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Mutation-Kimera(리메이크)

Mutation -Kimera : 제 2 각성 ⑥

★은하수★ 2009. 4. 28. 16:52

새벽이 지나고 학생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학교로 향하는 아침이 왔다. 아지트에서 밤을 새운 시아는 기상 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에게 건 수면 마법을 풀었다. 이 날은 분명 유일인데 웬 학교냐고 묻는다면 교내 특별 행사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개교기념일이 휴일과 겹치는 바람에 개교기념 행사를 한 해도 빠트리지 않았던 학교가 학생들을 휴일에 부른 것이다. 융통성 없고 잔인하지 않은가.

딱 두 시간짜리 개교기념 행사를 이 한 줄로 끝내고 길드 가디안스가 다스 엔데로 출정하기 직전까지 시간을 빠르게 돌려보자. 어찌어찌 핑계를 대고 집에서 나온 시아는 자신을 기다리는 길드원들을 슥 둘러봤다. 진자 슈튀크가 나타나고 사마엘이 이끄는 크루세이더가 나타날 예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가디안스. 시아는 그들을 보며 모르는 게 약이라 생각했다.

“보스. 어째서 우리가 다른 부대 녀석들이랑 같이 움직여야 해?”

특수전투부대 소속이자 솔리의 사촌 윤 솔아가 자신과 같은 특수전투부대 대원 네 명과 함께 시아에게 나가왔다. 보스가 친히 지휘하는 아주 특별한 부대로서 4천왕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다른 부대와 섞여야 한다는 것이 자존심 상했다. 게다가 보스 측근에서, 아니면 최전방에서 활동하는 것이 정석인데 이번엔 다른 부대와 다를 게 없었고 무소속 기타 길드원과도 구별되지 않는 임무를 받아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암살 부대도 가만히 있는데 너희가…… 그것도 윤 솔아 주제에 감히 그런 말을 하다니, 그냥 집 지키고 싶나 보지?”

블랙-레드 오드아이로 변한 눈을 가늘게 뜨고 옆으로 흘겨봤다. 솔아와 그녀를 따라온 대원들은 보스의 시선에 확 쫄았다.

“이번 일은 내가 총괄 지휘한다. 어느 부대나 어느 길드원이나 내 명령에만 움직이는데 어떤 한 부대한테만 특권이니 본 임무니 하는 걸 허락한다면 통제가 안 돼. 오늘은 전체가 똑같이 하나가 돼야 해. 알겠어?”

“Ja, Für Sie, meine Boß."

그들은 자신들의 경솔함을 깨닫고 위치로 돌아갔다. 그 모습이 제 1천왕의 눈에 들어왔다. 다른 길드원에 비하면 엘리트들이나 민의 기존에서는 한심한 자들이었다. 과격하고 대범하나 섬세하지 못한 싸움 방식. 민에게 섬세함과 치밀함은 같은 뜻이니 특수 전부 부대가 암살 부대에 비해 치밀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훗날 그들 중에서 솔아를 매우 아끼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면 민은 분명히 손사래를 칠 것이다.

[딸랑딸랑, 딸랑딸랑]

잘고 고운 방울 소리가 아지트 내부 전체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멜로즈의 레퀴엠이었다. 그녀는 가루다 순혈 중에서 손가락에 꼽힐 만큼 존재하는 왕족이고, 현 가루다 킹의 외동딸로서 유일한 계승 후보이기도 하다. 인간으로 나이를 환산하면 아직 6살. 가루다 일족의 미래를 위해 가디안스에 맡겨진 그녀는 큰 사움이 있을 때면 그녀의 드라이 글로케(drei Gloke : 3종) 중에 레퀴엠을 흔든다. 모두의 마음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씻어주는 레퀴엠은 멜로즈가 가디안스로 들어온 지 반년 만에 길드의 상징이 됐다.

“이리 와.”

시아는 기둥 뒤에 숨어 있는 멜로즈에게 손을 내밀었다. 멜로즈는 주변의 눈치를 살핀 후에 스커트의 주름을 휘날리며 발랄하게 뛰어왔다.

“곱게 자라오다가 각박하고 냉정한 세계에 오니까 아직까지 적응 못하고 있지?”

시아는 비취색 날개를 흔드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천천히 정성스럽게 쓰다듬었다.

“공주라고 해서 다 같은 공주는 아니야. 난 가루다 일족의 멜로즈라고.”

“응. 역시 생긴 거에 비해 씩씩해. 오늘 잘 부탁해.”

“크리세이스가 옆에 있으니까 문제없어. 가루다의 긍지를 걸고 보스의 명령을 잘 수행할 거야.”

신 휴가 이끄는 후방 지원 부대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 크리세이스 하갈이 멜로즈의 전담 보디가드다. 훗날 제 4천왕이 되는 그녀는 플러스가 가루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래는 특수전투부대의 부대장으로 있었는데 멜로즈를 맡으면서 자연스레 소속 부대를 옮겼다.

“내가 준 지령에 쓰여 있는 건 한 글자도 빠짐없이 다 기억하고 있지?”

“응. 크리세이스는 알아보지 못한 비밀지도도 점 하나까지 다 외우고 있어.”

멜로즈는 자기 주먹만 한 레퀴엠을 두 손으로 폭 감싸 쥐고서 방긋 웃었다. 그녀도 따로 비밀 임무를 맡은 것이다. 그녀의 경호 담당인 크리세이스도 못 알아보도록 절묘하게 시아의 의도가 그녀에게 전달됐다. 멜로즈는 심각한 상황임을 알면서도 게임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살짝 들떴다. 시아는 멜로즈의 그런 아이 심리를 이용했다. 자신이 하는 일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 모르게, 알아채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게임으로 생각하도록 교묘하게 멜로즈를 꽤냈다.

“좋아. 그러면 크리세이스에게 가서 출발 신호가 들릴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돼?”

“응. 보스.”

[파락!]

멜로즈는 날개를 활짝 펼치고 홀과 연결된 복도 저쪽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보디가드를 향해 가볍게 날아갔다. 지나치기 직전에, 크리세이스는 두 손으로 멜로즈의 허리를 붙잡고 사뿐히 내려줬다.

“포일러 미마이드나 오웰 슈나이더가 나타나면 멜로즈의 안전이 위협받을 수 있어요.”

민이 구석에서 조용히 나타났다. 이미 체인급으로 각성을 하고 뱀파이어가 된 상태였다.

포일러 미마이드와 오웰 슈나이더는 크루세이더의 간부다. 포일러는 시아가 휴와 함께 만났던 크루세이더의 소드, 호일러프의 이복동생이고, 오웰은 츠뵐프 리터 중 한 명이다. 이 둘은 보스인 사마엘의 명령을 받고 가루다 왕가 혈통 몰살 작전을 시행한 바 있다. 그 때문에 다수의 가루다 일족이 죽고 왕족 수가 현격하게 줄은 것이다. 현재 그들은 유일 정통 계승자인 멜로즈를 노리고 있다.

“멜로즈가 그랬잖아. 그냥 공주가 아니라 가루다의 공주 멜로즈라고. 어려도 자기 앞가림은 확실하게 하는 아이니까 걱정 안 할 거야. 그리고 따지고 보면 우리보다 나이 많잖아.”

“하긴, 그렇죠. 보스께서 직접 마법을 가르치셨고, 미스 하갈과 제 3천왕이 검술 및 무술을 가르치는 중이니까……. 많이 강해졌겠죠.”

“응. 처음에 봤을 땐 순정 만화에서 갓 튀어나온 요조숙녀이자 전형적인 중세 공주 스타일이었는데 지금은 마음이 부쩍 성장했어. 누군가가 무럭무럭 자라는 걸 보면 내가 다 뿌듯하다니까.”

시아는 민을 보면서 상큼하게 웃었다. 민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서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리고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보스, 출발은 언제쯤 하실 겁니까?”

휴가 보스의 검은 망토를 들고 왔다. 흑색 가죽 견장으로 고정시키는 망토는 은회색 실로 가디안스의 마크가 수 놓여 있었다. 은회색은 가디안스의 색, 흑색 견장 및 흑색 망토는 보스의 상징이다. 휴는 그 망토를 시아에게 걸쳐 주고 견장을 왼쪽 오른쪽 차례대로 고정시켰다. 시아는 휴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보스 가까이서 보스를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니까-.

“이제 곧……. 일제히 워프를 이용해서 지정 장소로 이동할 거야. 똑같이 이동해서 동시에, 일제히 행동을 개시해야 해.”

“충분히 일러뒀습니다.”

보스로서의 풍채가 충만한 시아는 왼손을 바지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고 오른손으로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길드원 전원이 무장을 마치고 새로 짜인 팀끼리 다 뭉치자 모두에게 똑같은 텔레파시를 보냈다.

<자, 이제 사냥 놀이를 시작한다.>

짧은 한 마디가 끝나자마자 곳곳에서 워프가 동시에 열렸다. 누구 한 명의 지체도 없이 대기팀 외 가디안스 전원이 다스 엔데 및 그 주변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지정 포인트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보스의 지령대로 잽싸게 몸을 움직였다. 능력자들이 모인 길드라서 그런지 연습 없이도 보스가 원하는 대로 딱딱 맞춰서 움직였다.

시아는 플릿과 함께 다스 엔데의 북쪽 경계에 도착했다. 그곳은 석회석으로 만들어진 기둥과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조각상들이 즐비했다. 석회석 기둥에는 고대 문자로 펜타곤에 관련된 글이 규칙적으로 새겨져 있었고, 화강암 조각상은 각각의 종족을 그 형상으로 하고 있었다. 드워프가 만든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들 솜씨 만만찮게 정교했다.

“가자, 플릿.”

“네, 보스.”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다스 엔데의 중심부에 다다르기 전에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마력이 초 다수 나타났다. 둘 다 움직임을 멈췄는데 플릿은 당황스러워 하는 반면에 시아는 이들이 나타나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덕분에 무표정의 포커페이스로 주변을 경계했다.

한 순간, 새로 나타난 생명체 중에서 간 큰 한 녀석이 시아를 향해 이와 발톱을 세우고 돌진했다. 회빛 웨어 울프는 시아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마자 강력한 샷건을 맞은 것처럼 머리가 터졌다. 피와 살, 뼈의 파편이 사방으로 무참하게 퍼졌다. 그리고 온전히 남은 몸뚱이와 사지는 허무하게 땅 위로 쓰러졌다.

플릿은 보스가 살생하는 장면을 일절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신조를 철저하게 지키는 보스가 자신을 덮쳐온다는 이유로 상대를 죽일 리 만무했다. 그것도 댈 것도 안 되는 허접한 놈을 죽이는데 자신의 손을 쓸 리 없었다. 그런데 웨어 울프를 순식간에 죽였다. 보스가 친히 굳이 상대할 필요 없는 자를 제거했다. 이번 일이 보통 큰 일이 아니라는 걸 확연히 알 수 있었다.

[구-웅]

멀리서 무거운 것이 덜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온갖 마력이 여기저기서 난무했다. 육탄전이 벌어지는 소리도 간혹 들렸다. 가디안스와 크루세이더가 본격적으로 맞붙는 것이다.

“플릿.”

시아는 차분하게 자신의 뒤에 있는 레드 드래곤을 불렀다.

“아주 잠깐만 이 악물고 버텨. 잠깐이면 돼.”

“보… 스?”

플릿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아를 보다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엄청난 압박과 공포가 점점 살을 짓눌렀다.

시아는 자신의 육체로 주변에 산재해 있는 마력, 자연이 가지고 있는 기력을 양껏 흡수했다. 상당량의 마력과 기력이 축적되자 그것들이 악마의 암기로 변해 한꺼번에 밖으로 터져 나왔다. 심장이 약하거나 자체 힘이 약한 자들은 쇼크사할 만큼 굉장했다.

“영박.”

키메라 각성 5단계 중에서 최종 단계인 ‘영박’. 거대한 십자가가 시아의 뒤에 나타났고 시아의 몸은 갖가지 검과 대못이 박혀들었다. 그리고 축 쳐진 팔과 목에 가는 와이어와 사슬이 감겼는데 그것들은 십자가에 연결되어 있었다. 소울테이커급 키메라는 현재 길드 가디안스의 보스와 길드 크루세이더의 보스 둘 뿐이라(이미 서술한 바 있다) 영박의 구속체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아주 희박하다. 그 만큼…… 영박을 본 자는 절대 살아남지 못한다. 빠짐 없이 죽어나갈 테니.

고개를 아래로 꺾고 있던 시아는 블랙-레드 오드아이를 반쯤 뜬 눈을 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다음 순간 시아를 중심으로 반경 500m나 되는 공간에 마기 폭풍이 일어났다. 그에 휩쓸린 크루세이더의 길드원은 가벼우면 기절, 심하면 심장마비 등으로 죽었다. 무사히 버티고 있는 자들은 상급 간부이거나 츠뵐프 리터가 고작이었다. 아니, 한 명 더. 그들의 보스인 클러치 사마엘도. 그 역시 소울테이커급 키메라지만 남작급 악마가 후작급 악마의 순수한 힘 앞에서는 저절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플러스인 레드 드래곤으로도 그녀를 이길 수 없단 걸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바짝 정신을 차렸다.

마기 폭풍이 가라앉고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흑색 날개였다. 같은 악마라 해도, 타 종족의 흑색도 흉내 내기 힘든 고귀한 색이 시아의 등에서 한 쌍의 큰 날개를 이루고 있었다. 그 다음에 보이는 건 블루블랙의 장발과 검정색이 짙은 검붉은 색 롱코트였다. 주변이 잠잠해지고 마지막으로 보이는 것은 보기만 해도 공포를 느끼는 블랙-레드 오드아이. 소속 길드를 불문하고 근처에 있는 모든 키메라와 순종들은 본능적으로 후작급 악마를, 소울테이커급 키메라를 두려워했다.

“오랜만에 뵙니다. 진 후작님.”

긴 헌팅소드를 오른손에 든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암황색의 짧은 머리를 바짝 묶어서 작은 꽁지를 달고 다니는 사마엘은 번쩍이는 금빛 눈동자로 시아를 바라봤다. 그의 뭄동자 색과 같은 그의 헌팅소드도 날을 살기 있게 빛냈다.

“둘 다 악마계 밖에 사는 처지인데 자주 인사 오지 그래?”

[스윽]

시아의 파혼검(악마가 상대의 혼을 파괴하기 위해 사용하는 검-악마는 육체가 허락되지 않는 혼=영 덩어리이므로 서로를 죽이려면 파혼검이 가장 확실하다)은 플랑베르쥬 형태였다. 물결 모양의 양 날은 사마엘을 베고 싶어 안달하는 듯 보였다. 손잡이는 시아 전에 누가 썼던 것처럼 가죽이 낡아 있었다.

“저게 감히 우리 보스께…….” “닥쳐라, 미물.”

눈을 찡그리지도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다. 있는 그대로 무표정으로 평소의 톤으로 상대했는데도 크루세이더의 한 간부가 그녀의 위엄에 눌려 곧바로 뒤로 물러났다.

“역시 다음 대공작으로 추대받는 분 답습니다. 이렇게까지 오싹한 기분은 아주 오랜만입니다.”

“세상 두려울 거 없단 놈이 오싹할 때도 있나?”

“당신한테 만큼은 진심으로 공포를 느낍니다. 절 죽일 수 있으면서 이유가 충분히 있는데도 이렇게 살려두시니 언제 당신 손에 죽게 될지 나날이 무섭습니다. 좋은 말로 스릴 있다고 하지만 이건 그렇게 말할 거리가 못됩니다. 당신은 정말 무섭습니다.”

사마엘은 웃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가짜 얼굴이었다. 헌팅소드를 쥔 오른손에 핏줄이 설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그의 오랜 친구 원 세훈은 그의 뒤에서 담담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그 녀석한테 손댔다간 네 놈 목 먼저 날아갈 거야.”

플랑베르쥬의 검 끝이 플릿의 뒤에 나타난 원 세훈의 목을 향했다. 달 듯 말듯하게 가까웠기 때문에 크루세이더의 제 1기사는 움직임을 멈춰야했다. 플러스가 가루다이나 각성한 후 인간으로 폴리모프했기 때문에 폴리모프하기 전에 비해 은밀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디안스의 보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야-. 정말 흥미로운 피조물이야, 진 시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여성이 짧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높은 기둥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얼굴에 기하학 무늬로 페이스페인팅을 한 광대가 팔짱을 끼고 공중에 떠 있었다.

“적당히 갖고 놀아. 플루가 화낼 거야, 페라이.”

“걱정 마, 스피. 플루의 기대에 부응할 테니까. 파인을 위한 중요한 아이를 괴롭힐 수 있는 건 플루밖에 없잖아.”

“그럴 땐 기대에 부응한다가 아니라 시키는 대로 한다고 말해야 하는 거야, 페라이.”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마, 스피.”

‘페라이’라고 불리는 에메랄드빛 여성은 화사하게 웃었다. 광대 ‘스피’는 말없이 무뚝뚝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사라졌다. 페라이는 계속 지상의 상황을 지켜봤다.

시아의 파혼검은 아직까지 세훈을 노리는 중이었다. 긴장감이 고도로 흐르는 분위기가 침묵과 함께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다가 사마엘에 의해 깨졌다. 그 때까지 사마엘은 머릿속으로 온갖 가짓수를 생각했을 것이다.

“당신의 목적도 펜타곤 아닙니까? 그러니 제 기사를 이쪽으로 보내주십쇼.”

시아는 별 망설임 없이 사마엘의 부탁대로 플랑베르쥬를 아래로 내렸다. 세훈도 머뭇거리지 않고 사마엘의 뒤로 순간 이동했다. 서늘함이 목에 긴 여운처럼 남았다. 그래도 세훈의 대담한 행동 덕분에 불안정한 사고를 진정시키고 냉정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살생을 자제하는 키메라는 좀체 찾아보기 힘든데, 살육의 충동을 제어할 수 있는 악마가 지금 내 곁에 있다네.”

페라이가 시아의 양 어깨에 손을 슬며시 얹으며 등 뒤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볼이 마주 닿을 만큼 얼굴을 가까이 했다.

소울테이커급 악마는 자신에게 접근한 여성이 절대 키메라 펜타곤 중에 하나라는 것을 본능으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그 슈튀크가 악마왕에게 접근했던 디 페라이터루흐, 통칭 페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아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가 무서운 거야? 하긴 평범한 키메라가 펜타곤을 두려워하는 건 자연 법칙이니까.”

“아-니. 정체도 모르는 놈을 찾을 수고를 덜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서 말이지.”

예상외의 대답에 당황한 페라이는 뒤로 물러서다가 갑자기 뒤돌아선 시아에게 팔을 붙잡혔다. 세게 조이는 악력에 또 한 번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 졌다.

“그 손 놔 주시죠.”

[휙]

순식간에 다가온 사마엘은 시아와 페라이의 사이를 헌팅소드로 갈랐다. 그의 급습에 시아는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나, 우리를 애타게 찾아다니는 키메라가 있다는데 그게 너구나.”

페라이는 귀여운 어린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처럼 온화한 표정을 했다. 그 표정은 사마엘이 다시 제대로 된 사고를 못하고 감정에 따라 부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게 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시아는 페라이가 사마엘에게 알 수 없는 마법을 걸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사마엘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봐 온 세훈은 사마엘이 이성을 잃고 사고를 제대로 못하는 모습을 자조 봐서 그것이 자연적인 건지 인위적인 건지 구별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그의 정신 발작이 인위적인 것이었다는 걸 알아채는 건 더더욱 무리일 것이다. 그렇다. 사마엘의 정신 발작은 키메라가 된 때부터 인위적으로 생긴 것이다.

“플루가 탐낼 만 해. 역시 흥미로운 피조물이야.”

“디 페어츠베어플루흐…….”

낯익은 단어가 귀를 통해 들어오자 입으로 낯익은 단어가 조그맣게 새나왔다.

펜타곤에 반응을 보이는 건 사마엘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마력이 불안정하게 요동쳤다. 파혼검을 쥔 손과 팔이 격하게 떨리더니 페라이를 향해 난잡한 공격을 퍼부었다. 페라이는 후후후 웃으면서 여유 있게 춤을 추듯이 피했다.

[챙!]

시아의 파혼검이 사마엘의 검을 막았다. 잔기술을 쓰지 않고 순수한 힘 대 힘으로 부딪히면 후작이 자작보다 월등히 강한 게 당연하다. 시아는 안정감 있게 검을 들고 있지만 사마엘은 팔에 힘을 잔뜩 주고 겨우 맞대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서로 마주보면서 시아는 사마엘의 금빛 눈동자가 의식을-자아를- 잃고 텅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영혼체 중에서 자아가 강한 종족 최상위권에 드는 악마면서 너무 쉽게 빼앗겼다. 상대가 절대 키메라라서? 지금 사마엘은 그냥 검만 휘두를 줄 아는 장난감이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