘어서 뇌도 고동칠 정도로 빠르게 난동을 부렸습니다. 뭔가 잘못됐다고, 이건 아니라고… 제 손은 저절로 크로스 보우를 전투 모두로 펼치고 무익한 싸움을 겨눴습니다.
[피슝!]
“미쳤어! 어디다 쏘는 거야!”
화살은 폴의 눈앞을 지나갔습니다. 크로스보우를 갖고 있는 왼팔은 심하게 떨렸습니다. 그리고 그 요동은 온 몸으로 퍼졌습니다.
“이건… 아니야…….”
“뭐? 네가 뭔데 참견…… 왜 울엇?!”
“아니야……. 이건 아니야. 실력은… 몬데비언이 나타났을 때 확인해도 돼. 폴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때 눈물이 얼굴을 뒤덮었습니다. 폴과 비스테스 씨의 싸움이 제 어릴 적 최악의 기억을 건드렸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충격으로 자세한 건 잊어버렸지만 기억하는 걸 거부할 정도로 끔찍했던 건 알고 있습니다. 그게 왠지 이 일과 비슷해서 저도 모르게 둘을 막았을 지도 모릅니다. 눈물도 지독히 오래 많이 흘렸습니다.
“저, 바보 아가씨가…….”
폴은 제가 우니까 김이 확 빠져서 검기를 없애고 양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습니다.
“헤시리스의 공주님은 아직도 그 일에 얽매여 계시군요.”
[척]
“아무리 비스테스 씨라도 그쪽 발언은 자제하셨으면 합니다.”
패시가 과감하게(겁도 없이) 검을 비스테스 씨의 목에 갖다 댔습니다.
전 윌-프로텍터 중에서 얼굴을 아는 건 제 먼 친척인 키스밋 루 씨뿐인데 비스테스 씨가 절 알아보니까 눈물이 딱 그쳤습니다. 절 잘 아는 것 같았습니다. 일리안 쌍둥이는 국왕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지만 저와는 얼굴을 본 일 없는 비스테스 씨가 알고 있다니까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 아가씨 말대로 해보지. 마침 어제 왔던 녀석들이 또 온 것 같으니까.”
폴은 무서운 얼굴로 세계수 쪽을 노려봤습니다.
“대단한 살기!”
윌-프로텍터와 텍스트리터 씨는 모두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저도 가려는데 패시와 폴이 붙잡았습니다.
“넌 여기서 구경해.”
“될 수 있으면 비스테스 씨하고 멀리 떨어져있어.”
싸움에 오래 길들어 있으면 다른 이의 기분을 빨리 알아차린다는데 사실인가 봅니다. 패시와 폴은 제 불안감을 읽었습니다.
“난 아직 싸움 무리니까 같이 있자.”
치니비까지……. 며칠 안 된 팀이지만 절 챙겨주는 이들 덕분에 발작을 일으키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순간적으로 엄습했던 악몽에서 재빨리 깨어날 수 있었습니다.
“응. 오늘은 치니비랑 같이 관전자로 있을게.”
싸움에서 안전할 수 있는 한계선까지 따라간 다음에 윌-프로텍터 등 소드마스터들과 몬데비언족의 전투를 지켜봤습니다. 몬데비언족의 멤버는 ‘혈안의 야수왕’을 포함한 어제 그대로였습니다. 머릿수로는 저희 쪽이 훨씬 우세했지만 역시 몬데비언족에서도 선택된 자들이라 감탄할 정도로 팽팽했습니다.
대부분 1:2의 접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혈안의 야수왕’에게는 텍스트리터 씨, 비스테스 씨, 폴 3명이 붙었습니다. 비스테스 씨의 실력을 시험하는 것도 좋지만 대상이 ‘혈안의 야수왕;이라면 단번에 목숨이 아작날 수 있기 때문에 폴이 가세한 거였습니다.
하지만 ’혈안의 야수왕‘은 살기를 가득 머금은 미소를 지으며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폴이라면 위험하단 걸 알아차렸을 겁니다.
“저 자가 ‘혈안의 야수왕’이지?”
전 날 그에게 치명상을 당했던 치니비가 이를 바득 갈았습니다. 주먹은 꽉 쥐고 분노로 떨었습니다. 행동거지며 말하는 게 어린애 같아도 자존심을 지독히 세서 분노를 참지 못하는데 이날은 제 몸 상태를 생각해서 겨우 참았습니다.
[챙! 쾅! 챙! 챙! 쾅!]
세계수를 가운데에 두고 사방에서 치열한 공방을 펼쳤습니다. 소드마스터가 괜히 실력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이 몬데비언족에게 경상이나 중상을 입힌 쪽도 있었습니다. 위험하다 싶은 두 명은 어제처럼 갑자기 나타난 워프롤 통해 사라졌고 한 명은 포로로 사로잡혔습니다.
“패시가 우릴 불러.”
패시의 손짓을 본 저는 ‘혈안의 야수왕’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치니비를 데리고 패시에게 갔습니다. 폴 쪽의 싸움에 휘말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갔는데 살기가 장난 아니었습니다. 싸움의 격렬한 파장이 그래도 전해졌다고 해야 할까요. 뼛속까지 와들와들 떨린 정도의 공포를 오랜 만에 느꼈습니다.
“뭐야?”
패시의 검기 끝에는 포로로 잡힌 몬데비언족의 왼쪽 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두 명의 소드마스터도 목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이 자를 잘 봐봐. 좀 이상하지 않아?”
포로를 본 순간 제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십니까? 제가 플리에서 왔다는 성전파괴자들의 정체를 의심한 건 이때부터였습니다. 후에 저와 같이 진실을 찾으려는 동지가 일리안 쌍둥이와 폴이 된 것도 알고 계시겠죠. 다른 분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던 ‘하프 데몬’말입니다.
“뭐가 이상하고 그래?”
“패시 일리안 군은 항상 심각해서 탈이야.”
윌-프로텍터는 포로가 하프 데몬이라는 걸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패시도 하프 데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상하다는 낌새는 잡았습니다. 치니비도 본능으로 알아차렸는데 나이 충분히 먹은 윌-프로텍터는 알지 못했다니, 폴이 그들의 실력을 의심할 만 했습니다.
“폴이나 텍스트리터 씨가 확인하면 확실해 질 텐데…….”
치니비는 폴 쪽을 돌아봤습니다.
“제길!”
텍스트리터 씨는 오른팔을, 비스테스 씨는 왼 다리를 다쳐 피를 과하게 흘리고 있었습니다. 폴도 경상을 입고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가자!”
패시와 저는 치니비를 남겨두고 폴에게 달려갔습니다.
“패시! 오른쪽으로 틀어!”
[피슝- 팍!]
패시의 주로를 화살의 활로로 삼아 은촉 화살을 날려 혈아느이 등에 명중했습니다.
“크앙!”
혈안이 피먹은 눈동자로 절 노려볼 때 폴이 은제 단검을 그의 등에 세차게 꽂았습니다. 특별 제작한 은제 단검이니 아무리 혈안이라도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패시와 폴이 각자 좌우에서 동시에 치명타를 입혔는데 혈안이 서있는 땅에 워프가 생기더니 거기서 손이 나와 혈안을 끌고 갔습니다.
“젠장, 혈안 이 자식…….”
“괜히 ‘왕’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잖아.”
“오지 마!”
[피슈슈슈슉!]
“크악!”
“폴!”
저와 폴 사이의 거리가 두 걸음 밖에 남지 않았을 때 폴의 발밑에서 ‘리버스 레인’이 시동됐습니다. 하늘로 솟구치는 살인적인 빗줄기를 그대로 받은 폴은 피투성이가 돼서 엎어졌습니다. 수수께끼의 무리에서 멤버의 부상의 대가로 폴에게 공격을 한 듯 했습니다.
저와 패시는 주변에서 마법을 쓴 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봐, 폴!”
“손대지 마. …아무튼. 난 치료제인가 보지?”
폴이 정신을 잃기 전에 지브릴에게 텔레파시를 보내서 지브릴과 그린이 곧바로 나타났습니다. 전날보다 더 듬직해 보였습니다.
“그린. 저기 중상 두 명을 맡아. 난 여기 송장을 맡을 테니까.”
딥데어족은 회복 능력이나 생명력이 탁월해서 심장만 무사하다면 웬만해서는 죽지 않는다는데 지브릴은 폴의 모습을 보고 ‘송장’이라고 노골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자기들을 일찍 부르지 않아서 일이 이렇게 커져버린 데에 대한 화풀이로 보였습니다.
지브릴과 그린의 마법으로 조금씩 나아지는 세 명을 보고 나서 소드마스터들에게 둘러싸여 잡혀 있는 포로에게 갔습니다. 오두막에 다녀오느라 폴이 다치는 걸 보지 못한 치니비가 은제 사슬을 목과 상체에 감아놔서 함부로 몸부림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생김새나 종족 특성이 몬데비언족에 가까운 하프 데몬이라 은제 사슬이 통했던 것이지 소울족의 특성에 가까웠다면 택도 없었을 겁니다.
“폴은 어때?”
“지브릴 덕분에 급속하게 좋아지고 있어.”
“어제 내 꼴보다 심해?”
“비슷하거나 그 이상.”
제 말을 들은 치니비는 곧바로 폴에게 갔습니다. 그 동안 패시가 윌-프로텍터 다섯 명을 오두막으로 보내고 포로의 심문을 시작했습니다.
후담에 의하면 싸움 도중에 윌-프로텍터의 가치를 ‘깨달았다’고 하네요. 그리고 포로 심문은 어차피 각국 대표들에게만 허락된 일이라 관계자 외 사람들은 될 수 있으면 배제하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이름은?”
“없다.”
“버렸다고 해야지. 주동자는?”
“없다.”
“잊었다고 해야지.”
패시는 무표정으로 포로를 심문했습니다. 유도 질문도 협박도 없이 심문받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더 긴장감 있고 심문다웠습니다.
포로는 두 눈을 딱 감고 이를 악 물었습니다. 그 중에 확인할 것이 있어서 제가 중간에 꼈습니다.
“종족은?”
“보다시피.”
“그래. 몬데비언족과 소울족의 혼혈.”
포로가 두 눈을 번쩍 뜨고 놀라움으로 절 노려보는 건 당연했습니다. 포로의 종족에 대해 의심하고 있던 패시도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혼혈이야 ‘하프 블러드’라는 이름으로 원래 있고 그것과는 좀 다른 것 같지만 그래도 혼혈이 맞으니까 그냥 넘어갔습니다.
이 포로는 이날 밤에 동료의 마법에 의해 목숨이 끊겼지만 그때까지 살아 있었던 덕분에 ‘하프 데몬’이 이번 일에 연관돼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대표 4명의 상의에 의해 패시와 저는 왕궁에 갔다 오기로, 폭과 치니비는 협력자들의 배치, 생명의 숲 탐사 등을 맡기로 했습니다. 왕궁 수석 기사의 독수리 전갈이 저녁 무렵에 조력 군대의 출발 소식을 전해온 덕분에 마음의 짐을 어느 정도 덜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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