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Mutation-Kimera(리메이크)

Mutation - Kimera : 제 2 각성 ①

★은하수★ 2009. 3. 23. 13:09

어느 곳이든 겉은 평화로워 보이는 법이다. 가디안스의 보스가 다니는 중학교도 인간 사회의 여느 중학교와 별반 다를 거 없는 곳이었다.

“시아님.”

이제 갓 서른 살인 아름다운 청년이 교문에서 하교 시간에 맞춰 고급 리무진을 끌고 나와 보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에 ‘4천왕’이라는 직위를 만들면서 제 3천왕이 된 신 휴였다.

“민이 아직 안 나왔어.”

시아는 동갑내기 골치 덩어리를 꼭 데리고 다녔다. 발끈하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걸어 다니는 화약고라서 필히 붙어 다녀야 했다. 하지만 민은 보스의 간섭이 귀찮고 불편해서 툭하면 도망쳤다. 그래봤자 시아 손바닥 위였지만.

“저기 봐! 진 시아야!”

“하루 이틀 봐? 쪽팔리게 시리.”

“야, 야. 난 저 분을 입학식 때부터 알아봤다. 딱 귀티 나게 생기셨잖아.”

휴의 손을 빌려 문을 열고 고급 리무진을 타는 모습은 모든 학생들의 로망이었다. 시아는 등하교가 남다르다는 것 말고도 출중한 외모 덕에 전교생 사이에서 유명 인사였다. 도도한 표정의 곱상한 아가씨가 기사가 딸린 리무진을 타고 다닌다. 유럽 근대의 유치찬란한 아가씨 표본같지만 실제로 시아를 보면 감히 뒷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교내에서 ‘아가씨’ 대접을 깨나 받으나, 모두가 ‘시아님’이라 부르는 결정적인 이유는 멀리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포스를 풍기며 걸어오는 민에게 있다.

“오늘도 민이는 최고였어. 카리스마가 철철 넘쳤다니까.”

“연휴동안 민이 얼굴을 못 본다니……. 그 사이에 내 눈이 쓸모없는 남정네들 때문에 썩지 않을까 걱정이야.”

시아가 단단히 데리고 다니는데다가 민이 꼬박꼬박 ‘시아님’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다들 이상한 오해를 하게 됐다. 민이 비록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풍기나 일단 외모는 프리미엄급이기 때문에 시아 아가씨가 민을 시동으로 데리고 있다는 웃기지 않는 이야기가 퍼져 있었다. 당사자들이 진실 해명을 하지 않으니 학생들 사이에서 소설이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아님도 대단해. 민 군을 옆에 두시다니.”

“난 류 민 때문에 시아님 근처도 못 가.”

“아가씨께 마수를 뻗는 건 중죄야!”

“그렇다고 말도 못 붙이냐?”

이러쿵저러쿵 말 많은 학생들을 지나치면서 민의 레이더에 어떤 키메라가 포착됐다.

“시아님. 전 좀 있다가 따로 들어갈게요.”

“그래? 그냥 지나쳐도 괜찮을 텐데……. 알아서 해.”

시아는 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가방을 시아 옆에 밀어 넣었다.

“그러면 내 손이 민망하잖아.”

민은 보스가 뭐라고 하던 고개로 꾸벅 인사하고 리무진의 문을 닫았다. 그걸 신호로 리무진은 아지트를 향해 출발했고 시아는 ‘어쩔 수 없나’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류 군이 걱정되십니까?”

“글쎄. 걱정하고는 조금 다른데……. 그냥 신경 쓰여.”

다른 이들은 흉내도 못 낼 빠른 각성 속도와 타고난 전투력으로 류 민이 당당하게 제 1천왕이 됐다. 4천왕 선정에서 보스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제 1천왕 선정은 전원이 전적으로 지지한 결정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민은 길드보다는 자기 성장에 전념하다가 제 1천왕이 되자 길드를 보기 시작했다. 시야와 사고가 많이 넓어지고 깊어졌다.

“이제는 내손을 덜 타지만 그래도 아직 뭔가 아니야.”

“4천왕으로서는 부족함이 없으나 인격체로서는 부족하다는 얘기십니까?”

“비슷해. 그런데 휴,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인격체로서 부족하면 4천왕으로서도 자질 부족이야. 그 때문에 민을 4천왕에 넣을지 말지 엄청 고민했어.”

“아직 15살 소년입니다. 성장기 소년에게 부족함이 있다면 그건 아직도 성장할 수 있다는 증거. 우리의 제 1천왕은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가진 유능한 재원입니다.”

시아가 결국 민을 발탁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미 충분히 대단한 능력치를 자랑하고 있지만 민은 아직 한창 성장 중이었다. 시아 본인도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10대 소녀지만, 자신은 민을 지켜보는 자로서 그가 어디까지 오를지 흥미가 생겼다. 본디 자기 자신보다는 타인이 더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쿠과앙!]

[끼이익-]

그들의 바로 앞에서 충돌사고가 일어났다. 앞에서 달리던 승용차가 신호를 무시하고 전력 질주하는 트럭과 정통으로 부딪힌 것이다. 승용차의 엔진이 터져서 차체 파편이 무수히 튀었다. 트럭은 바로 멈추지 못하고 한참을 더 가다가 화물칸이 터지고 나서야 멈췄다. 화물칸 안에 있는 것들은 단순한 가연성 물질이 아니었다.

[쾅! 콰광! 쾅!]

연속 다발적으로 터지는 데다가 불꽃색이 특이한 걸 보니 폭발성 화학 약품이 분명했다.

휴는 불마다로 변해가는 길바닥 위에 리무진을 세우고 급히 내렸다. 시아도 밖으로 나가서 주변을 살폈다. 한 순간 동시에, 시아와 휴의 눈에 한 키메라가 들어왔다.

“봤어?”

“네. 인간-묘인족 키메라입니다.”

트럭에서 뛰어내린 묘인족은 도망치면서 오리지널로 돌아갔다. 손목에 압슬이 생겼지만 도망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시아와 휴는 간단한 눈짓 후에 재빠르게 움직였다. 시아는 압슬을 끊고 키메라를 쫓았고, 휴는 마법으로 리무진을 아지트로 보낸 다음에 압슬을 끊었다. 플러스가 된 두 키메라는 오리지널 상태로 도망치는 키메라를 금방 따라잡았다.

“사고를 낸 놈이지?”

피부가 거무스름하고 허름한 옷을 (입은 게 아닌) 걸친 남자 앞에 악마 하나가 검고 긴 머리칼을 휘날리며 나타났다. 블랙-레드 오드아이만으로도 충분히 공포 분위기가 조성됐다.

“으… 으어어어…….”

남자는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몸을 비틀었다. 흰자위만 보이게 눈을 위로 치켜뜨고 압슬을 끊으려고 양팔에 힘을 줬다. 하지만 압슬은 끊어지지 않았고 남자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했다.

“이 녀석 설마……? 데어 에른스트(der Ernst : 진정).”

그 남자는 크루세이더에서 개발 중인 약을 먹은 것이다. 키메라에게 광기를 주입시켜 폭주하게 만드는 위험한 약이었다. 아직 실험 단계고 부작용이 대단히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말이 부작용이지 약을 먹은 자가 100이면 100 모두 죽었지만 죽기 전가지 느끼는 고통은 괴로워하는 몰골이 흉측해 보일 정도로 지독하단다.

시아는 급히 진정 마법을 썼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남자의 몸은 점점 녹아내렸다. 도저히 인간이라 볼 수 없는 상태까지 형체가 망가지고 숨소리, 심장소리 모두 끊어졌다.

“으읍.”

“보스!”

아무리 비위가 강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못 볼 광경을 정면에서 본 시아는 격하게 울렁거리는 속을 참지 못하고 왈칵 토해냈다. 설상가상으로, 녹아내린 시체는 형뿐만 아니라 냄새도 역했다. 때문에 속을 진정시키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보스, 여긴 제게 맡기시고 아지트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시아는 허리를 굽히고 헉헉 거리면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보스.”

“근처에… 근처에 놈들이 있을 거야. 크읏. 찾아 내.”

키메라 폭주 사건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크루세이더의 길드원이 한 조 이상 있었다. 실험 결과를 상부에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제가 이 사건을 맡을 테니까…….”

“내 말, 명령 못 들었어?”

“보스……. Ja……, Für Sie, meine Boß.”

시아가 허리를 펴고 휴를 매섭게 올려다봤다. 휴는 어쩔 수 없이 시아에게서 손을 떼고 주변 탐색을 시작했다. 하지만 보스가 걱정돼서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여어, 가디안스의 신 휴가 아니신가.”

휴와 플러스가 같은 키메라가 한 건물의 옥상에서 난간에 걸터앉아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휴는 크루세이더의 고위 간부인 그 키메라를 단번에 알아봤다. 다른 키메라도 눈에 들어왔는데, 뒤에서 절도 있게 서있는 자세가 그가 한창 아래직위라는 사실을 가르쳐줬다.

“크루세이더의 호일러프 미마이드. 너희 짓인가?”

제 3천왕은 공중에서 호일러프를 내려다봤다. 둘 다 마족에서 최상층인 셰이드. 셰이드 중에서도 최상위인 소드였다. 이 두 소드가 풍기는 마기가 맞부딪히면서 공간을 보일 듯 말듯하게 일그러뜨렸다. 적대 관계이기 때문에 살기도 마기 만만찮게 주변을 집어삼켰다.

“우린 그저 약을 줬을 뿐이야. 폭주하면서 시고를 일으킨 건 저-기 보이는 엽기적인 살덩어리지.”

“너흰 항상 그런 식으로 핑계를 대지.”

휴는 천진난만하게 웃는 얼굴이 무척 거슬렸다. 그저 재미로 생명을 갖고 장난치고 심심해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죽이는 것 같이 보였다.

“핑계? 물론 핑계지. 하지만 사실인 핑계야. 부정할 수 없는 핑계야. 멋지지 않아? 무지무지 흥분되는 일을 저지르고 뻔뻔하다 못해 경멸스러운 핑계를 당당하게 대다니 말이야. 마족이 추구하는 최고의 미학이잖아.”

“그게 미학이라고?”

“그래, 미학이야! 이 세상 모든 어둠을 손에 쥐어도 즐겁지 않아. 하지만 이런 게임은 정말이지 재밌어. 더러운 뒷공작은 게임 규칙이고 비열한 수법은 즐기는 방법이야. 이 얼마나 아름다운 게임인가! 난 이 게임이 얼마나 유쾌한지 몰라. 최고야! 내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이 전부 들어있는 바람직한 게임이야!”

“미쳤군, 완전히.”

호일러프는 자기 세계에 빠져서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입을 양 옆으로 길게 찢어 벌리며 음흉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허공을 황홀하게 쳐다보면서 온갖 더러운 미사여구를 남발했다.

“그렇게 즐거운가?”

블랙-레드 오드아이가 호일러프의 뒤통수를 아주 가까이에서 노려봤다. 두 소드의 살기와 마기 정도야 쉽게 없애 버릴 만큼 소름끼치는 살기가 호일러프를 옥상 난간에서 떨어뜨렸다. 그는 정신 못 차리고 허공에서 꼴사납게 허우적거렸다.

호일러프와 한 조를 이루고 온 파트너는 이미 시아의 손에 목을 붙잡힌 상태였다. 좀만 더 손에 힘이 들어가면 엘프의 가냘픈 흰 목은 부러질 것이다. 안타깝게도, 여린 엘프는 결박을 끊은 시아의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진…… 진… 진 시아!”

[스릉]

휴의 검, 슈바체트레너가 호일러프의 목을 겨눴다.

“아무리 한 길드의 보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건 실례지.”

호일러프는 한창 흥분 상태이던 중에 적의 대장이 나타나는 바람에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가디안스의 보스가 직접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초자 못했을 것이다. 적잖이, 아니, 아주 많이 당황해서 휴의 검을 그대로 받는 꼴이 됐다.

“이 일대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을 텐데?”

근처에 가디안스의 아지트가 있기 때문에 아지트를 중심으로 반경 1km는 철저히 가디안스가 보호 및 관할한다. 사고가 일어난 곳도 그 범위 안에 들어간다. 다른 길드는 감히 발을 들이지 못하는 곳. 크루세이더라 해도 가디안스의 아지트 근처는 함부로 손대지 않는다. 그런데 호일러프가 배짱 두둑하게도 가디안스의 구역에서 사고를 치고 말았다.

“왜… 왜… 왜왜왜왜!”

시아의 등장이 당황 수준을 넘어서 충격적이었나 보다. 호일러프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긴, 그 강한 시아가 지금 체인급 상태니까 무섭기도 할 것이다.

“왜? 왜라고 물어보는 건 여기가 어딘지 모른다는 말인가?”

“왜,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크루세이더의 간부씩이나 되면서 가디안스의 아지트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거야? 한심하기 짝이 없군.”

시아는 엘프를 떨어뜨리다 시피 손에서 놓고 호일러프에게 다가갔다. 얼굴이 맞닿을 만큼 가까웠다.

“우리 구역에서 이런 쓰레기를 뿌리고 다니라고 명령한 건 보스 사마엘인가?”

어느 샌가 시아의 손에 약이 들려 있었다. 크루세이더 소속 소드의 주머니에서 빼낸 것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시아의 소매치기 솜씨에 두 번 놀랐다.

“그건……, 읏.”

호일러프가 손을 뻗으려는데 휴의 검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우리 구역에서 추태를 부렸으니 대가를 받아야겠어. 그리고 너희 보스한테 전달해. 한번만 더 내 눈에 거슬리는 짓을 하면 그땐 그냥 지나가지 않겠다고. 연구소부터 길드 전부를 풍비박산 내겠다고.”

시아의 살기 때문에 한 순간 주변이 어둠에 휩싸인 것처럼 보였다. 호일러프는 그저 바들바들 떨었다. 자기네 보스가 화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역시 적에게는 자비고 뭐고 없이 온갖 적의와 살기를 다 퍼붓나 싶었다.

가디안스 소속 소드는 보스의 눈짓에 따라 호일러프를 풀어줬다. 그리고 호일러프가 기절한 엘프를 데리고 모습을 완전히 감추고 나서야 검을 거뒀다. 주변을 가득 메운 살기도 그 즈음에 다 사라졌다.

“너무 쉽게 보내셨습니다.”

“그럼 팔 한 쪽이라도 끊어?”

“그게 아니라, 더 겁줘도 됐을 거란 말입니다.”

제 3천왕은 보스의 살기가 어디까지 거대해지는가는 모르지만, 호일러프를 상대할 때 정도의 살기는 우스운 수준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평소 아지트에서도 가끔 느낄 수 있는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졸도해버리면?”

“밖에 내다 버리면 됩니다.”

휴가 말하는 밖이란 가디안스 구역 밖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길바닥에 내버리면 된다는 말이다.

“그거 참 획기적인 방법이네.”

“그런 말투는 어디서 배우셨습니까?”

“독학.”

그들은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내려가서 오리지널로 돌아갔다. 사람들의 눈에 띄어도 상관없지만 그들이 키메라라는 사실을 모르는 지인의 눈에 보이면 이래저래 곤란해져서 숨어서 모습을 바꾸는 수고를 해야 했다. 시아에게는 상체를 구속하는 복잡 다양한 사슬-결박-이, 휴에게는 양 손목을 구속하는 압슬이 나타났다. 하지만 플러스 상태에서 전력으로 싸운 것도 아니고 무턱대고 긴 시간동안 무리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금방 구속체가 사라졌다.

“될 수 있으면 사용하지 마십쇼. 천박해 보입니다.”

“천박하다니?”

시아가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저 개인적인 소감입니다. 마음 쓰지 마십쇼.”

“아니, 다른 표현도 많은데 왜 하필 천박하다는 말을 쓰는 건데?”

“그저 개인적인 말버릇입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휴는 살짝 미소 지었다. 시아는 휴의 미소도 어휘 구사도 다 못마땅했다.

“그나저나 그 키메라는 안타깝게 됐습니다.”

“원래 나약한 자들이 약에 의존하는 법이야. 아, 내가 화장했으니까 다시 갈 필요 없어 바로 아지트로 가자.”

“Ja, Für Sie, meine Boß.”

제 3천왕이 크루세이더의 길드원을 찾는 사이에 시아는 역겨운 시체를 악마의 불로 태웠다. 악마의 불은 재도 냄새도 남기지 않기 때문에 조용히 깔끔하게 뒤처리를 하기에 제일 적당했다. 재미없는 사설은 빼고 여하튼, 시아는 시체의 형상만 상상하면 저절로 속이 울렁거렸다. 여태껏 본 시체 중에서 제일 역겨웠다.

가디안스의 보스와 제 3천왕은 워프로 이동했다. 보스의 집무실에는 제 1천왕이 먼저 와 있었다.

“그럼 저는 가방을 가져오겠습니다.”

“잠깐, 이거.”

시아는 호일러프에게서 빼돌린 약을 휴에게 가볍게 던졌다.

“그거 화타랑 질버르한테 갖다 줘. 엄청 반길 거야.”

“Ja, Für Sie, meine Boß.”

화타와 질버르는 가디안스의 의료반 소속이자 연구반 소속이다. 크루세이더에서 개발 중인 약에 대항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약을 먹고 죽은 시체를 해부하는 것으로 그 약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다. 더욱이 크루세이더가 약을 교묘하게 퍼트려서 약 자체를 손에 넣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혹시 얻었다 해도 이미 신종이 나온 후가 대부분이었다.

“저거 어디서 나셨어요?”

민은 시아가 가져온 약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오는 길에 폭주하는 키메라를 만났거든. 그 근처엔 놈들이 있기 마련이잖아. 슬쩍 했지.”

“보스께서 스, 슬쩍요?”

민은 조금 당황했다. 보스가 뭔가를 슬쩍 한다니,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놈들하고 사소한 일 가지고 일일이 싸우는 건 귀찮아서 말이지. 그리고 내놓으라고 하면 얌전히 줄 놈들도 아니잖아. 그런고로 소매치기가 제일 편하고 평화로운 방법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을 내렸달까? 뭐, 그런 얘기야.”

시아는 쿠션감이 좋은 큰 회전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좌우로 까딱까딱 흔들었다. 그러다가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지겨운 서류더미가 눈에 띄자 가늘게 한숨을 쉬고 펜을 집어 들었다.

“보스.”

“왜?”

“임시 수색대를 내보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시아는 서류의 까만 문자에만 눈을 박고 있다가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왜?”

“보스께서 만나셨다는 그 녀석이 약을 꽤 많이 뿌린 것 같아요. 아까 제가 찾은 키메라는 다행히 약을 먹은 지 얼만 안 된 상태라 폭주 전에 여기로 데려 올 수 있었거든요.”

민은 자신이 찾은 키메라가 크루세이더 소속 키메라가 아닌 키메라에게서 약을 받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시아는 왼손으로는 턱을 괴고 오른손으로는 펜을 빙글빙글 돌렸다. 상대하기 싫은 귀찮은 일에 대해 생각할 때 자동적으로 나오는 자세였다. 약과 폭주 키메라 사건은 크루세이더와 관련된 중요한 일이자 가디안스에서 하는 주된 일이긴 하지만 제 구역 청소다보니까 은근히 귀찮아졌다.

“다른 길드는 자기네 마당 청소에 열심히 인데 왜 나는 우리 마당을 청소하는 게 제일 싫을까?”

짧은 커트머리로 서류 위를 마구 비볐다.

“제가 직접 인원을 짜고 나갈까요?”

“어? 아냐, 아냐.”

시아는 잽싸게 머리를 들었다. 구역 청소 같은 일에 제 1천왕을 직접 내보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제 1천왕의 밑에 있는 길드원은 대개 특수전투 부대의 대원들이라 구역 청소를 시키면, 일단 시키는 일은 하겠지만, 군말이 많을 것이다.

“디레스한테 맡기면 돼. 휴도 있고.”

제 2천왕 휘하의 수색 부대와 제 3천왕 휘하의 후방지원 부대를 말한다.

“그러면 가서 전할게요.”

“아니, 그냥 앉아있어.”

“하지만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벌써 명령했으니까 거기 앉아있어. 텔레파시처럼 편한 기술은 쓰라고 있는 거야. 그리고 내가 널 잡심부름꾼으로 쓰려고 제 1천왕 자리에 앉힌 줄 알아? 아니, 4천왕이 되더니 좀 이상해졌어.”

가디안스의 보스는 팔짱을 끼고 등을 뒤에 기댔다. 그리고는 제 1천왕을 지긋이 쳐다봤다.

“그야…….”

민은 볼을 긁적였다. 그리고 말하기 부끄러운지 시선을 왼쪽 아래로 두고 말을 끊었다.

“뭔제?”

시아는 민의 말을 기다리면서 의자를 빙글빙글 돌렸다. 어지러워서 멈출 때까지 민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됐어. 억지로 말할 필요 없어. 그리고 앞으로는 자잘한 일에 일일이 손대지 마. 네 밑에 있는 길드원이 어떤 애들인데. 그 애들의 책임자가 잡일을 하면 제 1천왕이라는 이름이 운다고. 또, 따지고 보면 너도 본업이 따로 있잖아.”

제 1천왕은 그가 지휘하는 길드원들과 같은 특수전투 부대 소속이면서 보스가 직접 지휘하는 암살 부대 소속이기도 하다. 굵직굵직한 일이나 기밀 임무를 수행하는 위치로 4천왕이 되기 전에도 보스의 명령에만 움직였다. 자잘한 일거리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자리 중 하나다.

민은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할 필요 없는 일 정도야 쉽게 구별했다. 그런데 그냥 길드원으로서 보스의 명령을 수행하다가 4천왕이 되니까 눈엘 들어오고, 귀로 들어오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부하들에게 임무를 하달하고, 그들이 가져온 서류를 처리하고, 그들을 관리하는 것이 평소 업무지만, 하달해야 할 일이 전부 자기가 해야 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물론 4천왕 중에는 부하에게 넘길만한 일도 대부분 본인이 하는 자도 있다. 4천왕 체제에 익숙해지지 않아서다. 민도 난생 처음으로 가지게 된 거대한 책임감에 우왕좌왕하는 것이다. 그런데 민에게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시기적으로 우연히 4천왕이 됐을 뿐, 전부터 생각해온 것이 있었다.

“그, 그러면 임무 하나 주세요.”

“풉.”

시아는 민이 얼굴을 살짝 불그스름해진 채 말을 더듬거리는 모습을 보고 마시고 있던 액체를 뿜었다. 민이 길드에 들어온 이래 처음 보는 모습이었고 의외로 잘 어울려서 놀란 것이다.

“왜, 왜요?”

“아니야. 이거…… 사래 들려서 그래.”

시아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마법을 써서 뒷수습을 했다.

“너 말이야, 혹시……. 아니다, 됐다.”

한 번 터진 웃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민이 가뜩이나 민망해 하는데, 거기다 대고 크게 웃어버릴 수 없어서 최대한 웃음을 참았다.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 잘 어울리는 건 잘 어울리는 거고, 그게 또 웃겼다. 그 생소한 모습이 재밌었다.

“말씀하세요.”

민은 시아가 말을 이상하게 끊자 뚱- 해졌다.

“응? 아……. 그냥. 혹시 내가 전에 너보고 정나미 떨어진다고 말한 것 때문에 나름대로 애교부리는 게 아닌가 싶어서.”

“읏, 그런 거 아니에요!”

“응, 그래. 설마 네가 일부러 애교를 부리겠냐.”

민은 얼굴이 완전히 벌게졌다. 시아는 그걸 보고 웃음을 더 멈추지 못했다.

[똑똑]

“보스, 잠깐 얘기 좀…….”

제 2천왕은 집무실 안의 광경을 보고 아주 잠깐 사고 회로가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보스가 호쾌하게-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고 있는데? -웃고 있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보스랑 같이 있는 건 누구도 아닌 제 1천왕이었다.

“디레스? 어, 들어 와.”

그 순간 민은 고개를 숙이고 잽싸게 밖으로 나갔다. 스승에게 인사할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