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Mutation-Kimera(리메이크)

Mutation -Kimera : 제 2 각성 ③

★은하수★ 2009. 4. 3. 10:36

얼마 지나지 않아 제 1천왕이 돌아왔다. 시아는 책상 위에 이마를 맞댄 채 가만히 있었다. 민이 보기에 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기 싫지만 할 수 밖에 없는 고민을 끊임없이 곱씹고 있는 중일까, 어린 나이에 이 큰 길드를 직접 운영하자니 여러모로 힘이 부치고 지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아에게 줄 레몬 티를 준비했다.

“그러지 말래두.”

시아는 요지부동인 채 말했다.

“제가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그냥 두세요.”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향기가 시아의 후각을 자극했다. 저저로 기분이 좋아지는 냄새 덕분에 겨우 상체를 일으키고 자세를 바로 고칠 수 있었다.

민이 찻잔을 갖다 놓자 그 향기가 더 진하게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향에 이끌려 손을 움직였고, 잔의 입구가 입술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레몬 티의 달콤상큼한 향기에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레몬 티의 향이 입 안에서 달짝지근한 맛으로 변해 미각까지 그에 취했다. 따뜻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 가슴을 지나갈 때 갑갑하게 가슴을 짓누르던 응어리를 데리고 다 같이 아래로 아래로 흘렀다. 레몬 티의 향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어떠세요?”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어.”

한 모금 밖에 마시지 않았지만 그거로도 충분했다. 복잡했던 마음이 정리됐다. 아니, 어지러웠던 머릿속을 정리할 수 있었다.

“저 없는 사이에 무슨 일 있으셨어요?”

“디레스한테서 충격적인 보고를 들었지.”

“그건 저도 알아요. 그거 말고 제가 모르는 일이 있었냐는 거에요.”

“그 다음에 집에 갔다 왔는데 뭔 일 있었겠어?”

시아는 찻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다가 책상 서랍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손도 따라 움직이더니 위에서부터 하나씩 열었다 닫았다. 오른쪽 서랍 세 개부터 한 번씩 건드려본 다음에 왼쪽 서랍 두 개도 마저 똑같이 했다. 찾는 것도 없으면서 한 번 더 무의미한 손놀이를 했다.

“보스, 정서불안 같아요.”

“흐음. 반은 맞고 반은 틀려.”

어느 샌가 블랙-레드 오드 아이로 변한 눈에 슬픔과 망설임이 어른거렸다.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는 찻잔에 담긴 레몬 티를 내려다봤다. 시아의 마력 때문에 잔잔한 수면이 조금씩 동심원을 만들어 나갔다.

“‘정서’는 맞고 ‘불안’은 틀렸다는 건가요? 아니면 그 반대?”

“헤- 정서가 맞고 발안이 틀리면…… 뭐가 맞는 건데?”

“정서 혼란, 정서 상실, 정서 유예 등 많잖아요. …혹시 ‘정서’가 틀린 건가요?”

민은 왼손으로 하나씩 꼽아 보다가 시아의 표정을 살펴봤다. 옅지만 미소가 있었다. 눈도 생기를 되찾고 살짝 웃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추스르지 못한 마음의 파편을 이제야 제자리로 되돌린 듯 했다.

“감정 불안이었어.”

시아는 과거형으로 대답했다.

“시답잖은 말장난 같지만, 아까의 난 ‘감정 불안’이 더 정확해.”

레몬 티의 수면에서 얌전하게 일렁이던 동심원이 사라지고 잔잔한 모양새로 돌아갔다. 그 노란 빛이 감도는 옅은 주황색 거울 면에 오드 아이가 그대로 비쳐보였다가 사라졌다. 시아의 눈은 민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약한 보스를 보러 온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민은 생기가 돌아온 시아의 눈을 피했다. 보스로서의 시아가 머릿속에 깊게 박혀 있어서 그런지 평범한 소녀로서의 시아는 왠지 거북했다.

“그럼 네 임무가 마음에 안 들어서 항의하러 온 거야?”

“보, 보스!”

“농담이야. 그러니까 용건 있으면 질질 끌지 말고 얼른 말해.”

“보스께서 기운이 없는데 어떻게 제 용건을 말해요.”

“네가 언제부터 네 기분 상태를 챙겼는데?”

부하들의 과잉보호에 질린 시아는 말은 이렇게 했어도 민의 걱정은 오히려 기뻤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살던 아이가 드디어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고 실천하게(!) 됐다는 사실이 대견스러웠다. 당황해서 붉어진 얼굴도, 걱정 때문에 낮게 깐 눈도 민에게 감정이 있다는 증거였다.

“주변일랑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류 민이 이 보스의 눈치를 본다고?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보다.”

민을 놀리는데 재미 붙인 시아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우울했다는 사실을 아주 잠깐 잊을 수 있었다. 아주 잠깐……. 민의 당황해 하는 얼굴이 시아가 잘 아는 누군가와 너무 닮아서 순간 두 명이 겹쳐보였다. 뒤이어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둔 감정이 스물스물 기어 나왔다.

시아는 또다시 멋대로 감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 민을 재촉했다.

“대체 뭐 하러 온 거야? 용검 없이 들어오지 말랬잖아.”

“아… 그게……. 아까부터 줄곧 눈이 우울해 보이셔서, 그게… 신경 쓰여서 온 거에요.”

감정 표현이 서툰 민은 그 한 마디가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말하고 나니까 속이 시원했다.

“내가 그랬어?”

깨나 놀란 투였다. 시아는 포커페이스에 있어서 자신을 이길 자가 없다고 자부해왔다. 그런데 민에게 간파 당했다. 자신이 얼마나 심각하게 제 감정에 빠졌었는지, 얼마나 바보같이 조절하지 못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제 눈에 그렇게 보였다는 거지 다른 분들께는 어떻게 보였을지는 몰라요.”

“그래?”

시아는 과장으로 보일만큼 크게 한숨을 쉬었다. 민은 괜한 말을 한 건 아닌가 싶어서 뜨끔했다.

“전……. 죄송해요 보스.”

“응? 뭐가 죄송해?”

“제가 괜한 참견을 한 것 같아서요.”

“아-니. 네가 안 왔으면 분명 밤새도록 정신 못 차리고 있었을 거야.”

고개를 갸웃 하자 짧은 커트머리가 찰랑거렸다. 플러스 상태일 때의 긴 머리도 어울리지만 오리지널일 때의 짧은 머리는 무뚝뚝하고 (세간 사람들이 말하는) 남성스러운 시아에게 ‘귀여운 면모’를 더해줬다.

“저 때문에 한숨 쉬신 거 아니었어요?”

“아, 그거. 너한테 들킬 정도로 해이해져 있던 내가 한심해서 그런 거야. 뭐, 다신 들키지 말자고 다짐도 해보고.”

시아는 자신을 향해 킥킥 거렸지만 그건 냉소가 아니라 의미 없는 헤픈 웃음이었다.

“그런 건가요?”

민은 조금 안심이 됐다. 혹시 보스가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거나 경멸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쓸데없는 짓이었다. 역시 보스는 강했다. 쉽게 마음이 흔들리지도, 마음을 무너뜨리지도 않았다.

“내가 어떤 표정을 하건 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이렇게 말해도 꼭 신경 쓰겠지만, 그래도 세상이 뒤집어질 만큼은 아니니까 일일이 챙겨주지 않아도 돼.”

“알고 있는데……. 보스잖아요. 보스니까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해드리고 싶고, 여러 가지로 더 챙겨드리고 싶고……. 그런 걸요.”

가디안스의 보스의 입이 떡 벌어지는 건 당연했다. 저 민이 그런 낯간지러운 대사를 읊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민의 본성이 원래 저런가, 일전의 사건 때문에 그 동안 숨기고 있었던 건가 싶을 정도로 적응이 안 될 모습이었다. 하지만 썩 괜찮지 않냐고 혼자 납득하는 시아였다.

“혹시 다른 천왕들이 너처럼 내 상태를 눈치 챘다면……, 눈치 챈 녀석이 있겠지만, 그냥 가만히 있을 거야. 내가 이 즈음에 뭘 생각할지 뻔하거든.”

민은 아차 싶었다. 스승 디레스에게서 언뜻 들은 것이 있었다. 조숙했던 보스가 키메라가 된 사연이 다른 키메라와는 확실히 다르고 애절하다는 사실. 초기 가디안스의 구성원 15인 만이 아는 비밀 아닌 비밀 같은 이야기를 4천왕이 된 후에 들었다. 그런데 그 일이 이번 일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아리송했다. 보스가 키메라가 된 것은 겨울, 지금은 늦봄. 적이 크루세이더의 보스, 사마엘이라는 것 밖에 교차점이 없었다. 하지만 보스의 옛 기억을 다시 들쑤시면서 물어보는 건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혼자 가슴에 담고 있는 것을 타인과 공유하면 그 무게가 줄어든다고들 하지.”

“상투적인 말이잖아요. 예외도 있는데.”

시아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민을 똑바로 쳐다봤다. 보스로서의 표정에 민은 절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제 1천왕이니까 물어볼게. 대신 앞으로의 대화는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돼. 4천왕에게도, 네 양아버지에게도 절대, 조금이라도, 언급조차도 해서는 안 돼. 맹세할 수 있어?”

“보스의 암살 부대에 들어간 그 때부터 보고 들은 것을 보스 외 누구에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좋아……. 널 제 1천왕으로 둔 게 지금 보면 잘한 일이야.”

보스는 허리를 곧게 펴고 양 팔을 팔걸이 위에 자연스럽게 올려놨다. 민을 똑바로 응시하는 눈과 지긋이 다문 입이 무거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녀의 몸에서 검은 마기가 기화된 드라이아이스처럼 풍겨 나오더니 그녀와 민의 주위에 둘러져서는 돔형의 바리아를 만들었다.

“라움 아브팡겐 (Raum Abfangen : 공간 차단).”

암기의 겉과 안을 분리하는 마법으로 바리아 안쪽은 겉과 전혀 다른 새로운 공간이 생성된다. 시아가 만든 내부 공간은 독기 충만한 어둠의 공간이라 두 사람 모두 플러스 상태로 변해야 했다. 인간의 몸으로 있으면 피부 조직과 뼈가 녹아내릴 정도로 독기가 강해서 각성 역시 체인급 정도는 해 줘야 견딜 수 있었다.

어둡고 독한 아공간에서 흑장발에 오드 아이를 가진 아름다운 악마와 짧은 은발에 좌측 진 보라색 틴트를 가진 매력적인 뱀파이어가 마기를 억제하면서 마주보고 섰다. 시아가 보스로서, 암살자로서의 민에게 기밀 임무를 명령할 때조차 애요하지 않는 대담방식이었다. 민은 보스가 얼마나 중요하고 심각한 얘기를 할지 바짝 긴장하고 기다렸다.

“필요하기 때문에 죽인다. 합당한 지론인가?”

이 말을 필두로 엄숙하고도 괴이한 대담이 시작됐다. 민은 시아의 마기에 휘감겨 보스의 압박이 어떤 것인지 피부로 직접 느꼈다.

“아군을 죽일 때는 합당한 지론, 적군을 죽일 때는 뻔한 변명거리입니다.”

“넌 알고 있어. 내가 어떻게 해서 키메라가 됐는지. 그 때 난 올바른 선택을 한 건가?”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불가항력은 옳다 아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필요하기 때문에 아군을 죽이는 건 불가항력인가?”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이고 납득할 수 있는 일이고 누군가에게는 쉽게 잊혀 질 수 있는 일이고 훗날에도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을 불가항력이라 부르는데, 다른 말로는 ‘합당한 지론’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아군을 필요 때문에 죽이는 건 불가항력입니다.”

“내가 4천왕 중 하나를 죽인다면, 그땐 넌 불가항력이라고, 합당하다고 말해줄 건가?”

“당신의 일이라면 전 뭐든 따를 겁니다. 그 누가 당신을 비방한다 해도…….”

뱀파이어는 악마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처음 만난 날부터 이미 그는 그녀의 것이었다. 정신의 노예였다. 죽으라 하면 시늉이 아니라 정말로 죽을 번견이었다. 그에게 그녀는 신 이상의 존재였다. 그녀가 하는 일에 잘못된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맹신, 광신, 그 이상 심취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을 바쳤다.

“내가 누군가를 버리고 그것이 크루세이더에게 이로운 거라 해도 내가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말해줄 건가?”

“결국은 크루세이더를 궁지로 몰아넣을 계획일 테니 당연히 당신을 따를 겁니다.”

“난……. 제 3천왕 신 휴를 버릴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한 명을 또 버릴 것이다. 내가 키메라가 되던 날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 심장을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래도 날 따를 건가?”

“물론입니다.”

“난 그들이 모르게 치밀한 계획 하에 그들을 버릴 것이다. 그래도…….”

“당신은 제 전부입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저도 당신을 돕겠습니다.”

드디어 시아가 원하는 대답이 나왔다. 가디안스의 거물 두 명을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이용하는 것은 혼자서는 벅찬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계획 하에 실수 없이 자신을 도와줄 자가 필요했다. 아군 모두와 적군 모두를 속여야 하는 위험천만한 계획을 조금의 반대도 없이, 자신을 맹목적으로 따르면서 도와줄 이를 물색했었다. 결국 제일 적합한 수족은 누구도 아닌 최측근 제 1천왕 류 민이었다. 그는 시아의 예상대로 시아에게 동조했다.

“우리들 손에 피를 묻힐 일은 없을 거야. 물고기 떼를 미끼에게로 인도하면 돼.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대로 맡은 일을 완수 해야지. 언젠간 크게 보상 받을 거야. 그러니 죄책감 같은 건 가질 필요 없어.”

민을 향해 말하고 있었지만 실은 자기 합리화였다. 또 다시 제 손으로 자신의 사람을 비열하게 이용하는 일이 일어날 줄이야…….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수월하게 일을 진행할 수 없었다. 어린 보스는 동갑내기 4천왕에게서 위로를 받은 셈이 됐다.

누군가 집무실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자, 둘은 오리지널로 돌아가고 시아는 바리아를 거뒀다. 구속체는 금방 사라졌고 바로 다음 순간에 솔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시아가 모든 마기와 독기를 순식간에 제거했기 때문에 솔리는 집무실 안에서 모종의 무언가가 이뤄졌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시아와 민의 뛰어난 포커페이스도 그에 한몫했다.

“보스, 두 번째 명령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줘.”

날카로운 목소리. 화를 참는 중이었다. 민이 솔리가 내민 지령을 받으려는데 솔리가 거부했다. 비밀 지령은 4천왕이라 할지라도 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 래-?”

시아는 솔리가 자신의 명령을 못 알아챌 리 없다는 식으로 고개를 갸웃 했다. 그녀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으면서 그녀의 방문이 의외라는 듯이 모르는 척했다.

지령을 든 솔리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잡힌 부분은 완전히 구겨져서 솔리의 마음을 대신 보여줬다. 보스에 대한 배신감. 자신에게 왜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절대 납득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나 카리스마 있게 처신하고 쉽게 동요하지 않는 그녀가 혼란스러운 마음을 그대로 내보였다.

“민아. 내가 솔리한테 뭘 명령했는지 알아?”

“보스!”

“크루세이더의 츠뵐프 리터가 되라고 했어.”

민은 놀라야할지 놀라지 말아야할지 망설였다. 휴를 버리고 다음에 또 누구를 버린다고 미리 말했으니까 놀랄 필요가 없지만 그 대상이 보스가 너무나 아끼는 솔리라는 사실이 조금 충격이었다. 하지만 4천왕도 버리는 마당에 암살 부대의 탑을 못 버릴까.

“보스…….”

“민은 내가 얼마나 독하고 저질적인 독재자인지 알고 있어. 봐, 아무렇지 않게 보고 있잖아.”

시아는 생긋 웃었다. 악인으로 보일만큼……. 모든 사건의 진정한 배후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악랄하게 보였다. 솔리는 자신의 눈에 비친 보스가 거짓된 모습이길, 현실이 아니길 바라고 또 바랐다. 악몽을 꾸고 있다고, 어서 깨어나야 한다고 두 눈 꼭 감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민. 내가 나쁜 거야?”

“네 3천왕도 죽이실 텐데 이 정도는 자비로운 거죠.”

“아니야. 적이 되라고 부추기느니 죽으라고 하는 게 더 자비롭지.”

“하지만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보스께서 다시 거둬주실 지도 모르잖아요. 역시 죽는 것 보단 사는 게 나요.”

민은 보스와 형식적인 대담을 나누면서 보스의 진의를 알아챘다. 보스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을 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려운 결정을 내린 보스의 강인함에 마음속으로 깊이깊이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보… 스……. 나, 나는 아직 보스 옆에 있고 싶어.”

솔리도 보스가 자신을 진짜로 내치려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자신은 대의를 위해 보스에게서 던져질 긴 창이었던 것이다.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에 보스가 가지러 올, 보스의 사낭감 곁을 얌전히 지키며 때를 기다려야 하는 시한폭탄이었다. 다른 이의 눈에는 배신으로 보여도 보스는 진실을 알기 때문에 어떤 욕을 얼마나 듣든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보스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난생 처음으로 자신을 ‘강 솔리’ 그 모습 그대로 봐주고 자신의 진짜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을 될 수 있으면 가까이에서 보필하고 싶었다.

보스와 디레스가 구출했던 당시, 인간과 운디네 사이에서 태어난 솔리는 정령계에서 버림받고 인간계에서마저 고립된 상태였다. 마음이 비뚤어지고 행동거지마저 난폭했다. 동갑내기 사촌 솔아가 늘 쫓아다니면서 그녀에게 애정을 뿌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둘 다 키메라이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동질감에 의한 애정이지 정말 아끼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따금 서로 플러스로 변해 (솔리 - 자작급 뱀파이어, 솔아 - 블러드 셰이드) 격한 싸움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시아가 그들을 발견하고 능력을 높이 사 매정한 친족들에게서 그들을 떼어 낸 것이다.

“보스가 소름끼칠 만큼 두렵고 황송할 정도로 아름다운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그 날 보스의 강한 힘과 보스의 후광에 대고 맹세했어. 보스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바치겠다고, 보스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다 하겠다고 맹세했단 말이야.”

“솔리니까 믿고 맡기는 거야.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시키는데 나라고 마음 편할 리 있겠어?”

솔리가 힘들어할 때면 늘 지어주는 안타깝고도 슬픈 표정. 낮게 깔린 눈은 시아가 얼마나 미안해하고 있는지 가르쳐줬다.

“미스 강. 보스가 당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잖아요.”

민도 솔리를 부추기면서 심적으로 많이 불편했다. 보스의 명령은 겉으로 보면 ‘배신’이다. 솔리는 암살 부대 내에서 민이 유일하게 자신과 대등하다고 인정하는 상대인데 그걸 권하고 부추기자니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알아. 캡틴, 캡틴도 날 내보내고 싶어?”

“가디안스 최고의 암살자를 크루세이더에 첩자로 보내는 거에요.”

“캡틴한테 물어본 내가 바보지. 당연히 보스 편을 들지 설마 내 편을 들까.”

솔리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이 보스의 명령을 따라야 하나 싶었다. 보스의 진의를 알게 됐지만 역시나 썩 내키지 않았다. ‘배신’이라니……. 아무리 거짓 배신이라도 속사정 모르는 동료들에게서는 욕을 무지 먹을 거다. 그게 딱히 두려운 건 아니지만…….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모두한테는 비밀인 거지?”

“응.”

시아는 표정을 금방 밝게 바꾸고 양 팔을 높게 올리면서 기지개를 쭉 켰다.

“보스……. 밀리엄을 감당할 수 있겠어?”

“어…… 생각 못했는데.”

“내가 배신한다고 해서 날 미워할 낭군님은 아니지만, 그만큼 후유증이 클 거야.”

“네 일 아니라는 것처럼 말한다, 너.”

“나중에 밀리엄을 달래는 건 보스 몫이니까.”

“어……. 그런가?”

솔리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보스를 반격했다. 시아는 생각지도 못한 뒷감당 거리에 사고가 잠시 멈췄다. 밀리엄을 감당할 수 있는 대단한 위인이라면 그의 스승도 아니고 약혼녀가 유일하다. 시아도 보스니까 짓누를 뿐이지 솔리처럼 능숙하게 이리저리 굴리지 못한다.

“보스가 밀리엄을 보살펴준다면야, 꾹 참고 다녀올 만 해.”

갑작스런 거래에, 시아는 벙-한 얼굴이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콜’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