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첫 이야기
-아르꼬바레노 저주에 걸리기 전에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
정신이 몽롱하다. 몽롱하다? 그렇다. 지금 정신이 몽롱하다. 베르데 녀석, 기계 오타쿠인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팔 힘이 세다. 기계를 다루려면 무거운 장비를 척척 날라야 하니까 팔 힘이 센 게 당연할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생긴 거에 비해 위력이 장난이 아니다. 머리에 혹이라도 안 났으면 다행이다.
“여기서 뭐하냐?”
“아, 으스스한 점쟁이!”
[뻐억!]
맞은 데를 또 맞다니, 오늘 완전 재수 옴 붙었나 보다. 요즘 들어 베르데뿐만 아니라 바이퍼도 자주 본다. 세계 거물급 히트맨을 자주 보는 건 좋지 않은 징조인데 말이다. 또 다른 세계 거물급 히트맨 중 한 명인 리본이 말에 의하면 세계가 비정상적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그거야 나도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지만 그게 뭐냔 말이다. 이 으스스한 점쟁이(바이퍼)랑 명랑한 점쟁이(루체)도 모르겠단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루체가 보이질 않는다. 저번 주만 해도 왈가닥처럼 발발거리고 뛰어다녀서 이탈리아 어딜 가든 그녀와 마주쳤는데 말이다. 아, 왈가닥. 진정한 왈가닥, 아니 왈패로 통하는 여자는 랄이었지.
“난 점쟁이가 아니야.”
“하지만 입은 걸 봐. 딱 점쟁이 틱하잖아.”
“한 대 더?”
“아니, 사양할게.”
주먹일랑 웬만해선 쓰지 않는 녀석이 주먹을 망토 속에서 내보인다는 건 그만큼 불안하다는 걸까? 주변에 있는 녀석들이 조금씩 조급해 하고 불안해하고 날카로워졌다.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며 자연과 함께 랄랄라 뛰노는 나만 느긋하게 있는 것 같은 착각 속에 있지만 실은 나도 그들 만만찮게 예민해졌다. 오죽하면 제자들에게 진심어린 발차기를 날렸을까. 원래는 봐주면서 하는데 진짜로 갈빗대를 날려버렸다. 어찌나 민망하던지.
바이퍼는 유령이 이동하듯이 스스슥 걸어가더니 거대한 탱크를 손보고 있는 베르데 옆에 가서 구경한다. 그냥 구경한다. 실은 베르데와 바이퍼는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저렇게 나란히 서있는 게 어색하지 않게 됐다. 나랑 상관없는 일이지만 가끔씩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 조금씩 변해 있는 주변 모습이 신기하게 보인다. 딱 하나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랄이나 스칼이 리본의 밥이라는 사실이다. 리본이야 워낙 성격이 특이해서-내가 아는 거물급 히트맨들은 다들 성격이 제각각이지만 리본은 유독 특이하다- 그 속내를 알기 힘들지만 랄이나 스칼을 괴롭힐 때 보면 어렸을 때 분명 지독한 개구쟁이였을 것임은 틀림없다. 평소 행실로 보면 주변에 친구 하나 두지 않는 완벽한 인간상으로 자랐을 것도 같지만 본인 말로는 주변에 사람들이 꼬였다니까.
[두다다다다다다다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소리가 먼발치에서 들려온다. 그 소리는 빠른 속도로 커진다.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데, 방금 전만 해도 점으로 보이던 모습이 누군지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보인다.
“안녕.”
[휘익]
스칼은 내 상큼한 인사를 무시하고 바람을 일으키며 세차게 내 옆을 지나간다. 이럴 땐 한 가지 밖에 생각할 수 없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리본은 확실히 양반이 못 된다. 역시나 저 멀리에서 권총을 들고 맹렬하게 추격 중인 그가 보인다. 아니, 그도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 배슬배슬 웃으면서 도망치고 있는 중이다.
“리본! 스칼! 잡히면 죽는다!”
아, 저 앙칼진 목소리에 완벽한 달리기 자세, 그리고 깔끔한 군복은 분명히 랄이다. 리본하고 스칼이 그녀의 업무를 훼방 놨을 거다. 안 그러고서야 그녀가 저렇게까지 화를 낼까. 군대 훈련이나 유능한 히트맨 교육 프로그램 진행 중에 리본이 스칼을 꼬셔서 무단 침입을 했을 거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다. 재밌을 것 같아서 나도 낀 적이 있는데 랄에게 무지하게 얻어맞았다. 랄을 화나게 하면 본전도 못 찾는다는 코로네로의 말이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달까, 인생에 또 다른 교훈을 배웠달까.
“야, 랄의 주먹은 시원-하다니까.”
“루체, 오랜만. 응?”
“안녕.”
변함없이 화사하게 웃는 그녀인데 뭔가 평소와 다르다. 부드러워진 것 같다.
“있잖아-.”
“나 임신했어.”
루체 양. 역시나 제가 할 말을 미리사 알고 계셨군요. ‘좋은 일 있어?’라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물어보기도 전에 대답해 주는 센스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 여기서 내가 초점을 둬야 할 거는 그녀의 ‘미리미리 센스’가 아니라 ‘충격적인 발언’인데……? 자,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하고 나서 그녀의 말에 응수해야 할 거다.
“소리 지르면 때릴 거야.”
역시나 네가 뭘 할 건지 간파하셨군요. 하지만 그렇게 웃는 낯으로 경고해봤자 무섭지 않답니다. 평소에 맞아주는 건 그냥 친구의 예로써 도망가지 않는 것 뿐,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답니다.
“루-체-가-.”
[탕!]
“임신했데!”
[탕!]
그녀가 쏜 총알을 내 유연한 몸놀림으로 모두 피하면서 근방에 있는 히트맨들에게 이 경사를 알렸다. 베르데의 기계 조율하는 소리가 그치고, 말없는 바이퍼가 조용히 고개를 돌리고, 리본과 스칼을 두들겨 패는 소리가 멈추고, 그 쪽 3인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녀의 총성에 집중했을 지도 모르지만 내 목소리도 들은 것만큼은 분명하다.
“루체가?”
“아……?”
역시나 확실한 반응들이다. 왜냐면 그녀가 결혼했다는 이야기나 심지어 애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폭탄 발언이 뿔뿔이 흩어져 있던 그들을 이곳 한 자리로 모이게 했다. 루체의 얼굴엔 홍조가 폈다.
“아직 3개월이야.”
최근에 그녀를 볼 수 없었던 건 임신 사실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갑자기 부드럽게 보인 것도 역시 임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여성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엄마가 됐을 때 가장 온화해 진다고 한다. 루체도 곧 엄마가 될 테니까 부드러워 보일 수밖에 없는 건가. 이제 왈가닥 딱지를 붙이고 살 여자 히트맨은 랄이 유일무이할지도 모른다. 놀리는 재미가 쏠쏠할지도.
“애 아빠는 누구야?”
“비밀.”
“에-. 루체 누님, 이제 아줌마라고 불러야겠다.”
[퍽]
랄의 손에 질질 끌려온 스칼은 말 한마디 잘못 해서 랄에게 주먹으로 머리를 제대로 맞았다. 솔직히 스칼의 말이 맞긴 하지만 그래도 여성에게 그런 말은 실례지. 나도 ‘루체 아줌마’라고 부르려다가 참았는데. 우리 나이를 생각하면 이미 아저씨, 아줌마 나이지만 총각, 처녀들이라 그렇게 부르지 않았지만 루체가 최초로 아줌마가 되는 거다. 루체 아줌마. 어감이 나쁘지 않다.
“뭘 그렇게 실실거리고 웃어?”
“아냐.”
베르데가 일전에 맡겼던 쌍절곤을 어깨 너머로 건네줬다. 역시 그에게 맡기면 뭐든 뚝딱 고쳐져서 좋단 말이다. 회복 불가능 99%라고 말하더니만 완전 깔끔하다.
“폰. 아줌마라는 말이 정감 있는 말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부르면 섭해.”
아무튼 루체 앞에서는 속으로 생각하는 것도 함부로 못하겠다. 사람 속을 너무 잘 읽는다. 타고난 능력이라지만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설마 애 아빠를 사로잡을 때도 그렇게 한 걸까?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녀라면 분명히…….
“아니야.”
쳇.
“또 다른 사람의 속말을 읽었구나.”
“재밌잖아.”
같은 부류의 두 히트맨이 속닥거린다. 루체와 바이퍼. 상반돼 보이지만 가진 능력은 비슷하다. 아니, 바이퍼가 환술을 쓴다는 점에서 두 사람이 구별되지만 그래도 내가 볼 때 둘은 확실히 닮았다. 어딘가 닮았다. 글쎄. 루체는 남의 속은 잘 읽으면서 자신의 속은 절대 남에게 보이지 않고, 바이퍼는 얼굴을 보이지 않아서 속을 알 수 없다는 게 닮은 걸까? 역시 나랑 상관없지만 이 녀석들과 지내는 시간이 잦아지면서 이때껏 신경 쓰지 않던 것들이 눈에 보인다. 역시 상관없다. 이렇게 이 녀석들과 같이 있는 게 즐거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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