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성전수호록(완)

한 달 간의 성전수호록 : D-25 페카도나드!

★은하수★ 2009. 3. 18. 09:37

D-25 페카도나드!

 

폴과 치니비에게 ‘왕궁에 갔다 올게.’라고 크게 말하고 페카도나드로 향했습니다. 페카도나드는 북쪽에 치우친 소국으로 하프 블러드가 유난히 많기로 유명합니다. 하프 블러드는 부모 중 한 쪽의 특성만 물려받아서 목덜미에 나타난 문신과 오드 아이를 가린다면 순혈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래도 혼혈은 역시 눈에 띠지요. 때문에 하프 블러드 중에서 뉴노멀의 특성을 가진 자들이 하나 둘씩 모여 세간의 이목을 최대한 피하는 것입니다. 순혈과 혼혈은 웬만해선 섞이기 힘든 장벽이 있으니까요.

“데려다 줘서 고마워, 지브릴.”

“이 정도쯤이야. 뭔가 건지면 바로 알려줘. 나도 드렌필드에서 찾아볼 테니까.”

“알았어.”

폴을 간호하기 위해 밤을 샌 지브릴이 드렌필드로 돌아가기 전에 저희를 페카도나드의 남쪽 관문에 데려다 줬습니다.

드렌필드의 대표 중에서 전날 포로의 정체가 하프 데몬이란 걸 눈치 챈 것은 지브릴 뿐이었습니다. 저 역시 하프 데몬에 대해 알고 있단 사실을 알고 나서는 아직 정확한 정보가 없으니 당분간 입 다물고 있자고 했습니다. 대강 이상한 낌새를 파악한 패시도 폴과 치니비에게 왕궁에 간다는 거짓말을 했으니 쓸데없이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 필요는 없겠죠.

“페카도나드는 아무나 들여보내지 않는데 말이야.”

윌랜드의 어느 소국보다도 페카도나드의 ‘문’이 가장 튼튼할 겁니다. 대부분의 소국이 경계의 표시만 있지 ‘문’은 없습니다. 제 고향인 헤시리스야, 여걸족의 나라니 ‘문’이 있지만 페카도나드처럼 100%강철이 아니란 말입니다.

“폐하께서 하사한 검이 지나가지 못하는 문은 없어. 윌랜드에 한정되지만.”

“역시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당당하게 페카도나드로 오자고 한 거였군.”

패시가 검을 다르게 찼다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항상 하사받은 검을 숨기듯이 차더니 이 날은 당당하게 문장이 보이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가자.”

거대한 강철문의 오른쪽 앞에 작은 벽돌집이 있는데 그곳이 검문소입니다. 검문 후 허가를 받아야 강철 문이 열리는데 그곳을 무시하면 뛰어난 담 넘기 솜씨나 열성적인 땅굴파기 솜씨 혹은 무식한 힘자랑을 맘껏 발휘해야 합니다. 저야 트레져 헌터로서 주 업무 때문에 담을 여러 번 넘어봤습니다만 딱히 할 짓이 못 되더군요. 다른 곳보다 성벽이 훨씬 높아서 애 많이 먹었습니다.

“이거 헤시리스의 엑시델 공주님 아니십니까.”

그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여걸족이나 혼혈의 무리나 평범한 사람들과는 좀 다른 소수인 이라서 끼리끼리 동맹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검문소 고관의 나이가 지긋한데, 지금의 제 얼굴에서 십 수 년 전 꼬마의 얼굴을 찾아내 버렸습니다.

“여기 온 적 있어?”

“아주 옛날에 딱 한 번.”

“대단한 눈썰미인데?”

저희끼리 속닥거리고 있는 동안에 검문소 고관이 직접 차를 내왔습니다. 향이 진한 쟈스민과 라벤더를 동시에 우린 듯한 독한 허브티였습니다. 전혀 손이 가지 않더군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급히 알아봐야 할 게 생겨서 왔습니다.”

패시가 하사받은 검을 탁자 위로 올려놨습니다. 검문소 고관이나 아래 관리나 검집과 손잡이 끝에 있는 황제의 문장을 보더니 표정이 굳었습니다. 윌랜드 전체적으로 페카도나드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으니 걱정이 앞 선 것이었습니다.

“하프 블러드 중에서 누군가 문제를 일으켰습니까?”

너무 긴장해서 그런지 단어를 하나씩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습니다.

“걱정 마세요. 문제를 일으킨 건 몬데비언과 소울의 혼혈이니까요.”

윌랜드의 혼혈이 말썽을 피우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더니 표정이 처음처럼 부드러워졌습니다. 그래도 마음을 아주 놓진 않았습니다.

“그 혼혈의 문제인데 왜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프 블러드가 가장 많은 페카도나드 만큼 혼혈에 대한 정보가 많은 곳도 없잖습니까.”

“아, 그러시군요.”

검문소 고관은 패시의 대답을 들은 다음에야 완전히 편해진 듯 했습니다. 보통은 검문 받는 사람이 긴장하기 마련인데 완전히 주객전도였습니다. 어쨌든, 고관은 부하 관리를 시켜 통행 표식이 새겨져 있는 배지를 저희에게 건네줬습니다.

“페카도나드에서 순혈은 무조건 이 배지를 착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페카도나드를 떠나실 때 반납하셔야 합니다.”

저희는 두 개의 정마름모가 겹쳐있는 모양의 배지를 상의 넥라운드 왼쪽에 달았습니다. 이 배지는 페카도나드가 생긴 이래로 모양이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고 합니다. 페카도나드의 주민의 안전을 위해서겠지요.

거대한 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정식으로 페카도나드의 땅을 밟는 순간 생기가 넘치고 발랄한 도시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프 블러드는 목덜미의 문신과 오드 아이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순혈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프 블러드를 대했습니다. 페카도나드에서 밖에 볼 수 없는 자유로운 모습이었습니다. 밖에서 사는 저희들에겐 신선한 장면이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일단 페카도나드에 들어가긴 했는데 어디서 무엇을 먼저 시작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봤다간 이상한 취급을 받을 게 뻔하고 심하면 밖으로 퇴출될 수도 있는 터라 그저 큰 길을 따라 도심으로 들어가기만 했습니다.

길을 다니면서 몰래 혹은 대놓고 저흴 노려보는 시선을 느꼈습니다. 페카도나드에 거주하는 순혈은 소수라서 얼굴이 다 알려져 있으니 저희가 밖에서 들어온 순혈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유 없이 ‘불신’의 눈길을 주고 저희는 그것을 묵묵히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부정적인 눈길에서 끝날 뿐 해코지 당하진 않았습니다.

“엑시델. 꺼림칙하겠지만 공주의 권한을 사용하지 않을래?”

도심의 광장에 도착하자 패시가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며 걷는다고 생각했는데, 패시는 침묵 속에서 페카도나드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치사할 지도 모르겠지만, 가지고 있는 권력을 사용하는 겁니다만, 제가 가출한 지 어언 7년. 꺼림칙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출했어도 왕적이 말소된 건 아니라 공주는 공주입니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공주라는 신분이 싫어서 가출한 건데 어떻게 떳떳하게 공주의 권한을 쓸 수 있겠습니까.

“패- 시-.”

“하프 블러드가 아니라 혼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나, 그 중에서 우리를 거부하지 않는 사람이나, 이 상태로는 찾기 힘들어.”

“그래서 나보고 공작을 찾아가 그런 사람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라는 거야?”

“부탁할게, 엑시델.”

부탁하는 태도마저 대장의 포스를 풍기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치니비나 폴이었으면 나이와 외모에 맞지 않게 애교와 아양을 있는 대로 섞으며 졸랐을 겁니다. 이걸 비교하며 생각하니 패시의 쿨-한 부탁을 들어주는 게 저에게 이롭지 않을까하는 생각에까지 미쳤습니다.

“나쁠 건 없지만, 그래도…….”

제가 공작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편하고 빠른 방법인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역시 가출한 공주라는 신분이 제 대답을 늦췄습니다. 선뜻 그러겠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분명 공작도 제가 가출했다는 걸 알 텐데 저를 반갑게 맞아 줄까요? 당당하게 찾아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연줄이 이런 신분에 의지한 것 밖에 없다는 사실이 한심하다고 스스로를 타박하는 중에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에 아는 사람이 한 명 있는데 그 사람한테 가보자.”

“엑시델-. 그런 건 진작 말을 했어야지.”

그때 제 어깨를 꽉 쥐는 패시의 악력이 장난 아니었습니다. 길거리에서 허비한 시간 때문이겠죠.

그나마 다행인 건 제가 아는 그 사람이 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산다는 거였습니다. 패시에게 페카도나드에 온 적이 한 번 있다 했는데 그건 정식으로 문을 통해 들어온 거고, 성벽을 뛰어넘어서 트레져 헌터의 신분으로 찾아온 건 꽤 됩니다. 일 년에 두, 세 번이니까요. 그때마다 제가 찾아가는 일종의 제 거래인이 페카도나드에서 사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낡은 선술집에 들어가니, 벽에는 현상금이 커다랗게 찍혀있는 의뢰서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고 각 테이블에는 모험자로 보이는 사람이 한두 명씩 앉아 각자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기를 다듬는 이, 의뢰서를 읽어보는 이, 주문한 식사를 해치우는 이, 다른 이와 거래하는 이 등 갖가지 모습이 보이는 중에 바에서 손님들을 보며 서있는 주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 주인이야?”

“아니, 주인의 아버지.”

“뭐?”

패시가 의아해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주인은 턱수염이 도적같이 덥수룩하고 깔끔하지 않은 옷차림에 눈매가 쳐져 의욕이 없어 보이는 비호감 50대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겉모습으로 보아서입니다.

“저건 이제 막 18살이 된 리테스 클라이어. 바쁜 아버지 대신에 일하다가 주인으로 굳었지. 어린 아이라고 무시당할까봐 저렇게 분장한 거야.”

“그래도…….”

패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믿을 수 없어도 사실입니다. 원래는 클라이어 부자 둘 다 호감형인데 분장에 뛰어난 사기꾼들이라 평소에는 비호감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유는 그게 세상 살기 편해서라네요.

“문으로 들어올 때도 있습니까?”

목소리까지 감쪽같이 사기 칠 수 있는 리테스가 의욕 없는 그 눈을 반짝였습니다. 제 옷에 달려 있는 배지나 낮에 당당히 나타난 것 말고 제 옆에 있는 패시까지 리테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습니다.

“실례야. 손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돈 벌고 싶지 않은 모양이지?”

“네, 네. 태양은 오른쪽에서 뜹니다만 달은 왼쪽에서 뜨고 싶어 한답니다.”

“사냥꾼은 사막에서 태어나 물을 갈망하지.”

암호를 주고받은 후에 바의 왼쪽 구석에 있는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언제나 정식으로 정통으로 세상을 살아온 패시에게 뒷세계의 모습은 아주 일부분만 본 것일 뿐인데도 현기증이 일 정도로 체질에 맞지 않았습니다. 구토를 할 것 같은 불안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습니다.

좁고 긴 복도를 따라 들어가 암호의 그 방에 다다랐을 때 달콤한 꿀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패시의 표정도 조금이나마 좋아졌습니다. 로열젤리는 아니지만 특상품 꿀이라고 제 후각과 뇌세포가 흥분했지만 여기서 트레져 헌터의 본성대로 움직이면 안 되기에 열심히 참았습니다.

“물을 구하러 왔다네, 피세그랑.”

[투닥닥닥]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피세그랑 클라이어는 서둘러 꿀단지의 뚜껑을 닫고 나무 상자에 넣은 후 방구석에 발로 밀어 넣었습니다. 허둥대는 꼴이 재밌어서 소리 죽여 웃었는데 당연히 그 소리를 들은 피세그랑은 저를 노려보며 작은 목소리로 악을 썼습니다.

“노크 좀 해, 이 말괄량이야!”

“시끄러. 내가 좀 바빠서 그러는데…… 우리가 원하는 물을 갖고 계시려나?”

뒷세계에 적응이 덜 된 패시에게는 미안했지만 상대가 정보암거래상(뒷세계의 인포머)이라 뒷세계의 관습에 따라 말하고, 제 본성대로 행동했습니다.

“만만한 일 때문에 온 건 아니군.”

배지와 패시를 빠르게 훑어본 피세그랑은 작은 의자 두 개를 발로 차서 저희에게 줬습니다. 중요한 걸 손 볼 때 외에는 손을 소매에서 드러내지 않으니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예의범절, 정통에 깊이 물든 패시에게는 자존심 상할 정도로 무례하게 보였을 겁니다. 그래도 묵묵히 받아들이고 얌전히 상황을 지켜봤습니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참아야 하기 때문이다. 선술집에서 나간 후 기분 나쁘지 않았냐며 물어봤을 때 패시의 마지막 말입니다.

“로포르, 카샤나리베, 트윙빈을 제치고 페카도나드에 온 거니까 성의껏 해줘.”

윌랜드에는 뒷세계의 정보 원천이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동쪽의 로포르, 서쪽의 카샤나리베, 남쪽의 트윙빈 그리고 북쪽의 페카도나드. 일반인은 함부로 출입할 수 없지만 특별한 자는 출입할 수 있는 소국들입니다. 뒷세계의 정보란 그만큼 막강하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물 값은?”

“후불. 물 질에 따라서야. 말했지만, 정말 바빠. 제대로 된 물을 빨리 찾아내야 한다고.”

피세그랑은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내가 누군지 알고 후불이라는 거야?”

“쩨쩨하게 굴지 마. 내가 여태껏 거래한 거 봐서라도 부탁 좀 들어줘.”

“안 돼.”

웬만해서는 편법이 통하지 않고 규칙은 규칙이라고 주장하는 외곬에게 말이 먹히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너무 단칼에 끊어버리니까 저마저도 기분이 확 상했습니다. 리테스가 피세그랑을 닮지 않길 바라며 패시의 팔을 툭 쳤습니다.

“왜?”

확실한 저음. 불쾌함과 거부감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숨기기는커녕 참느라 힘들었을 겁니다.

“한 번만 백색검기를 보여줘. 그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패시는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머뭇거렸습니다. 소드마스터의 백색검기란 원래 아무데서나 내키는 대로 뽑는 검이 아니기 때문에 선뜻 내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진지한 표정으로 피세그랑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으니까 저를 믿고 백색검기를 보였습니다.

“그… 그건…….”

“소드마스터의 백색검기.”

“그 정도는 알고 있어! 그게, 그러니까…….”

“아주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신 분이야. 그런데 시간이 없어서 여.기.에. 오신 거야.”

“끄응…….”

보통 암시장에서는 정부고 뭐고, 귀족이고 뭐고, 영웅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고 신경 안 쓴다고 떠들어 대지만 실물을 보면 저도 모르게 목소리도 작아지고 행동거지가 온순해집니다. 물론 진짜 어둠의 세계의 주민은 누구 앞에서건 당당하지만, 피세그랑 클라이어는 평범한 속물이라 소드마스터라는 강자 앞에서 기가 죽은 듯 했습니다.

“여기가 뭐 어때서? 그래도…… 이 몸도 따지고 보면 북쪽 인포머의 대표란 말이야.”

생각보다 재기가 빨랐습니다. 자존심이라는 철판을 얼굴에 깔고 당당하게 보이고자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그런 녀석이 백색검기를 훔쳐 볼 때마다 몸을 움찔 거려?”

“말로만 들어봤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란 말이야!”

어지간히도 당황스러웠던지 부끄러운 말을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패시는 별 의도 없이 백색검기를 가볍게 휘둘렀는데 피세그랑은 팍 쫄아서 몸이 굳어버렸습니다. 뒤늦게 눈치 챈 패시는 미안해하며 검기를 소멸시켰습니다.

“아, 실례했습니다.”

딱딱한 말투는 선술집에서 나와 크래들 거리의 한 여관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피세그랑은 눈앞에서 백색검기가 사라지자 가슴을 쓸어내리며 보일 듯 말 듯 한 한숨을 쉬었습니다.

“심장에 좋지 않아.”

순간적으로 저와 눈이 마주치자 노골적으로 제 시선을 피했습니다만, 당시 제가 워낙 무서운 눈을 하고 있어서 뻔뻔하게 앉아있지 못하고 슬금슬금 움직여서 종이와 펜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제 눈치를 보더니 이번엔 업무 중(?)일 때의 헌터의 눈이 보이니까 펜을 쥔 손을 부산하게 움직였습니다.

다 그린 간략한 지도를 내주더니 저희에게 등이 보이도록 휙 돌려 앉았습니다.

“우리가 뭘 찾고 있는지 알고 이걸 주는 거야?”

“흥. 내가 신이냐? 로포르 인포머의 대표, 제시 리프엔의 차남인 리키 리프엔이 머물고 있는 여관이야. 나보다 그 쪽을 더 믿잖아.”

동쪽의 로포르가 뒷세계에서 가장 큰 암시장을 갖고 있습니다. 정보력이 가장 세다는 뜻이죠. 대표 제시 리프엔은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그 권력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데 차남 리키 리프엔이 그녀와 맞먹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참고로 아내는 멜리사 리프엔으로 피세그랑의 장녀입니다. 그 부부가(나이차가 10살이었던가?) 실제로 제가 제일 의지하는 거래주인데 그걸 아는 피세그랑이 배려해준 거였습니다.

“그래도……. 하……. ‘하프 데몬’에 관한 일인데…….”

제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오자마자 패시와 피세그랑 모두 귀가 쫑긋해졌습니다.

“이봐, 지금 여기 페카도나드에 온 이유가 그거 때문이라면 함부로 입 벌리지 마. 얼마 전부터 뒤숭숭하다고.”

피세그랑은 낮게 깔린 목소리에 엄한 투로 경고했습니다.

 

-그 날 오후 이야기

피세그랑 클라이어가 그려준 약도를 따라 크래들 거리에 있는 한 여관에 도착한 패시 일행. 거기서 동쪽 로포르의 리키 리프엔을 만난다. 안부 인사를 나눈 뒤에 잠시 밖에 나가있던 멜리사 리프엔이 돌아오자 본론으로 들어간다. 각 국 대표와 성전을 둘러싼 이야기를 들은 리프엔 부부는 세간을 술렁거리고 있는 한 용병단 이야기를 해준다. SS급 이상 인포머들은 하나같이 하프 데몬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정작 혼혈, 하프 블러드들은 그 존재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 추측 단계인 용병단이지만 리프엔 부부는 그들이 아는 모든 것을 패시 일행에게 알려주고, 하프 데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현자 한 명을 소개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