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신 하갈이 사랑했던 땅, 에버른. 그의 피가 흐르는 인간들이 모여 사는 그곳.
아스가르드의 산보다 신성하지 못해도 알프하임의 산보다 정결하지 못해도, 에버른의 산에는 물의 정령과 숲의 정령이 마음 편히 즐겁게 살았다. 그들의 힘으로 산은 언제나 푸르렀고 맑은 물이 흘렀다. 덕분에 산 아래에 촌락을 이루고 있는 하갈의 후손들은 신 하갈의 건전한 의지를 대대손손 이을 수 있었다. 갓블러드의 힘을 각성하지 않으면 평범한 인간과 같으나, 신 하갈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을 잃지 않았다. 각성해도 신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신 하갈에 가까워지기 위해 매일 정진했다. 이들이 신 하갈의 갓블러드고, 이들이 사는 곳이 에버른이다.
길드 가디안스의 제 4천왕이 그들의 동포이며 그곳 출시이다. 현재 유일한 각성자면서 키메라의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동포들은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키메라가 됐어도 그녀는 신 하갈의 딸이었다. 그녀가 키메라가 된 이유가 전부 동포를 구하기 위한 일의 연장선이었다는 것을, 하갈의 갓블러드 모두가 알고 있었다. 더욱이 갓블러드 자체가 키메라에 대해 온화한 종족이었다. 역시 신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키메라를 하나의 종족으로 인정하는 것인지, 갓블러드나 키메라나 신이 창조한 집단이라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다. 서로 감정싸움이 없는 이유를 파헤치기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연 호우, 이 자식. 험하게도 헤쳐 놨네.”
크리세이스는 에버른 최외곽 이공간 경계(異空間 境界)에 들어섰다. 이곳에서부터는 신 하갈의 자손만이 이동 마법을 쓸 수 있다. 역으로, 그 외의 자들은 이동 마법만 아니면 어떤 마법이든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크리세이스는 키메라이기 때문에, 아무리 동포들이 감싸 안아줘도, 이공간 경계에서는 다른 존재로 취급 받았다. 그래서 온갖 위협거리를 직접 헤치며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어깨까지 늘어트린 연갈색의 긴 샤기컷. 흰 우유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뽀얀 피부. 갓블러드가 외모는 평범한 인간이라지만, 크리세이스는 엘프에 비견될 만큼 아름다웠다. 호우가 이공간 경계의 온갖 함정을 파괴한 후 아직 재생이 덜 돼서, 그녀의 자랑에 흠집 하나 내지 않고 그곳을 통과할 수 있었다.
어떤 신의 자손이든, 갓블러드가 모여 사는 특수한 땅은 모두 최외곽에 이공간 경계가 있다. 침입자를 배제하는 최전 방어선 정도 된다. 그 안에는 오래된 유적에 숨어 있는 함정처럼, 곳곳에서 위협 및 공격 마법이 들이닥치고 실제로 물리적 함정이 존재한다. 그리고 신-지금은 잠들어 있지만-의 마력으로 창조되고 유지되는 공간이라 웬만해선 쉽게 돌파할 수 없다. 그래도 수시로 드나들면 일정한 패턴에 익숙해지기 때문에 최단 루트와 공략법을 익힐 수 있다. 굳이 언급하자면, 신 하갈의 자손들과 친교를 맺은 극소수 인맥들이 이를 익혔다. 하지만, 초행부터 이공간 경계를 돌파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곳을 유지하는 마력보다 강한 힘을 가진 자들이 종종 쉽게 돌파했다. 공간이 당분간 재생할 수 없도록 무자비하게 망가트리면 되는 일이니 말이다.
길드 크루세이더의 제 11기사 알프레드 파트만은 길드 가디안스를 정신적으로 무너트리고자 단독으로 한 가지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가디안스의 길드원을 직접 괴롭히지 않고, 길드원의 가족·친척·친우·기타 지인 등을 가장 잔혹하게 괴롭히다가 죽이는 것. 가디안스가 소수정예 길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알프레드의 세 번째 타깃은 크리세이스, 즉 신 하갈의 갓블러드 전원이었다. 그래서 신 복희의 갓블러드이자 길드 크루세이더의 제 2기사, 연 호우에게 도움을 청했다. 에버른 하나만 보면 알프레드 혼자서도,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망가트릴 수 있다. 그런데 가디안스의 제 4천왕이 강림하면 알프레드 혼자서는 어림도 없다. 이미, 서로 각 길드에 가입하기 전에 맞붙은 적이 있어서 크리세이스가 얼마나 무서운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바로 그가 S프린세스의 진면모를 직접 겪은 소수 중 한 명이었다.
츠뵐프 리터 중에서 가장 자존심이 세고 자신이 진짜 신인 마냥 고고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연 호우. 하나로 길게 땋아도 허리까지 오는 흑장발과 금빛 눈동자가 그 분위기를 받쳐줬다. 그리고 키메라가 된 후에 플러스의 영향으로 피부, 특히 얼굴이 창백해졌는데, 그 쪽이 더 잘 어울렸다. 그런데 그는 외모에선 전혀 추측할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현재 존재하는 신 복희의 갓블러드 중에서 호우만큼 싸움과 피와 살육과 삼라만상의 쾌락을 사랑하는 자도 없을 것이다. 아니, 대자연에 품어진 모든 생명 중에서 극소수 부류에 해당할 것이다. 피로 물든 평화를 사랑하고, 찢고 짓이겨 밟는 잔인한 싸움 속에서 극도의 쾌락을 느꼈다. 그런 그가, 크리세이스만큼은 경멸했다. 블랙리스트에서 0순위에 둘 만큼 싫어했다. 그녀가 다스 엔데에서 크루세이더의 하급 길드원을 싸그리 해치우고 그 시체 더미 위에서 새로운 시체를 아래로 내동댕이치는 장면을 본 이후로, 그녀에게서 천천히 거부감이 생기더니 지금 와서는 완전 경멸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것은 S프린세스 크리세이스를 향한 호우만의 사랑이었다. 타인의 피에 흠뻑 젖은 그녀를 자기 손으로 찢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매번 꿈을 꿀 때마다, 심지어 낮잠 중에도, 그녀를 갈기갈기 찢고 그녀의 피를 그녀의 얼굴에 바르는 꿈을 꿨다. 잠에서 깨어나면 꿈에서의 흥분이 최고의 쾌락으로 변했다. 어떻게 보면, 그는 비뚤어진 방식으로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것이다.
“후-. 나의 여신은 언제 오려나.”
호우는 에버른에서 크리세이스를 애타게 기다렸다. 알프레드가 신 하갈의 갓블러드와 싸우건, 온갖 것들을 다 부수건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이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그녀만 눈에 어른거렸다.
“아아, 나의 여신, 피를 뒤집어쓴 가증스러운 그대. 신 하갈에게 어울리지 않는 잔인한 당신. 아아아아아아 몸이 떨려. 그대만 생각하면 심장이 미칠 듯이 뛰어. 얼른 망가트리고 싶어. 나의 단 하나뿐인 여신이여, 빨리 내게 와. 아아아아아아아아 이 흥분을 어떻게 진정시키지? 그대의 살을 뜯고 그대의 피를 마시고 그대를 품에 안으면 이 지상에서 최고로 행복해질 거야.”
그는 커다란 바위 위에 드러누운 채 자지러지게 웃었다. 너무 흥분해서 몸 구석구석이 근질거렸다. 타인 앞에서 고고한 신 행세를 해도, 혼자 있을 때면 크리세이스를 생각하며 자기만족적 쾌락에 흠뻑 취했다.
[콰르르르―!]
골드 드래곤(알프레드의 플러스)이 이집 저집을 가차 없이 짓밟았다. 신 하갈의 자손들은 각성하지 않으면 평범한 인간이기에, 골드 드래곤의 횡포에 맞서지 못하고 에버른에서 가장 신성하고 안전한 곳으로 피했다.
“나의 여신이여, 빨리 와. 당신의 사람들이 다 죽기 전에.”
호우는 가늘게 미소 지었다. 그가 애타게 기다리던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으면 저 멀리서도 네 놈의 재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 날 못 죽여 안달인 건 여전하나봐.”
“어서 와. 나의 여신.”
그는 바위에서 가볍게 뛰어 내려왔다. 가뜩이나 몸이 욱신거리도록 강한 흥분 상태였는데, 크리세이스의 살기를 직접 접하니까 머릿속이 새하얘지도록 흥분이 상승했다. 그에게 이성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호우의 순간이동은 보스와 민과 맞먹었다. 크리세이스는 피하지도 막지도 못했다. 만약 뼈가 으스러지도록 강한 포옹이 아니라 급소를 노리는 공격이었으면 죽었을 것이다. 그녀는 호우가 그의 목소리가 귀에 닿는 속도만큼 다가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바람에, 지독히 당황해서 몸에서 힘이 빠졌다.
“너무 하잖아.”
호우는 입술을 크리세이스의 귀에 살짝 붙인 채 속삭였다. 크리세이스는 간지럽고 기분 나빠서 몸부림쳤지만 호우의 품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는 최대한 세게 그녀를 안고 있었다.
“난 한 번도 여신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 농담도 안 해. 나의 여신이잖아. 당신을 찢고 붉은 피를 보고 싶을 만큼 사랑해. 절대 죽이지 않아. 이렇게 내 품에 쏙 들어오는 당신을 내가 어떻게 죽여. 피와 가장 잘 어울리는 여신을 어떻게 죽일 수 있겠어. 이렇게 미워하는데, 이렇게 사랑하는데. 응? 드디어 가까이 있게 됐잖아. 좀 더 즐기자구.”
호우가 입술로 귀에 있는 성감대를 계속 자극했다. 크리세이스는 몸에서 계속 힘이 빠지는 바람에 그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치욕과 굴욕 때문에 이를 빠드득 갈았다. 하지만 몸이 자꾸만 더 그에게 붙으려고 했다.
“읏!”
호우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크리세이스의 팔을 천천히 긁어내렸다. 그의 플러스는 후작급 악마. 와인드급까지 각성한 키메라라서 오리지널 상태에서 플러스 상태를 일부 끄집어 낼 수 있었다.
“아름다워.”
“닥쳐.”
“나의 여신. 난 진심이야.”
“읏. 하지……마.”
상처에서 배어 오르는 피를 혀로 핥자 시큰거리는 통증이 뇌에 순식간에 전해졌다. 크리세이스는 호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몸을 파르르 떨었다. 호우는 어떠한 마법도 쓰지 않았고 마력조차 제일 약한 상태로 감추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 분했다. 분해도 어쩌랴. 저항할 힘이 나지 않는 것을. 몸에선 더 힘이 빠지고 그만큼 호우에게 기대게 됐다.
호우는 왼팔로 크리세이스의 허리를 감싸 안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다시 상처를 내고 혀로 피와 상처를 핥았다.
“하지 마. 제발…… 하지 마.”
크리세이스는 처음 겪는 수치를 견디기 힘들었다. 너무 예상외라서 더 괴로웠다. 그러나 호우는 고대하던 쾌락을 음미하고 있는 터라 그녀를 놔주지 않았다. 시선을 위로 약간 올려 그녀의 쇄골에 입을 맞췄다. 크리세이스가 움찔 거리자, 호우는 그녀의 어깨와 허리를 감싸며 다시 한 번 꽉 끌어안았다. 그는 입술로 그녀의 관자놀이에서 귀로 차근차근 훑었다. 그리고 처음과 같이 입술을 그녀의 귀에 살짝 붙였다.
“뭘 하지 말까? 에버른을 폐허로 만드는 것? 당신의 동포를 학살하는 것? 당신이 원하는 거면 뭐든 해줄게.”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이 시작됐다. 그는 극도의 흥분 속에서도 실낱 같이 남은 이성으로 그녀를 농락했다.
“너무너무 미워하면서 아주아주아주아주 사랑하는 나의 여신. 그대가 내게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 이뤄줄게. 아아, 나는 알아. 당신의 피를 마시고 싶은 만큼 사랑하니까 잘 알아. 미련한 알프레드를 죽이고 싶지? 그치? 동포들을 구하고 싶지? 그래서 미워. 하지만 알프레드를 죽이는 사랑스런 그대를 보고 싶어. 알프레드를 너덜너덜한 시체로 만들고 녀석의 피를 뒤집어 쓴 여신이 눈에 선해. 아아아아 사랑해. 엄청 흥분돼. 사랑해, 나의 여신.”
크리세이스를 끌어안은 두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호우는 끓어오르는 욕구를 참고 있었다.
“제발……. 놔 줘. 나… 읍. 으음.”
두 사람의 입술이 깊게 포개졌다. 한참이 지나 호우가 그녀를 놔줬다. 욕구를 모두 해소하지 못했지만 석 달 버티고도 남을 쾌락을 얻었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끊었다.
“너…….”
크리세이스는 호우에게서 떨어지다가 휘청거렸다. 호우는 그녀의 허리를 쉽게 끌어안아 그녀가 쓰러지지 않게 받쳐줬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아가씨에게 방금 건 너무 강했나?”
“시끄러워.”
“이 상태로 미련한 알프레드를 죽일 수 있겠어? 아무리 여신이라도 무리야.”
호우는 이마, 볼, 목덜미, 쇄골에 차례차례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손톱으로는 상처를 내면서 키스마크는 절대 내지 않았다.
“내가 그 바보를 데려올게. 나도 갓블러드니까 여기가 멸망하는 건 탐탁지 않거든.”
그는 크리세이스의 왼쪽 쇄골 아래에 손톱으로 긴 상처를 냈다. 뽀얀 살 위로 붉은 피가 배어 오르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는지 황홀하게 쳐다봤다. 그리고 피가 흘러내릴 즈음에 혀로 조심스럽게 핥았다. 그러다가 눈을 치켜 올려 크리세이스의 괴로워하는 표정을 감상했다.
“이제, 그만 해. ……. 이런 거… 하지 마.”
“그러면 여기가 멸망해도 좋아?”
호우는 다시 크리세이스의 입술을 범했다. 이번엔 잠깐 뿐이었다.
“나, 여신이 녀석을 엉망진창으로 죽이는 모습을 보고 싶어. 당신도 그걸 하고 싶잖아. 내가 녀석을 데려올 테니까 당신이 멋지게 해치워. 그러면 당신은 여기를 구하고, 난 쾌락을 구하는 거야. 서로 좋잖아. 그리고 그 다음에 더 큰 쾌락을 즐길 수 있어. 피에 물든 당신을 보면 엄청나게 흥분해 버리거든. 그 때가 되면 당신도 최고의 쾌락에 데려가 줄게. 자, 어때? 멋진 거래지?”
“동료를…… 파는 거야?”
“사랑하는 나의 여신과 최고의 쾌락을 위해서라면 머저리 하나 버리는 것쯤이야.”
멀리서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렸다. 방어선이 위험수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크리세이스에게 선택지란 없었다. 적의 손을 빌리는 굴욕. 몸을 농락당하는 치욕. 동포를 위해 감내해야 했다.
보스에게도 말 못할 비밀이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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